295화
황제와 여러 사람들이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무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마차 안에선 딜런이 그 모든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자앙!”
특이하게도 마차 밖에서의 소리는 안까지 잘 들려왔으나, 마차 안에서 나오는 소리는 바깥까지 흘러가지 않았다.
이는 안에 갇힌 죄인에게 사색에 잠길 기회조차 주지 않기 위함이고, 반대로 죄인이 날뛰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만든 마법적 기능이다.
그리고 딜런 아스터는 그 효과를 아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
“황제도 모자라서 마탑주까지 왔다고? 날 죽이기 위해서?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딜런은 단단히 결박된 양손을 끌어올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온 금발은 칙칙한 밀색으로 더럽혀졌고 손아귀에 힘을 주면 줄수록 두피가 뜯겨나갈 것처럼 고통은 강해졌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해를 해 보아도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은 그대로였고, 바깥에서 저를 두고 싸우는 목소리는 더욱 격해져만 갔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지? 오히려 잘못한 건 엘레인 그 계집년이 아닌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난생처음으로 ‘실패’를 맛보았던 그때를.
내게 실패를 안겨주었던 존재가 겨우 열두 살짜리 꼬맹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그 지독한 절망감을!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계집은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고 대신 그가 얻은 것은 불신과 아비의 폭력.
그리고 왕자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난 잘못한 거 없어. 그저 받은 대로 돌려줬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해? 어째서 나만 이런 일들을 당해야 하는 거지?”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과 맞닿은 손바닥에서 새빨간 피가 주륵 흘렀다.
그러나 딜런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지 연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의 부조리에.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자체를 비관하며 욕하기를 한참.
문득 가슴 한쪽이 환하게 빛나며 신성한 빛이 그를 감쌌다.
“무슨….”
-복수를 원하는가…?
“!?”
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와 다르게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도리가 없는 그 목소리는 좁은 마차 안에서 맴돌아 멀면서도 아주 가깝게 들려왔다.
그 탓인지 딜런은 한참 동안이나 같은 자세로 얼어붙었다.
환청인가?
환청이라기엔 너무 선명하게 들렸는데?
게다가 이 빛은 뭐지?
딜런은 주위를 휙휙 돌아보다 말고 가슴께가 환하게 빛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안쪽을 더듬자, 이곳에 잡혀 오기 전.
블레니아 아스터에게 받은 정체불명의 청자기가 손에 잡혔다.
-널 그렇게 만든 놈들…. 그들을 증오하지 않나…?
흠칫. 청자기를 잡아 꺼내자마자 또다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속을 때렸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딜런의 마음을 제대로 투영해낸 말이었다.
증오한다.
복수하고 싶다.
날 이렇게 만든 계집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찢어발기고 싶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복수할 수 있지?
마른침을 꿀꺽 삼킨 딜런은 환한 빛을 내뿜는 청자기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네놈이 내 복수를 도와줄 수 있는 건가?”
청자기는 그의 말에 화답하듯 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뜨겁다 못해 뼈가 시릴 듯이 차갑게 느껴지는 빛.
두 눈이 멀 것 같은 광채에 두 눈을 질끈 감자 쇠를 긁는 듯 섬뜩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복수하고 싶다면 그걸 마셔라.
그것이 끝이었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딜런의 질문에 그리 답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따스한 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남은 건 뒤늦게 찾아온 두피의 따끔한 고통과 청자기의 차디찬 감촉뿐이었다.
“…이걸 마시면 된다고?”
지금 상황에 이르러서 그는 앞뒤 잴 여유가 없었다.
이것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복수할 수 있다는 말만을 곱씹던 딜런은 홀린 듯이 손을 더듬어, 꽉 맞물린 마개를 있는 힘껏 뽑아냈다.
“크윽.”
마개를 열자마자 기묘한 기운이 폭발하듯이 마차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딜런은 오히려 웃었다.
청자기를 열자마자 느껴지는 그 강렬한 기운은 정령사라면 절대 모를 리가 없는 힘이었던 탓이다.
꿀꺽꿀꺽.
“크흐….”
딜런은 강력한 힘이 응집되어있는 액체를 망설임 없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마셨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가 그를 괴롭게 했지만, 곧 온몸으로 퍼지는 충만한 힘에 매료된 그는 광인처럼 웃었다.
“자. 복수의 시간이다….”
천천히 감았던 눈이 번쩍 뜨이며 새빨간 안광이 빛난다.
어둠 속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있던 딜런이 마침내 주먹을 그러쥐고 천장을 향해 내질렀다.
* * *
“아이고오. 제발 진정 좀 하십시오!”
“자연사로 속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한편 마탑주들은 여전히 황제를 말리느라 고생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처음과 다르게 어느 정도 분기를 가라앉힌 뒤였다.
아무리 화가 난다지만, 대마법사 둘이서 저렇게 애원을 해대니 그의 분노도 조금은 시든 것이다.
라네즈가 옆에서 설치니 짜게 식은 감도 없지 않아 있고.
“하아. 알았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떨어져….”
움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한숨을 푹 내쉬던 황제의 얼굴이 새카만 마차 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리고 한 박자 느리게 무언가를 감지한 위블렌과 벤서 또한 긴장으로 몸을 굳히며 같은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스승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뒤로 물러나라.”
“네? 갑자기 무슨….”
콰지직—!
갑자기 들려오는 굉음에 아르닐은 순간 양탄자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새카만 파편을 흩뿌리며 시원하게 마차를 부수고 나온 하나의 인영.
마치 짐승처럼 크르륵. 소리를 내는 그것은 아르닐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딜런 아스터 그놈이 맞았다.
“저, 저게 뭐야? 저거 딜런 아스터 맞지?”
“마, 맞습니다! 몸이 좀 커지고 눈이 좀 시뻘겋긴 한데, 확실히 딜런 아스터가 맞습니다!”
모비 그란테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몰아치듯 외쳤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딜런 아스터가 맞다면 대체 무슨 수로 소드 마스터나 대마법사쯤은 되어야 탈출할 수 있다는 마차를 개박살 내고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봐. 저 마차 튼튼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죠!”
“근데 저놈이 무슨 수로 저 마차를 뚫고 나온 거지?”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날아오는 파편을 손등으로 쳐낸 황제가 눈썹을 까딱이며 위블렌을 노려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낸 위블렌은 서둘러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섰다.
“이보게! 대역 죄인을 불량품에 가둬 놓으면 어쩌나! 일 처리 똑바로 안 하나!?”
“히익! 죄송합니다아!”
어쩌다 보니 불량품을 사용하게 된 모비 그란테가 재빨리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제의 불편한 심기는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짐승처럼 괴이한 소리를 내는 딜런을 서늘하게 노려보고는 기품 있는 몸짓으로 발검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손 하나 까딱하지 말아라. 저놈은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겠다.”
“폐하!”
그의 직속 기사 단장 파르망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지만, 황제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에게 간섭하지 말 것을 명했다.
무려 소드 마스터인 그를 도우려고 해 봤자 방해만 될 것이기에.
결국, 파르망은 입술을 꾹 깨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어떻게 할 심산이세요!?”
“무얼.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줘야 하지 않겠나.”
황제는 씨익 웃으며 포효하고 있는 짐승에게로 검기를 날렸다.
그러자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더니 날카로운 손톱이 돋아난 딜런의 손가락 세 개가 깔끔하게 썰려 나갔다.
“크윽, 크아아악!”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도 보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던 딜런은 제 손가락을 자른 황제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강력한 각력으로 바닥을 박차고 훌쩍 뛰어올랐다.
“죽어! 죽어어!”
“흠.”
딜런 입장에선 회심의 일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저 코웃음을 치며 놈의 공격을 빗겨냈다.
눈먼 공격에 맞아줄 만큼 녹록하지도 않거니와 단조로운 공격 패턴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그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보아라.
동작을 크게 하고 아무렇게나 더러운 손톱을 휘둘러대니 가슴이 훤히 비지 않는가.
서걱—.
“커헉!”
가슴께를 크게 베인 딜런은 피를 토하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지금껏 힘에 취해 있어서 잘 몰랐지만, 크게 데이고 나니 명백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계속해서 공격해 봤자 지금 그의 힘으로도 저 원수의 아비에게 털끝 하나도 손댈 수 없다는 것을!
“복수….”
“음?”
“크으으. 놈을 죽일 힘을…!”
딜런 아스터가 짐승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머리카락이 한 움큼 뜯겨져 나갔으며 안 그래도 새빨갛게 물들어있던 눈은 실핏줄이 터지며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폭주인가? 완전히 자아를 잃었군.”
“크어어….”
뚜둑. 뚜욱—.
놈의 몸은 마치 벌크업한 것처럼 근육이 크게 부풀었다.
그 정도로 그쳤으면 그저 그러려니 했겠지만, 온몸에 징그럽게 돋아난 핏줄이 꿈틀거리는 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욱. 저게 뭐야?”
“모르긴 몰라도 아까보다 힘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보통 기합 같은 걸 내지르면 더 강해지나?”
아르닐이 비위가 상한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고, 라네즈가 흥분된다는 듯 입술을 핥아 올렸다.
물론 그의 생각대로 기합 좀 내질렀다고 더 강해질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눈앞의 것은 실제로 그 힘이 강해졌으니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흐음. 어디선가 느껴본 익숙한 기운이군.”
그 와중에도 황제는 침착하게 턱을 쓸며 가만히 눈을 빛냈다.
그가 알고 있는 정순한 기운과는 다르게 불순물이 가득하며 순수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불쾌한 기운이었으나, 저 힘의 뿌리는 확실히 그것과 같음이다.
“익숙하다뇨? 저런 더러운 기운이 무엇과 닮았다는 거죠?”
“글쎄. 적어도 네 스승은 그 답을 알고 있겠지. 그렇지 않나? 위블렌.”
“…….”
황제의 말에 아르닐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고개가 위블렌에게로 휙 돌아갔다.
안 그래도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위블렌은 사람들이 시선이 쏠리자 더욱 난감하게 변했다.
“그렇게 쳐다보셔도 정확한 답은 저도 모릅니다. 그저 아주 강력하고 악독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질 뿐. 지금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얼른 처리해야겠지.”
“크어어….”
찰나라고 생각되는 짧은 시간.
무표정하게 관찰하고 있던 황제의 눈과 거품과 함께 침을 주룩 흘리고 있던 딜런의 실핏줄 터진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리고 그 둘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발을 박차고 뛰어가 서로 맞부딪쳤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단 한 번의 공격이 오갔을 뿐인데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딜런의 최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허어. 활활 타오르는 화염 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이 따로 없구나.”
위블렌이 그리 평가했고. 아스터 왕국 측 사람들은 곧 이어지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큭, 케에에엑!”
딜런의 힘은 확실히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능숙하지 못한 제어 능력은 여전했고, 자아조차 이미 날아가 버린 금수가 맞이할 엔딩이라고 해 봤자 파국일 뿐이다.
후두둑.
사지가 날아가고 가슴께에 큰 구멍이 뚫린 딜런 아스터였던 것이 파르르 몸을 떤다.
더글라스 베네딕트는 그런 그의 모습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냈다.
“우, 우와아! 방금 뭔가 파바밧 하니까 푸슈슉! 몸이 절단됐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라네즈가 감탄했다.
그는 아버지의 뛰어난 검술에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달려왔고 사람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경탄했다.
하지만 적을 물리친 것치고 황제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라네즈를 향해 시퍼런 검을 내밀어 저지시키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아들을 향해 나지막하게 말했다.
“멈춰라.”
“아버지…?”
“뭔가 이상하군.”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라네즈가 의아함에 고개를 돌려보자, 지금쯤 죽음에 이르렀어야 할 딜런의 몸이 발작하듯 크게 들썩거렸다.
“으윽. 설마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아르닐이 질색했고 아스터 측 사람들은 허둥지둥거리며 더욱 거리를 벌렸다.
저 괴이한 현상을 대체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일반인의 머리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다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그때.
이미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딜런의 몸이 스르륵. 공중에 떠오르더니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다들 피햇!”
퍼엉—!
위블렌의 경악에 가득 찬 경고가 귀를 울림과 동시에 딜런의 몸이 사방으로 터지며 일대의 땅거죽이 뒤집어졌다.
“크윽.”
“폐하! 괜찮으십니까!?”
피비린내가 가득한 광풍이 불어 닥쳤다.
단련된 자들조차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여파에 겨우 몸을 추스른 사람들은 저마다 끙끙거리며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허억!”
“저, 저건…?”
머리 위를 가볍게 뒤덮는 거대한 그림자.
헛구역질이 절로 일게 만드는 썩은 물 냄새.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검은 선.
-쿠오오….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