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대치 상태는 금방 깨어졌다.
화가 잔뜩 난 수해의 정령은 엄청난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물방울 하나하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운디네에게 쏘아대기 시작했다.
-무아앙—!
하지만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운디네의 거대한 몸뚱어리는 끝이 뾰족한 작살이든 관통력이 높은 탄환이든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게 물로 되돌렸다.
물론 묘하게 열 받게 만드는 소리를 내며 오염된 몸을 정화시키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캬아아악!
공격을 하는 족족 모든 것들이 무위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수해의 정령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무의미한 공격을 해댔다.
녀석도 깨달은 것이다.
같은 물의 정령이어서 물 속성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누가 더 빨리 상대방을 ‘오염’시키느냐, ‘정화’시키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것을.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오염은 그냥 몸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나 정령의 본질을 오염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래 봬도 수해의 정령은 ‘악’의 길로 빠져들어 보통의 정령들과 달리 정신과 육체가 오염된 상태다.
그렇게 스스로가 재앙이 되어버린 정령은 다른 정령들을 타락시킬 수 있으며 그 기세만으로도 주변 환경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즉, 지난번 드워프 도시에서 샐러맨더가 변했던 것처럼 가만히 있는 정령들을 강제로 폭주 상태에 돌입하게 만들거나 수해의 정령처럼 아예 정령의 본질을 오염시켜 타락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자연계 정령이면 몰라도 우리 운디네를 폭주시키거나 오염시키려면 힘들 거야.’
계약으로 맺힌 정령을 정신적으로 건들거나 본질을 바꾸려면 계약자인 엘레인을 먼저 공략하는 게 정석이다.
정령이 함락당해도 계약자의 몸과 정신만 건강하다면 폭주하거나 본질이 바뀌기 전에 정령계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그 때문인지 녀석은 호시탐탐 엘레인을 노리며 가끔 이쪽으로 공격을 날렸으나, 대부분은 운디네의 너른 몸통에 가로막히고 겨우겨우 통과한 것조차도 황제와 마탑주. 그리고 황자들의 손에 의해 내쳐졌다.
“저 자식이 왜 자꾸 우리 꼬맹이를 노리는 거야?”
검은 구슬처럼 반들거리는 흉기를 쳐낸 라네즈가 두 눈을 부릅떴다.
안 그래도 놈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일 수 없어서 짜증 나 죽겠는데 노골적으로 엘레인만 공격하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까처럼 무식하게 검을 키워서 달려 나가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힘 조절을 잘한다고 해도 혹시나라는 게 있고, 무엇보다도 엘레인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자리를 떠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고마워. 라네즈 오빠.”
“흐흠! 이 정도야 기본이지!”
바로 옆에서 엘레인이 칭찬해주니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고 슬그머니 콧대가 솟았다.
대형 사고를 치면서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이 머리끝까지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집중 안 해? 이쪽으로 공격이 날아오잖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온몸을 가로지르는 충만함에 한껏 들떠 있는 라네즈를 현실로 끌어올리는 건 아르닐이었다.
그는 엘레인의 머리 위쪽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내며 자기 자신의 멋짐에 취해 있는 라네즈를 책망했다.
“헉. 미, 미안. 꼬맹아 안 다쳤어?”
“아르닐 오빠가 막아줘서 괜찮아. 경로상 어차피 스치는 거였고.”
라네즈는 언제 우쭐했냐는 듯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에게 괜찮다는 말을 다섯 번쯤 했을 무렵.
문득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공격이 우뚝 멈췄다.
“뭐야. 벌써 힘이 다 빠진 거야?”
“아니, 잠깐. 저 녀석 꼬리 말고 도망치는데?”
이럴 수가.
운디네와 인간들의 철통 방어에 기가 질린 것일까?
이대로 계속 공격을 해 봤자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해의 정령은 분하다는 얼굴로 물의 장막을 펼치고 그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운디네!”
-무오—옹!
엘레인의 외침에 응답한 운디네가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흡입력을 자랑하며 운디네가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키, 키에엑!
녀석은 운디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녀석에겐 불행하게도, 운디네는 엘레인과 함께 각종 디저트들을 섭렵하며 무언가를 먹고 흡입하는 행위를 오랫동안 단련해왔다.
콰드득— 콰지직—!
국경에 있던 나무, 숲이 뿌리째 뽑혀 나간다.
대지가 갈라지고 커다란 바위와 흙덩어리가 운디네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지만, 강력한 흡입력은 전혀 줄지 않았다.
“세,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그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닷없는 괴물의 등장으로 온갖 비명이 난무하던 레톤 영지민들의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레톤 영지에서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운디네는 웬만한 산처럼 거대했고 그러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장소는 수없이 많았다.
서쪽과 북쪽에 위치한 영지.
더 나아가 아스터 왕국의 수도에서조차 운디네와 수해의 정령이 격돌하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이니 아스터 왕국민들의 절반이 지금 모습을 전부 목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베네딕트 제국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대피소에서 운디네가 등장했을 때부터 환호하고 있던 플로스 영지 사람들은 운디네가 기어코 수해의 정령을 국수처럼 후루룩 삼켜버렸을 때 아예 축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정령여왕님께서 우리 영지를 지켜준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믿었죠! 우리 영주님께선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신걸요!”
엘레인이 들었으면 너무 과한 칭찬이라며 어쩔 줄 몰라 할 만한 내용들.
너무 일찍 기뻐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맹목적인 모습임에도 영지민들 중 그 누구도 헛물을 들이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해의 정령에겐 매우 안타깝게도.
영지민들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
“운디네! 이대로 뼛속까지 정화시키는 거야!”
-무오옹—!
수해의 정령을 삼킨 운디네의 몸에서 엄청난 광채가 피어올랐다.
얼마나 강렬한지 하늘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 건 아닐까 오해할 정도로 눈이 부셨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빛이 수그러들며 엘레인은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웅장한 풍채를 자랑하는 운디네 하나.
그 어디에도 괴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이겼다…!”
“드디어 놈이 사라졌어!”
“와아아아!”
기사들. 특히 후작가 기사들이 신이 나서 외쳤다.
얼마나 기쁜지 쓰고 있던 투구까지 벗어 던질 정도로 좋아하는 그들.
마침내 운디네의 몸에서도 임시로 받았던 힘이 쭉 빠져나가며 엘레인에게로 포로롱 날아왔다.
-무뭇, 무웃?
(주인, 나 잘했지?)
“응. 정말 잘했어!”
엘레인은 운디네를 마구 쓰다듬어주며 해사하게 웃었다.
솔직히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결국엔 성공적으로 녀석을 정화시켰으니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으. 몸에 힘이….”
모두가 환호하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때.
불현듯 엘레인이 몸을 비틀거렸다.
마나 탈진이 오기 직전까지 힘을 쓴 탓에 혹사당한 몸에서 힘이 쭉 빠진 것이다.
“엘레인! 괜찮은 건가?”
하지만 쓰러지기 전에 엘레인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챈 황제가 등 뒤를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놀란 얼굴로 엘레인의 어깨를 잡아 오는 황제.
그런 그에게 괜찮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
조금 떨어져 있던 황자들이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꼬맹아 어디 아파? 설마 다친 거야?”
“바보. 마나를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거잖아.”
“얼른 돌아가서 쉬어야겠군.”
차례대로 라네즈와 아르닐. 그리고 오르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몸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야.”
엘레인은 우울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부자를 보며 양손을 저었다.
날 걱정하는 사람이 이리 많으니 힘들어도 그러한 티를 제대로 못 내겠다.
엘레인이 활짝 웃으며 그리 말하자 부산을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부자도 조금은 진정했다.
“그나저나 완전히 난리가 났군요.”
“내 말이. 일대의 지형이 아주 싹 바뀌었어.”
그때 슬그머니 황실 가족이 있는 쪽으로 합류한 벤서와 위블렌이 주위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던 국경지대는 이제 완전한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수해의 정령이 난동을 부린 탓에 땅거죽이 확 뒤집혀서 평지였던 대지에도 높낮이가 생겼다.
대표적으로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작은 동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높게 치솟아 있었다.
덕분에 주변 환경이 더욱 잘 보였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운디네가 뱉어냈던 나무 파편이 쌓여 있는 장소부터 주춤주춤. 상황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내미는 플로스 영지민들과 레톤 영지민들까지.
‘그런데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착각인가?’
괴물을 처리했기 때문일까?
엘레인은 호기심을 안고 다가오는 레톤 영지민들의 눈에서 무언의 기운을 읽었다.
예를 들면 풍요신전의 주교 아르헤가 절로 떠오르는 눈빛이랄까…?
‘아니지.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갔다.’
아르헤의 광신도와 같은 눈빛을 떠올린 엘레인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것보다는 조금 더 순수한.
그러니까 최근에 플로스 영지의 새로운 영지민이 된 그들의 눈빛과 더욱 닮아 있었다.
한마디로 일종의 경외심이 담긴 그런 눈빛 말이다.
‘아무래도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어.’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에 피곤한 티를 내서라도 이곳을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은 엘레인은 가족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뒷정리는 나중에 하고 우리 이제 돌아가요.”
“그래. 지금은 네 건강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저것들의 처우는 나중에 결정하도록 하지.”
황제가 섬뜩하게 빛나는 눈으로 은근슬쩍 거리를 좁히던 모비 그란테와 로렌스 차일드 후작을 노려보았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들은 그들이 딜런 아스터를 싣고 오면서부터 생긴 일들.
문책을 절대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암담한 미래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그러한 것보다 모비 그란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아, 안 돼. 황녀님을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유능한 재상으로 몇십 년간 일해왔던 그는 직감했다.
지금 여기서 놓치면 엘레인을 우리 아스터 왕국의 국왕으로 만들 기회를 영영 잃게 된다는 것을.
세상에 왕이 없는 왕국은 없다.
블레니아 공주를 국왕으로 앉힌다는 건 처음부터 기각.
그렇다면 혹자는 ‘이왕 난장판이 된 판국에 그냥 법 같은 건 무시하고 유능한 사람을 왕으로 앉히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법을 개정하겠다고 이 사태가 터진 건데 과연 정령사가 아닌 사람을 왕위에 앉혀도 될까?
게다가 만약 일이 그렇게 흘러간다고 해 봤자 백이면 백.
남은 귀족끼리 서로 물고 뜯고, 치고받고 싸우며 난리가 나는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황녀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민하게 주위를 훑어보던 모비 그란테의 눈에 웅성거리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레톤 영지민들이 보인다.
문득 그는 슬쩍 웃고 말았다.
위기는 곧 기회라고 했던가.
머릿속으로 한 가지 방도를 떠올린 그는 흙으로 엉망이 됐지만, 여전히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찰랑거리는 가발!
“엘레인 전하께서 우릴 구하셨도다!”
“?”
가발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 모비 그란테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엘레인이 구한 건 맞지만 ‘전하’라니?
순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엘레인이 머리를 갸웃거리던 찰나.
타이밍 좋게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이 걷히며 찬란한 햇살이 모비 그란테의 맨들맨들한 머리를 비추었다.
“으윽.”
“눈 부셔….”
그것은 운디네의 몸에서 새어 나오던 빛과는 또 다른.
색다른 강렬함을 품고 있는 빛이었다.
이렇듯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모비 그란테는 기어코 외치고 말았다.
“저분이 우리들의 새로운 왕이시다! 엘레인 전하 만세!”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 앞에서 새로운 국왕 전하의 탄생을 알리는 것만큼 파급력이 좋은 방법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심지어 그 국왕 전하께서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신 영웅이시라면?
“아아. 우리들의 국왕이시여!”
“이것이 바로 국왕 전하의 후광!”
긴가민가한 얼굴로 이쪽을 살피고 있던 레톤 영지민들의 입이 쩍 벌어지며 도미노처럼 털썩. 털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모비 그란테의 머리에 반사된 빛이 엘레인의 후광이라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해까지 하면서 말이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엘레인은 벙쪘다.
모비 그란테의 개소리도 그렇고 레톤 영지민들의 반응도 어이없었지만, 여기서 더 기가 막히는 건 무릎을 꿇은 게 레톤 영지민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오. 정령여왕님!”
“우리들의 여왕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
분위기에 휩쓸린 플로스 영지민들이 무릎을 꿇고 엘레인을 숭배했다.
이쯤 되자 엘레인은 그냥 양손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한쪽에서는 국왕 전하! 라고 외치며 우러러보고 있고 반대쪽에서는 정령여왕님! 이라고 부르짖으며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다 모르겠고.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새빨개진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 엘레인은 지금 이 순간.
황궁에 있을 황태후가 격렬하게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