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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화 (300/417)

301화

“네놈…. 지금 뭐 하는 거지?”

쓸데없는 소리로 레톤 영지민들을 선동한 모비 그란테.

그런 그의 멱살을 잡아챈 황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차갑게 분노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다리가 절로 후들거릴 정도로 매우 살벌했다.

그러나 물러설 곳이 없는 모비 그란테는 자꾸만 풀리는 다리에 힘을 잔뜩 주며 두 눈을 부릅떴다.

“우리들의 왕이 되실 분은 엘레인 님밖에 없습니다!”

“내 딸에게 짐을 떠넘기지 마라.”

“엘레인 님께서 우리 왕국의 국왕이 되셔야 저희들이 삽니다!”

“엘레인은 우리 제국의 황녀다!”

어쨌든 엘레인은 우리 왕국의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모비 그란테와 엘레인은 우리 제국의 황녀라며 괘씸해 하는 황제.

그들의 대화는 결코 닿지 않을 평행선을 달렸다.

물론 여기서 가장 놀라운 건 무려 황제에게 멱살이 잡히고도 할 말은 다 하는 모비 그란테였다.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는 지금.

그는 현재 죽을 각오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걸일까?

새삼 아스터 왕국이 얼마나 내몰려 있는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깨달은 엘레인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그러니까 그딴 걸 왜 우리 꼬맹이한테 떠넘기냐고!”

황제의 살벌한 기세에도 굽히지 않자, 결국 참다못한 라네즈가 모비 그란테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덩달아 아르닐과 오르칼마저 양미간을 찌푸리며 눈빛으로 협박했지만, 모비 그란테는 입을 꾹 다물기만 할 뿐 제가 했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일드 후작에게 도와 달라고 눈치를 주니 황제 측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물며.

“지, 진정하시고 대화로 풉시다, 우리.”

“뭐? 대화?”

꼴에 친구라고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대화로 풀자고 말하는 로렌스 차일드 후작.

욕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기어코 얄팍한 라네즈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겨버렸다.

“이것들이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거…!”

“잠깐.”

“형님…?”

라네즈가 더 이상 화를 참지 않고 달려들려던 그때.

오르칼이 앞으로 나서서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뭐야. 왜 말리는 거야. 설마 형님도 저놈들 말에 동의하는 거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라네즈를 내려다보는 오르칼의 얼굴이 대번에 싸늘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그의 눈빛에 움찔한 라네즈는 파르르 몸을 떨며 외쳤다.

“그, 그럼 대체 왜 말리는 건데!”

“네 눈엔 우리 엘레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가?”

“?”

라네즈는 의아함에 가득 찬 얼굴로 엘레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툭 떨구고 있는 여동생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꼬, 꼬맹아? 혹시 몸이 안 좋아?”

“응? 아, 조금 피곤하기는 한데….”

“안 되겠군. 일단 황궁으로 돌아간다.”

엘레인이 괜찮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

황제가 재빨리 아이를 안아 들었다.

얼떨결에 황제의 품에 공주님 자세로 안긴 엘레인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모비 그란테 공작과 로렌스 차일드 후작을 노려보더니 차갑게 경고했다.

“오늘 일에 대한 책임은 다음에 묻도록 하지. 감히 우리 딸을 위험에 빠트린 것과 빼앗아가려 한 죄는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조만간 황궁에 방문하겠습니다!”

“황녀님! 부디 저희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만큼은 황제의 기세가 워낙 살벌해서일까.

그들은 굳이 국왕 전하 또는 엘레인 님이라고 부르던 것을 그만두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놈들이네.”

“참 나. 쟤들처럼 눈치 없는 놈들은 처음 봐.”

황제가 몸을 돌려 이동하자 아르닐과 라네즈가 짜증스레 말을 덧붙이며 뒤를 따랐다.

반면 황제의 품에 안긴 엘레인은.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고….’

멀어지는 후작과 공작. 그리고 기이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불안한 듯 눈을 굴리는 레톤 영지민들을 보며 깊은 수심에 잠기었다.

* * *

엘레인을 비롯한 황제와 황자들이 황궁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품 안에 안긴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엘레인이 뒤늦게 오늘 일을 수습해야 한다고 외쳤으나….

황제가 엄근진한 얼굴로 지금 너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 탓에 조용히 귀갓길에 올랐더랬다.

그렇게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황궁으로 돌아온 지금.

엘레인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황태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할머니!”

“아이구, 우리 아가!”

황제가 엘레인을 내려주자, 잰걸음으로 다가온 황태후가 두 팔을 크게 벌려 와락 안아왔다.

“아가야.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보다시피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요. 그런데… 소식이 여기까지 온 거예요?”

플로스 영지와 제국까지의 거리는 멀다.

운디네와 수해의 정령이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이 제대로 보일 턱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황태후의 반응을 보면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황태후는 의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엘레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옅게 웃었다.

“정보대신이 황급히 달려와서 내게 알려주더구나. 플로스 영지에 괴물이 출현했다고 말이야.”

아. 그렇구나.

제국 전체에 정보부 사람들을 풀어놓은 정보대신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아마 국경지대 상공에 괴물이 출현한 것을 보고 급히 전서구를 날려 보냈겠지.

엘레인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황태후가 걱정스런 얼굴로 아이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창백하구나. 많이 놀랐을 텐데 어서 방으로 가자꾸나.”

“네, 할머니.”

엘레인은 순순히 황태후의 손을 잡았다.

더 이상 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않았고 실제로도 꽤 피곤했기 때문이다.

‘일단 푹 쉬자.’

큰일을 치르고 와서 그런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었다.

엘레인은 일단 복잡한 생각을 밀어둔 채 황태후와 함께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제는.

“대신들을 소집해라.”

“알겠습니다.”

선뜩하게 두 눈을 빛내며 조용히 명령했다.

* * *

“하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엘레인과 제대로 말도 섞어보지 못하고 공작가로 복귀한 모비 그란테.

수작질을 벌이려고 했다가 괜히 새카만 미래만 맛보고 온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아직도 눈앞에 선연했다.

마지막에 황제와 헤어지기 전.

그가 보내었던 무시무시한 그 눈빛을.

“분명 쉽게 넘어가지 않겠지. 어떻게든 타개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

모비 그란테는 그 와중에도 주섬주섬 주워왔던 가발을 꽉 그러쥐며 울상을 지었다.

이미 황제와의 관계는 끝이 난 것 같았다.

그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고 황제의 손에 족쳐질 일만 남은 셈이다.

모비 그란테가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자꾸만 암울한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던 것일까?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들 녀석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이고. 그러다가 땅 꺼지겠습니다. 간만에 아들이 찾아왔는데 한숨만 푹푹 내쉬고. 그게 아버지로서 할 일이랍니까?”

“이 녀석이. 너는 이 애비가 불쌍하지도 않아?”

“같이 휘말리는 걸 걱정하시는 거라면 전 괜찮습니다. 저는 아스터 왕국 사람이 아니라 베네딕트 제국민이거든요.”

로돌프는 치사하게 엘레인이 만들어줬던 플로스 영지민 등록증을 보여주며 씨익 웃었다.

허이고. 아들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위험이 닥치자 헌신짝처럼 버리는 아들 녀석의 행동에 모비 그란테의 한숨은 더욱 늘어났다.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아들 좋다는 게 뭐냐. 조금이라도 괜찮은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공유 좀 해줘라.”

“흐음. 글쎄요.”

“제발 이 불쌍한 얼굴을 좀 봐서라도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안다. 그 잘못이 너무 커서 저쪽에서 우리 왕국을 확 밀어버린대도 할 말이 없어.”

“잘못을 알고 계신다니 다행입니다만….”

로돌프는 잠시 턱을 매만지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황녀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결과적으로 아스터 왕국에 깊이 매이도록 만든다.

솔직히 아버지가 생각해낸 방법은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황녀님께서 딜런에게 대한 복수를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면 서로 윈윈인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황녀님께서 그걸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사고가 터졌다.

딜런 아스터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괴물이 되어버리며 시체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뻥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모비 그란테가 일부러 황녀님을 위험에 빠트리게 만들기 위해서 딜런 아스터를 데려간 건 절대 아니다.

그런 일을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애초에 죄인이 그런 괴물이 되어서 마법으로 도배된 마차를 뚫고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대체 어느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원망을 하려거든 하늘을 원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을 황제가 이해해줄 리는 만무.

황제는 오로지 결과만을 보는 냉혈한이다.

실제로 네놈의 목은 조만간 쓱싹(?) 이라는 뉘앙스의 말까지 들었다고 하니 말 다한 셈.

하지만 이런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상황에서도 사태를 해결할 방법 하나쯤은 존재했으니.

“후. 어쩔 수 없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저 또한 꿈자리가 뒤숭숭해지니.”

“아, 아니. 너 왜 이렇게 냉담해진 거냐? 존경한다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아직도 하시는 건지 원. 그리고 저 이제 존경하는 사람이 바뀌었습니다만?”

쿠궁—!

모비 그란테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진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충격을 먹은 듯 입을 떡 벌리고 있는 그의 모습에, 로돌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이 책 읽어보신 적 있으세요?”

“응? 그건 또 뭔 책이냐?”

모비 그란테는 아들 녀석이 품에서 꺼낸 책을 보며 물음표를 띄웠다.

책의 제목은 <그 황녀님의 사랑스러운 어린 시절>.

왜인지 모르게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일기장 내용이 튀어나올 것 같은 책 제목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흠흠. 헛기침을 한 로돌프가 책을 정중하게 가리키며 말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황녀님께서 아주 어렸을 적. 볼모 시절에 황궁 식구들과 어떻게 돈독한 사이를 가지게 되었느냐에 대한 의문을 통해 만들어진 책으로, 과연 내가 황녀님이었다면 그들을 어떻게 공략하였을까? 에 관한 내용을 픽션으로 저작한 책입니다.”

“…그, 그렇군. 쉽게 말해 그 책의 내용은 모두 픽션이고 황녀님께서 볼모 시절 황가 사람들을 어떻게 공략했는지. 그런 게 적혀있다 이거지?”

로돌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책을 소개하는 김에 책 내용을 하루 종일 떠들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쉬운 대로 입맛을 다신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을 전했다.

“제가 이걸 읽으면서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죠. 보통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 싶을 때는 바로 가족부터 공략한다는 겁니다.”

“!”

그러고 보니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하긴 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딸 바보인 황제를 공략할 것을.

그에게 딜런 아스터의 처분을 맡겨서 황녀님의 환심을 사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등.

후회만 잔뜩 했었더랬지.

그런데 그건 이미 지나간 일 아니었던가?

지금에 와서 과연 그의 마음을 돌릴 만한 방법이 존재한단 말인가?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 그런데 이미 화가 날 대로 잔뜩 난 황제 폐하를 대체 어떻게 공략한단 말이냐?”

“그건 아버지가 생각하셔야죠. 혹시 그분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는지 정확히 아십니까?”

“흐음. 그러고 보니 황녀님을 위험에 빠트린 것과 빼앗아가려 한 죄를 묻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아버지의 말에 로돌프는 턱을 매만졌다.

딸아이가 다칠 뻔한 건 아버지로서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일이긴 하지만, 두 번째는 어감이 달랐다.

뭐랄까.

벌써부터 딸아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서글픈 마음이 잔뜩 묻어난다고나 할까?

“그런 거였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수도를 플로스 영지로 옮긴다고 하면 될 겁니다.”

“뭐? 고작 그걸로 해결되는 것이냐?”

“당연히 그거로는 부족하죠. 최소한 황제의 체면은 살려줘야 할 거 아닙니까. 당신은 아버지가 돼서 그런 것도 몰라요?”

“아니, 그…. 미, 미안하다.”

아들 녀석의 질타에 모비 그란테는 괜히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덕분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비 그란테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아들의 손을 꼭 잡으며 외쳤다.

“녀석. 고맙다!”

“고마워하실 필욘 없습니다. 아스터 왕국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베네딕트 제국민으로서. 플로스 영지민으로서 우리 황녀님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를 찾는 것뿐이니까요. 제가 아버지 편이라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그래그래. 내 아들이 최고다. 아주 고마워!”

로돌프가 혀를 차며 손을 떨쳐냈지만, 모비 그란테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실수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는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며 하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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