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4화 (303/417)

304화

“그게 무슨….”

할 말을 잃은 엘레인은 멍하니 황제를 쳐다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빤히 쳐다본 것이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한 황제가 의문을 표했다.

“왜 그러지? 혹시 마음에 안 드나?”

“아뇨. 그건 아닌데….”

엘레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애당초 이건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러나 연륜은 속일 수 없다고 엘레인의 얼굴에서 난감함을 읽어낸 황태후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는 아이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덮으며 말하기를.

“아가야. 나는 아스터 왕위야말로 네가 그들에게 받아낼 최고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단다. 힘든 일들은 다른 귀족들에게 모두 맡기고 너는 아스터 국왕으로서 지닌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도록 하려무나.”

“할머니….”

“그래. 이건 네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다. 원래부터 너의 것이었으니 마음 가는 대로 굴려도 상관없다.”

황태후에 이어 황제까지 진중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고요하면서도 따스한 시선.

걱정과 나를 향한 사랑이 듬뿍 담긴 눈동자를 마주한 엘레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들이 얼마나 저를 위하는지 알고 있다.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낼 수 있던 것도 저 두 분의 엄청난 노력 덕분일지도 모르지.

그러한 상황에서 과연 그들의 호의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적어도 엘레인은 그런 매정한 사람에 속하지 않았다.

“할머니, 아빠. 고마워요. 선물 잘 받을게요.”

결국, 엘레인은 그들이 성심껏 준비한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글을 읽기 위해 잠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던 왕관을 다시금 품에 안으며.

말간 웃음을 내보이자 황제와 황태후의 얼굴에도 빛이 서렸다.

“잘 생각했다, 아가야!”

“하다가 조금이라도 힘이 들면 바로 때려치워도 된다.”

“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황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불가능하고 가능하고를 떠나서 이 정도 편의를 봐준다는데 힘들다면서 때려치우면 그것대로 문제 아닐까.

엘레인은 동네 산책 여부를 결정하듯 쉽게 말하는 황제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참.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게 있단다.”

“엥? 뭐가 더 있어요?”

엘레인이 놀라 묻자 황태후가 후후 웃으며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아스터 왕국은 정령사 왕뿐만이 아니라 왕이 데리고 있는 정령에게도 편의를 제공해준다더구나.”

“그 말은 우리 운디네에게도 무언가 해준다는 건가요?”

-무우?

엘레인의 머리 위에서 하품을 쩍 하고 있던 운디네가 콩눈을 깜빡였다.

황태후는 아닌 척하면서도 기대만발인 운디네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어디 보자…. 우선 우리 아가의 귀여운 운디네에게도 따로 간식을 제공해준다더구나.”

“운디네 몫을 따로요? 와! 운디네 잘됐다, 그치?”

-무우!

(그 정도는 기본으로 줘야지!)

운디네는 길쭉한 손을 만들어 팔짱을 끼고는 흥! 코웃음을 쳤다.

원래 플로스 영주성에서도 운디네의 간식은 따로 제공되었다.

그러니 그 정도는 성에 차지도 않는다 이 말씀!

“후후. 그리고 플로스 영지 한쪽에 운디네가 놀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준다더구나. 이름은 워터 파크…? 라는데 물의 정령이 뛰어놀기에 아주 좋은 환경을 제공해줄 모양이야.”

-무, 무우!?

(뭐지? 이름만 들어도 엄청 설레는 이 기분은!?)

간식 제공이라는 말에서 시큰둥하게 반응하던 운디네가 팔짱을 풀고 귀여운 콩눈을 반짝거렸다.

황태후는 그런 운디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 아가를 위한 휴양지도 따로 만들 예정이라는구나.”

“네에? 절 위한 휴양지를 따로 만들어준다고요?”

워터 파크가 뭐지?

회귀 전에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에 의아해하던 엘레인은 곧이어 들려오는 황태후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래. 아스터 왕국의 남부 지방에 휴양지를 따로 건설한 다음, 그곳에다가 500명의 파티시에를 집어넣는다는구나. 남부 지방에서 나는 과일들로 만든 독특한 디저트를 무한 제공해준다고 하니 디저트를 좋아하는 우리 아가에게 딱 좋겠구나.”

“오, 오백…. 그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엘레인이 경악해서 외쳤다.

그러나 황태후와 황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이렇게 또 한 번 로열패밀리의 클래스에 당황해하고 있을 무렵.

여전히 얼이 빠진 사람이 한 명 존재했으니.

“말도 안 돼. 우리 꼬맹이, 왕 하기 싫었던 거 아니었어…?”

“나 참. 그때는 플로스 영지로 수도를 옮긴다는 말도 없었고 이런 유리한 조건도 안 달렸었잖아.”

“이씨. 너도 배신하기냐?”

“배신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거지. 솔직히 아스터 왕국 놈들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지금은 엘레인을 위협할 수 있는 놈들이 싸그리 사라진 상태잖아?”

아르닐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요주의 인물인 바론 아스터나 딜런 아스터가 죽어버렸으니 사실상 엘레인을 적대하고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미친놈들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해야 할 일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권력까지 생기는데, 이런 꿀보직을 누가 마다하겠나?

물론 황녀인 엘레인이 베네딕트 제국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적지 않다.

하지만 베네딕트 제국에는 없고 아스터 왕국에만 있는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긴 걔들은 대부분 정령신앙에 진심이랬으니까 우리 꼬맹이한테 잘해주기는 하겠다.”

라네즈는 뒤늦게 큰 깨달음을 얻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괴물을 해치우고 난 뒤 나타난 레톤 영지민이나 새로 들어온 플로스 영지민들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정령신앙에 진심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뛰어난 정령사이자 제 목숨을 구해준 엘레인은 영웅 그 이상의 존재일 터.

맹목적으로 우러러보던 수십의 시선을 떠올린 라네즈는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며 말했다.

“근데 게네들 나중에 광신도로 발전하거나 뭐 그러지는 않겠지?”

“어. 그러게….”

아르닐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마주한 사람처럼 감탄사를 터트리고는 황태후와 대화 중인 엘레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하기를.

“뭐, 우리 엘레인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실화냐…?”

왕국민들이 통째로 엘레인의 이름을 광적으로 부르짖는 것을 상상하고 만 라네즈는 절로 기가 질렸다.

아르닐의 말대로 실제로 일어날 것 같은 일이어서 더 무서웠다.

* * *

엘레인이 왕위를 계승받는다고 결정하자마자, 대관식 일정이 바로 잡히는 등.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최고로 멋지고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하여 아스터 왕국 사람들과 베네딕트 제국 사람들이 힘을 합하니 준비에 필요한 시간 또한 빠르게 단축된 것이다.

참고로 대관식은 황궁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아스터 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어차피 플로스 영지로 수도를 옮길 것이기 때문에 황제가 그리하겠노라 정했다.

대신 아스터 왕국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수용할 수 있게끔 수도의 광장을 비워둘 예정이며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고려하여 대관식은 한 달 뒤에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위에 관한 내용은 빠르게 퍼져서 대륙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들었어? 베네딕트 제국 황녀가 아스터 왕국의 국왕이 된다던데?”

“뭐? 베네딕트 제국이 결국 아스터 왕국을 완전히 꿀꺽해버린 거야?”

“아니아니. 듣자하니 아스터 왕국 귀족들이 무릎 꿇고 제발 왕이 되어 달라고 빌었다더라. 왜, 거기 황녀님이 엄청난 정령사잖냐. 게다가 아스터 왕가의 피까지 흐르고 있으니 계승에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거지.”

“이야. 베네딕트 제국은 완전히 땡잡은 거네? 이렇게 되면 사실상 우리 대륙의 중앙은 베네딕트 제국이 완전히 먹어버린 거랑 다름없잖아.”

“확실히 그러네. 동쪽 끝에 있는 자연의 땅까지 개간해버리면 국토가 어마어마해지겠어.”

“아스터 왕국 동쪽에 있는 그 숲? 하긴 지금껏 돈이나 인력이 부족해서 손도 못 댔는데 베네딕트 제국이 끼어들면 말이 달라지지.”

숲이 너무 광활하여 한번 잘못 발을 들여놓으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도는 구역이지만, 싸그리 밀어버리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남자들은 확 넓어지는 베네딕트 제국의 국토를 머릿속에 그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서쪽부터 시작해서 드워프 도시와 그란디스 왕국-베네딕트 제국- 동남쪽 아래에 아스터 왕국과 자연의 땅이 있다.

베네딕트 제국의 동쪽과 북쪽은 사실상 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니 서대륙의 중심부를 모두 먹었다고 볼 수 있을 터.

“이야. 이렇게 되면 신성제국에서 엄청 견제하겠는데?”

“안 그래도 거기 성황이 사절단을 보냈다고 하더라고.”

“거, 분위기 한번 살벌해지겠네. 그래서 대관식까지 얼마나 남았는데?”

“흐음. 한 4일 정도 남았나? 왜. 설마 가보려고?”

“제일 재밌는 게 강 건너 불구경 아니겠어. 우리 멀찍이서 구경하자.”

“나, 나도 가는 거야?”

“당연하지! 간 김에 그렇게 대단하다는 황녀님 얼굴도 한번 보자고!”

남자는 제 친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낄낄 웃었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 역시 신문을 보며 황녀님의 대관식에 흥미를 가졌다.

그렇게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대륙 전체가 시끌시끌해지고 있을 때.

정작 그 소문의 주인공은 턱을 괸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제작을 끝낸 드레스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대관식 날 황녀님의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할까 대화를 나누던 앨리스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엘레인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황녀님. 많이 피곤하세요?”

“…으응. 좀 힘드네.”

“그럼 오늘 저녁에 제가 마사지를 해드릴게요!”

“…으응. 고마워.”

“네? 정말요?”

장난스레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베일리가 흠칫 놀랐다.

앨리스와 베일리는 어딘가 멍해 보이는 엘레인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덕분에 기나긴 침묵이 이어지자, 뒤늦게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엘레인은 아차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있잖아. 피곤해서 그러는데, 두 사람 차 좀 가져와 줄래?”

“앗, 네! 피로에 좋은 걸로 가져올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욥!”

엘레인의 요청에 앨리스와 베일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혼자가 된 엘레인은 그제야 축 늘어진 오징어처럼 꿈틀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엘레인은 한 가지 고민으로 죽을 맛이었다.

황제와 황태후가 주는 선물이니까 일단 고맙게 받기는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과연 내가 왕을 해도 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이 힘든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지. 왕관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

엘레인은 테이블 위에 곱게 올라가 있는 왕관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저 왕관을 주며 황제와 황태후는 마음껏 아랫것들을 굴리라고 했지만, 엘레인의 성격상 그럴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아스터 왕국은 엘레인을 국왕으로 맞이하기 위해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수도까지 플로스 영지로 이전하겠다고까지 했다.

덕분에 할 일은 대폭 줄었으나 마음의 부담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나. 회귀 전만 해도 용병이었다고.”

엘레인은 푸념하듯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내가 이걸 받아도 될까.

내가 왕이 된 이후로 나라가 잘못 돌아가면 어떡하지.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는 만큼 나도 좋은 왕이 되어야 하는데 과연 잘할 수 있을까 등등.

각종 걱정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이런 부담감이 싫어서 공작과 후작의 첫 번째 제안을 거절했던 만큼.

엘레인의 마음 한구석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그렇게 얼마나 궁상을 떨고 있었을까….

똑똑!

불현듯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지하 저 끝까지 파고 들어가던 엘레인의 상념이 깨어져 나갔다.

“황녀님. 저 로돌프입니다!”

“로돌프?”

놀란 얼굴로 베갯잇에서 얼굴을 떼어낸 엘레인은 재빨리 구겨진 옷을 펴며 말했다.

“들어와요.”

엘레인이 들어오라 말하자 로돌프가 활짝 웃는 낯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오늘도 고생했을 엘레인에게 다가가서 디저트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다.

“리안 씨 가게에서 가장 잘 나가는 디저트입니다. 드시고 힘내세요!”

“아. 고마워요.”

엘레인은 그의 선물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원래라면 바로 풀어서 디저트 하나를 맛있게 먹어 치웠을 테지만, 오늘은 영 입맛이 없어서 옆으로 밀어두었다.

“그러고 보니 로돌프 씨가 할머니를 설득하셨다고 했죠?”

“네. 맞아요.”

“어째서요? 저는 왕이 되기에 자질이 부족한데.”

엘레인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는 나에게서 무얼 본 걸까?

어째서 굳이 황태후를 설득하면서까지 나를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지?

“무슨 말씀을! 황녀님 덕분에 아스터 왕국에서 넘어온 난민들이 이렇게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황녀님은 우리 왕국의 국왕님이 될 자격이 충분해요. 장담하건대 황녀님은 최고의 국왕이 되실 겁니다!”

몰아치듯이 정열적으로 외치는 말에 엘레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런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더 부담을 느끼는 건데 아무래도 로돌프는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듯했다.

“아무튼, 그런 걱정하지 마시고. 대관식까지 파이팅입니다!”

“아, 네….”

로돌프는 연신 파이팅을 외치며 밖으로 나갔다.

불안감을 떨쳐내려다가 오히려 더욱 부채질 당한 엘레인은 아까보다 더욱 무거워진 마음을 느끼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진짜 어떡하면 좋냐.”

-무우….

운디네가 힘내라는 듯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그 손길이 부드러워서 아까보다 기분은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머리끝까지 차오른 부담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차는 아직이려나.”

따뜻한 차를 마시면 조금은 나아질까.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푹 내쉬고 있던 그때.

“저… 황녀님.”

“응? 무슨 일이야?”

닫힌 문 너머에서 카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감함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엘레인이 되묻자, 카론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신성제국의 황태자께서 방문하셨습니다.”

“…!?”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턱을 괴고 있던 엘레인의 손이 삐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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