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4화 (313/417)

314화

엘프들이 우리 황궁으로 오고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레인은 깜짝 놀랐지만, 그와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엘프라….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슬슬 나타날 때가 됐긴 하지.’

회귀 전에도 엘프들은 엘레인이 스무 살이 됐을 때쯤.

정확히는 3재앙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졌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엘프들은 고대의 정령들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잠깐만. 그러고 보니 3재앙 말고도 해악의 정령이라고 처음 보는 녀석도 있었잖아?’

그럼 재앙급 고대의 정령 이외에도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정령들이 더러 존재하는 걸까?

엘프들은 그것을 해치우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 거고?

…음. 하긴, 회귀 전에는 세상이 아주 미쳐 돌아갔으니까 3재앙이 날뛸 때 다른 고대의 정령들이 추가로 뭔 짓거리를 해도 별로 티도 나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지금은 엘프들도 나타났으니, 만약 그런 놈들이 활개 친다면 엘프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주겠지.

그러니 엘레인은 베네딕트 제국과 아스터 왕국만 잘 수호해 나가면 된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엘레인은 ‘어때? 정말 엄청난 소식이지?’라고 말하며 씨익 웃는 아르닐을 바라보았다.

“근데 오빠. 엘프들이 왜 우리 황궁으로 오는 거래?”

“글쎄.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르겠어. 위블렌 스승님이랑 공중 훈련하고 있는 도중에 인근 숲을 지나고 있는 걸 발견한 거거든. 스승님이 호들갑을 떨면서 얼른 황궁에 알리러 가자고 하셔서 엘프들 얼굴은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했어.”

아무래도 환상의 이종족이다 보니, 웬만한 것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아르닐조차 조금 아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근데 마탑주님은 왜 같이 오지 않은 거냐? 설마 아버지한테 바로 알리러 간 거야?”

“뭐, 그렇지.”

“아, 그러면 시간이 부족하잖아!”

아르닐이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네즈가 펄쩍 뛰었다.

라네즈는 최근에 이름 좀 날리는 용병과 치고받고 싸우다가 외벽 한쪽을 깔끔하게 날려 먹고 그 벌로 한 달 동안 대련 금지령을 받았다.

언제 다시 마주칠지 모르는 엘프들. ‘우연히’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시비가 걸려서 싸웠다는 핑계를 써먹으려면 엘프들이 황궁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보다 먼저 그들과 조우해야 했다.

“안 되겠어. 내 쪽에서 먼저 만나러 간다!”

“나도 따라갈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니까 말이야.”

라네즈가 투지를 불태우자 아르닐이 처음부터 그걸 바랐다는 듯이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안 그래도 엘프라는 종족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또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라네즈 형이 아버지에게 대차게 깨지는 걸 구경하기 전에 겸사겸사 엘프와 싸우는 모습을 먼저 관람할 생각이었다.

“그러는 두 사람은? 나랑 같이 구경하러 갈 거지?”

“별로. 굳이 난장판에 끼어들고 싶지 않군.”

“나도 피곤해서 좀 쉬려고.”

오르칼과 엘레인이 차례대로 말하자 아르닐의 얼굴에 짙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끼리라도 가 볼…… 뭐야. 이 인간 또 어디로 갔어?”

“라네즈 오빠라면 조금 전에 창문 넘어서 뛰어내리던데?”

“뭐!? 아까 나한테는 창문으로 넘나들지 말라고 했으면서!”

아르닐은 내로남불의 정석인 라네즈를 욕하며 서둘러 창틀을 밟고 몸을 구겨 넣었다.

참으로 희한하지.

몸집은 라네즈가 더 큰데.

이상하게 쉽게 넘나드는 그와 달리 아르닐은 낑낑거리면서 나가는 데만 한세월이다.

엘레인은 거추장스러운 로브랑 씨름을 하고 있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냥 문으로 다니지….’

이상한 고집 때문에 괜히 생고생하고 있는 아르닐이었다.

***

“황녀님!”

“일은 잘 끝내고 오셨어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세 여인이 엘레인을 맞이해주었다.

엘레인은 그런 그녀들에게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말했다.

“그럼. 잘 끝내고 왔지.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물론이죠. 언제나와 같이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이에요.”

“별일은 없었지만, 황녀님이 없으니까 마음이 휑한 거 있죠.”

차분하게 말하는 앨리스의 옆으로 불쑥 끼어든 베일리가 울상을 지었다.

그에 피식 웃은 엘레인은 손을 뻗어 베일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앞으로는 쉬는 날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그렇게 울상 짓지 마.”

“헉. 정말요?”

“당연하지. 이제 어지간히 커다란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주 2일 두 시간 근무제를 지킬 수 있어.”

“세상에나. 드디어 황녀님께서 쉬엄쉬엄 일을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네요.”

“감축드립니다.”

엘레인의 깜짝 선언에 베일리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앨리스가 감격스러운 얼굴로 입을 가렸으며, 캐시가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축하해주었다.

이렇듯 각기 다른 세 여인의 반응에 엘레인은 쑥스럽다는 듯이 헤죽 웃었다.

그리고는 털썩. 테이블 앞에 앉으며 앨리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앨리스 언니. 내가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네네. 뭐든지 물어보세요.”

앨리스의 적극적인 자세에 엘레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어떻게 해야 좋은 연애를 할 수 있는 거냐고 그 비결을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때문에 엘레인은 카르넬의 이중신분과 습격에 관련된 것들은 쏙 빼놓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 부족함이 없도록 필요한 내용만 끌어모은 뒤 한껏 축약해서 말했다.

“신성제국 황태자한테 선물을 좀 주고 싶은데 어떤 걸 주는 게 좋을까?”

“헉! 황녀님 그란디스 왕국에서 황태자님이랑 그렇고 그런 시간을 보내신 건가요!?”

“엥?”

아, 이런. 너무 많이 생략했나?

베일리의 엉뚱한 상상력에 흠칫한 엘레인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외쳤다.

“뭔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절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내가 실수를 좀 해서 사과의 선물을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어머나. 그런 식의 스토리 텔링인 거군요?”

“아니. 앨리스 언니까지….”

어째서인지 제 말을 믿지 않고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앨리스.

마치 ‘저는 다 알고 있답니다. 후훗.’이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엘레인은 제 이마를 탁 쳤다.

‘두 사람 머릿속에 카르넬이랑 나는 대체 무슨 사이인 거야?’

아, 물론 연인 사이로 오해하고 있는 듯한 그들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엘레인이 만나는 외간 남자는 카르넬 이외에 전무하다시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건 황자들이 워낙 엘레인 주변에서 철벽을 쳐대서 다른 남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나마 카르넬과는 일로 만나는 관계이니까 따라오지 못할 뿐이지.

아마 사적으로 만나는 거였으면 진즉 둘 사이를 갈라놓고도 남았을 거다.

‘뭐야.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나 엄청 불쌍하잖아?’

하루라도 빨리 황자들을 떨궈낼 방법을 찾아내야지 원.

이래가지고는 정상적인 연애는커녕 외간 남자랑 손도 못 잡아보고 죽겠다.

엘레인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황태자니까. 사과의 선물로 값비싸고 몸에 좋은 걸 주는 게 나을까?”

“그것도 좋지만, 마음이 듬뿍 담긴 선물을 전하는 게 더 좋을 거예요.”

“마음이 담긴 선물?”

“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과 함께 손편지를 동봉하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상대방은 무척 좋아해 줄 거예요.”

“오오…. 그거 혹시 앨리스 언니 경험담이야?”

“후훗. 그럼요. 제가 선물을 받은 쪽이었지만 말이에요.”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콧대를 높였다.

엘레인은 앨리스가 실제로 겪었던 경험담을 깊게 새겨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 결정했어. 카르넬한테 편지랑 같이 사과랑 애호박을 잔뜩 보낼래.”

“사과랑… 애호박이요?”

“응. 카르넬이 사과차를 엄청 좋아하거든. 애호박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좋아할 거야.”

어릴 적 베네딕트 제국의 가을 품평회에서 굳이 애호박을 선택하여 제출했으니, 높은 확률로 애호박을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레인은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그럼 얼른 준비를….”

쿠콰앙—!

“꺄앗!”

엘레인이 막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

불현듯 엄청난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

덕분에 화들짝 놀란 베일리는 깜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앨리스의 몸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베, 베일리. 나 숨 막혀.”

“헉. 미안. 근데 방금 그거 뭐야? 어디 전쟁이라도 터졌대?”

“진정해. 전쟁이 났으면 이미 옛적에 황궁이 시끌시끌해졌겠지.”

베일리가 겁을 먹은 얼굴로 호들갑을 떨자 앨리스가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친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래도 벌써 엘프들이랑 충돌한 모양이네.”

“네? 엘프라뇨?”

엘레인의 말에 베일리와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움찔거린 캐시 또한 엘레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세 여인의 뜨거운 시선에 괜스레 뺨을 긁적인 엘레인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아까 아르닐 오빠랑 마주쳤는데 마탑주님이랑 수련하던 도중에 엘프들을 발견했다더라고. 근데 하필이면 라네즈 오빠가 승부욕에 또 불타서 말이야. 대련하겠답시고 달려 나간 게 조금 전 일이야.”

“그럼 방금 그 엄청난 소리가 대련하면서 나온 소리라는 거예요?”

“아마 그럴걸? 라네즈 오빠 엄청 세잖아. 벽 하나만 넘으면 소드 마스터에 입문하는 사람인데 저 정도는 기본이지.”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근데 그렇게 세면 엘프들이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일걸. 엘프들이 쏘는 활이 얼마나 무서운데. 게다가 라네즈 오빠는 혼자고 엘프는 여러 명이잖아.”

“와아. 그렇구나.”

엘레인의 친절한 설명에 베일리는 감탄하며 쉬이 납득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황녀님. 엘프들이 쓰는 활이 무섭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응? 그, 그야 엘프들이 주무기로 활을 쓴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거잖아? 그럼 실력도 엄청나지 않겠어?”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엘레인의 필사적인 변명이 통했던 것일까?

다행히 베일리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 주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한다는 말이.

“그나저나 환상 속 엘프들의 등장이라니! 역사서나 동화 속에서는 다 잘생겼다고 나오는데 진짜일까요?”

베일리가 신이 나서 외쳤다.

물론 황궁에는 이미 잘생겼다는 말의 범주를 넘어선 천상의 얼굴이 여럿 존재했지만, 엘프들이 가지고 있을 외모는 그것과 궤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인간과 다른 이종족들 간에는 분위기라든가 특정한 부분에서부터 큰 차이가 나지 않던가?

“엘프라면 사슴처럼 긴 목이라든가 청순하고 고아한 느낌이 강하겠죠? 만약 그런 얼굴을 카메라에 담을 수만 있다면 상당한 돈벌이를… 으헤헷!”

엘레인은 갑자기 노선을 바꾸어 군침을 흘리는 베일리의 모습에 그저 허허 웃었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팔려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사진 찍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엘프는 기감이 보통 인간보다 배는 발달해 있는 데다가 매우 민첩하기까지 했다.

아마 베일리가 추억 보관 장치를 들고 군침을 흘리고 있으면 불길함을 감지한 엘프들은 재빨리 나무나 바위 뒤로 몸을 숨겨버릴 것이다.

뭐, 우리 베일리라면 재주껏 그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만약 찍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인간이 자기 모습을 찍었다는 걸 알면 아마 추억 보관 장치를 박살 내려고 들 텐데….’

엘레인은 걱정스레 베일리를 바라보았다.

회귀 전에 엘프들을 직접 만나본 적이 있는 엘레인으로서는 그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뭔 일 나는 거 아닌가 하고 조금 걱정되기도 했었다.

‘애초에 걔들. 엄청난 인간 차별자니까 말이야.’

그들은 인간을 혐오했다.

폐쇄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인지 7년 전 드워프 때보다도 더 심하게 인간을 차별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첫 만남이니까 첫 매듭만 잘 짓는다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만약 라네즈가 다짜고짜 대련하자고 달려들었으면 어떡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라네즈가 달려가려고 할 때 말릴 걸 그랬나…?

엘레인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굉음이 들려온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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