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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화 (316/417)

317화

“그래, 그랬구나. 정말 많이 힘들겠다.”

라네즈가 울먹거린 이유를 알게 된 엘레인은 영혼 없는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뭐, 라네즈에게 외출 금지령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일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가 자초한 일이므로 너른 등을 두드려주는 손길에 저절로 성의가 없어졌다.

엘레인의 짜게 식은 눈은 보이지도 않는지.

라네즈는 따스한 엘레인의 손길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듯이 매우 감격했다.

“응. 힘들지만 그래도 엘레인 네가 위로해주니까 조금 낫다.”

“그럼 다행인데….”

엘레인은 말끝을 흐리며 운디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심한 인간을 보듯 라네즈를 바라보고 있던 운디네가 포르르 날아가더니 라네즈의 목에 난 상처를 깔끔하게 치료해주었다.

“흡. 엘레인…!”

라네즈가 느끼는 감동이 배가 되는 것은 덤이다.

“하아. 몸만 컸지 머리는 덜 컸네.”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아르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봤자 마음의 위로를 받은 라네즈는 여전히 싱글벙글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르닐 오빠는 무슨 일로 왔어?”

“나? 그야 아까 봤던 것들을 너한테 알려주려고 왔지. 근데 엘프들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더라.”

“왜? 설마 다짜고짜 모욕적인 발언이라도 한 거야?”

“글쎄. 내가 앞부분을 안 봐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대충 라네즈 형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알겠더라. 형한테 다짜고짜 활을 겨누는데 분위기가 엄청 살벌했어.”

하긴 만성 인간 혐오증에 걸린 엘프들이라면 그럴 법도 하다.

엘레인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이번에는 라네즈가 의아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근데 아버지는 왜 굳이 저 녀석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거야?”

“뭐? 아빠가 엘프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셨다고?”

“아무래도 몇백 년 동안이나 자취를 감추었던 환상의 종족이니까 조금이라도 길게 대화를 나누어 볼 심산인 거겠지.”

엘레인이 깜짝 놀라 묻자 아르닐이 팔짱을 끼며 그리 말했다.

하지만 엘레인은 그들을 초대한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요리는? 어떤 걸 내놓을 거래?”

“요리라고 해 봤자 풀떼기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아까 올라오는 길에 요리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엘프들은 풀을 좋아해서 신선한 채소를 종류별로 가져와야 한다더라고.”

“헉! 그러면 안 되는데!”

엘레인이 경악해서 외쳤다.

그러나 라네즈와 아르닐은 그러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원래 게네들 채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러게. 동화책에서 엘프들은 전부 이슬이랑 풀만 뜯어 먹고 산다던데….”

그들의 말대로 동화책에서 나오는 엘프들은 전부 채식주의자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에서도 엘프들은 살육을 싫어하며 자연을 무척 사랑하는 자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 이건 잘못된 상식이었다.

“아니야. 엘프들한테 풀만 주면 혹시 엘프 차별하냐면서 엄청 화낼 거야.”

“뭐? 지들 좋아하는 걸로 차려줬는데 왜 화를 내?”

“그야 걔들은 인간처럼 잡식이니까 그렇지.”

“!?”

엘레인의 말에 라네즈와 아르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엘프가 잡식이라니.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그럼 걔들 육식도 하는 거야?”

“응. 엘프 숲에 가면 여러 가지 가축을 기르고 있을걸? 걔들도 고기 엄청 좋아해.”

“허어… 어처구니가 없네.”

아르닐은 조금 어질어질하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지금껏 알고 있던 상식이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엘레인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왜 그런 질문이 안 나오나 했다.

아르닐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자 엘레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변명을 술술 늘어놓았다.

“아스터 왕국의 비밀 서고에 엘프와 관련된 책들이 있거든. 지금도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거기에 다 나와.”

“거기 건국왕이 정령사라고 했었지? 그럼 믿을 만하네….”

아르닐은 아직까지 충격이 덜 가셨는지 허, 하고 한숨과 같은 웃음을 내뱉었다.

반면 라네즈는 엘프들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꽤나 반가워했다.

“그럼 나중에 고기 많이 먹기 대결하자고 하면 저쪽도 좋아하겠네?”

“그야 그렇지. 근데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당장 요리사들한테 가서 요리 메뉴를 바꿔야 한다고 말해야 해.”

먹을 거로 차별하는 게 그렇게 서럽다던데.

만약 인간들은 고기와 채소를 함께 먹고 있는데 엘프의 식탁 위에는 채소만 올라와 봐라.

그들이 과연 인간들을 곱게 볼까?

어쩌면 회귀 전에 인간들과 엘프들의 사이가 크게 틀어진 게 이런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도 지금처럼 황제가 엘프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내가 가서 말할까? 고기를 추가하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 그치?”

“맞는 말이긴 한데… 그냥 내가 직접 가서 말할게.”

라네즈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하자, 엘레인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엘프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는 편이 더 좋잖아?’

참고로 엘레인은 엘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리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남은 것은 그 요리를 제대로 준비해서 내놓는 것뿐이다.

* * *

“똑똑. 잠시 실례합니다.”

황자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곧바로 황궁 조리실을 찾아간 엘레인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했다.

“아닛, 황녀님? 이곳엔 어쩐 일로….”

엘레인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주방장 마커가 들고 있던 국자를 내려놓고 황급히 다가왔다.

참고로 마커는 주로 디저트를 전담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요리 역시 그의 손을 거쳐서 나온다.

그 때문인지 이번에 엘프에게 대접할 요리도 마커가 진두지휘하는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마커 아저씨. 실은 아저씨한테 긴히 알려줄 게 있어서요.”

엘레인은 그리 말하며 조리실 내부를 슥 훑어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온통 파릇파릇한 채소들의 향연!

과연 아르닐의 말처럼 엘프에게 채소 요리만 내어줄 것인지 고기류는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에휴. 아르닐 오빠가 얘기 안 해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예? 혹시 저희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요?”

“네. 아주 큰 잘못을 하고 있죠.”

엘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조리실 내부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채소들을 척 하고 가리키며 말하기를.

“우선 여기에 있는 것들! 샐러드에 사용될 것만 두고 전부 빼주세요.”

“네에? 그럼 엘프들에게 줄 음식이 너무 부족해지는데요?”

“엘프는 잡식성이에요. 보통 인간들처럼 고기는 없어서 못 먹으니까 부족한 건 육류 요리로 채워야죠.”

“헉. 그게 사실인가요?”

마커는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귀한 손님에게 크나큰 결례를 저지를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색이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이제부터 하나씩 바꾸면 되니까. 아직 식사 준비 시간은 꽤 남았죠?”

“예에…. 다행히 황제 폐하께서 넉넉히 시간을 주셨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그다음으로 달콤한 과일들을 준비해 줄래요? 샐러드에 넣을 건데 꿀복숭아나 꿀사과처럼 당도 높은 과일일수록 좋아요. 그 위로 뿌릴 견과류로는 호두와 볶은 아몬드 정도로만 부탁해요.”

“아, 알겠습니다!”

엘레인의 주문이 이어지자 조리실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더욱 바빠졌다.

샐러드에 필요한 채소는 이미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과일을 썰고 아몬드를 잘게 부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줄 고기 요리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나저나 엘프가 고기를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알고 컸으니까요.”

엘레인도 회귀 전에 엘프들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던 적이 있다.

나중에 가서는 ‘자연과 숲을 사랑하는 엘프라고 해도 육식을 좋아하고 즐길 수도 있지 뭐.’라면서 편견을 날려버렸지만, 지금의 인간들은 엘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럼그럼. 몇백 년 동안이나 잠적한 엘프들의 식생활을 정확히 아는 게 더 이상하지.’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마커에게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된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실수하기 전에 이렇게 바로 잡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죠.”

황녀님이 아니었다면 엘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황제의 얼굴에 먹칠할 뻔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한지, 마커는 안도한 얼굴로 가슴을 크게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고기 요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삶은 것보다는 찜. 찜보다는 구이. 특히 참숯 향을 입힌 고기를 가장 좋아하니까 그쪽으로 준비해주면 될 거예요.”

“오오. 정말이지 멋지십니다, 황녀님. 그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마커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엘레인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황녀님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밥상을 차려줬는데 그걸 퍼먹지 못하면 안 될 일이다.

그는 최고로 맛있는 참숯 구이를 만들어 보겠노라고 다짐하며 전장에 뛰어드는 장군마냥 조리실 안으로 몸을 던졌다.

“오호. 역시 주방장 마커. 아주 믿음직스럽구만.”

마커가 적극적으로 가세하자 조리실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졌다.

이따금씩 떨어지는 대장님의 따끔한 채찍질에 구슬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하는 부하 직원들.

열정이 느껴지는 요리사의 세계에 엘레인은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 * *

“호오. 이곳 인간들은 뭘 좀 아는가 봅니다.”

황궁에서 만찬회를 즐길 때 가끔 사용되는 대형 식당.

그곳에서 긴 식탁을 앞에 두고 쫘르륵 앉은 엘프들이 눈앞의 요리들을 보고 두 눈을 빛내었다.

“달콤한 과일과 든든한 견과류가 들어간 샐러드라니. 우리들이 이런 걸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이렇게 준비했을까요?”

“그뿐만이 아니야. 여기 이 고기 좀 봐. 참숯 향이 아주 제대로 입혀졌잖아.”

“그러게. 이렇게 제대로 만든 요리는 오랜만인걸. 우린 벌목할 수 있는 참나무가 한정되어 있어서 참숯 향을 입힌 고기 요리는 잘 해 먹지 못하잖아.”

엘프의 투덜거림에 황제는 흥미로운 듯 턱을 매만졌다.

자연을 사랑하는 엘프가 벌목도 하는 데다가 고기 요리까지 즐기다니.

아무래도 역사서에 적힌 엘프에 관한 내용들을 모조리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신경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이엘로가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처음 만났을 때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황제는 입꼬리를 슥 말아 올리며 말했다.

“그저 요리를 대접했을 뿐인데….”

“과거 인간들에게 대접받은 요리에 비하면 단언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그들이 어떤 요리를 제공했는지 궁금하군.”

황제의 말에 이엘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황제가 한 말에 기분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워낙 최악이어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것이다.

“당시 인간들은 우리에게 채소 요리만을 고집하여 대접해주었습니다. 아무런 간도 되어있지 않은. 그 어떠한 과일과 고기도 곁들이지 않아 요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런 것들이었지요.”

“그 말은 채소 그 자체를 접시 위에 담아서 대접해주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우리에겐 그런 요리 같지도 않은 것을 대접해주면서 인간들은 기름지고 맛있는 고기 요리를 배 터지게 먹었다는 겁니다. 우리 엘프는 이슬만 먹고살 것 같아서 그랬다는데 어떻게 그런 오해나 편견이 생길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흐음. 그것참 난감했겠군.”

생각보다 더욱 격렬한 반응에 황제는 움찔 눈가를 떨며 답했다.

이엘로는 간만에 말이 통하는 인간을 만났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렇다고 답하면서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정말이지 신기합니다.”

“무엇이 말인가?”

“요리의 구성 말입니다. 마치 우리 엘프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겨냥한 것 같습니다.”

이엘로의 말에 황제가 ‘훗’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오만하게 다리를 척 하고 꼬면서 한다는 말이.

“그야 당연하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우리 딸이 직접 고른 메뉴니까.”

“…네?”

황제의 말에 엘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강인한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황제의 주접을 처음 접한 엘프는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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