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레눔은 사프란에게 동의를 구하고 피해자의 체취가 가득 묻은 옷깃을 세 조각 잘라냈다.
동료의 몸에 손을 대는 모습에 4조 엘프들은 불편한 티를 팍팍 냈지만, 진짜 범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 때문인지 직접적으로 레눔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이 천조각에서 나는 냄새를 찾으면 된다. 만약 냄새의 근원지나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를 찾아낸다면 안전하게 몸을 뒤로 빼고 매를 날리도록.”
“알겠습니다.”
삐이이익—!
레눔은 머리 위에 빙빙 도는 커다란 매 한 마리와 덩치가 작은 매 두 마리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배회하고 있는 저 매들은 노마스족의 연락 수단이다.
잘 훈련된 아이들이니 범인의 눈에 띄지 않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을 테지.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사프란과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오자, 엘레인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레눔은 제 몫의 천조각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하신 대로 각각 동남쪽과 서북쪽 외곽을 돌아보라고 시켰습니다.”
“잘하셨어요.”
중앙 수도는 레눔을 포함한 엘레인 일행이 돌아볼 예정이다.
텡오르 영지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돌아본다면 빠르게 범인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네요.”
엘레인은 그리 말하며 엘프들을 바라보았다.
이들 중 두 명은 고인이 된 동료를 운반할 예정이고 남은 셋은 엘레인 일행을 따라가기로 했다. 물론 사프란 역시 동행할 예정이다.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언제 걱정했다고….”
사프란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차피 못 찾아낸다면 베네딕트 제국 전체에게 화살을 돌릴 생각이다.
베네딕트 제국에서 이번 일을 꾸미고 진행했을 거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어쨌든, 일은 제국 한가운데에서 벌어졌고, 불로장생의 소문 또한 그냥 퍼졌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쪽부터 먼저 돌아보죠. 레눔 아저씨. 부탁드려요.”
“맡겨만 주십시오.”
레눔은 곧바로 범인 추적에 착수했다.
워낙 기억에 남는 냄새이기 때문에 많은 온갖 냄새가 뒤섞여 있는 거리에서도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다른 강렬한 냄새에 코가 마비됐을 때에는 주머니를 열어 천조각의 냄새를 한 번씩 더 맡아주는 식이다.
그러는 한편, 엘레인은 레눔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주위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텡오르 영지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표정을 기본적으로 살펴보았고 사람들의 말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곡식이 좀 싸대.
옆집 누구누구가 셋째를 낳았대.
지난번 만났던 친구가 사실은 남자 친구였대 등.
쓸데없는 말들투성이였지만, 엘레인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무언가 도움이 되는 내용이 엘레인의 귀에 들어왔다.
“그 음침한 작자 말이야. 오늘도 왔더라고.”
“며칠 전부터 보이던 그 작자? 그 인간 몸에서 나는 냄새가 아주 장난이 아니던데, 자네 가게에 또 왔다고?”
“어휴. 그러니까 말이야. 생긴 건 멀쩡해서 냄새는 뭐 그리 끔찍한지. 덕분에 안에 있던 손님이 다 나가버렸지 뭐야. 결국, 오늘도 장사 공쳤어.”
“아이구. 힘내. 그렇다고 손님을 쫓아낼 순 없잖어.”
“그건 그렇지만….”
가던 길을 멈춘 엘레인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인 둘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몸에서 나는 끔찍한 냄새라….
그러고 보니 레눔이 싱그러운 풀냄새가 섞인 피 냄새와 끔찍한 약품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혹시 저 사람들이 말하는 끔찍한 냄새라는 것이 바로 저 약품 냄새는 아닐까?
“레눔 아저씨.”
“예. 저 여인의 몸에서 약품 비스무리한 냄새가 섞여 있습니다.”
엘레인이 자리에 멈춰 서자 덩달아 걸음을 멈춘 레눔이 코를 찡그리며 답했다.
그에 엘프들이 놀라운 얼굴로 레눔과 엘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정말 된다고?”
안 그래도 범인의 흔적을 찾기는커녕 계속 걷기만 하고 있던 터라 슬슬 불만이 쌓이고 있던 엘프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란 듯이 범인의 흔적을 찾아내다니?
엘프들이 흥분한 얼굴로 콧숨을 내쉬었다.
그에 엘레인은 그들이 무언가 사고를 치기 전에 재빨리 여인들 앞으로 다가갔다.
“실례지만, 말씀 좀 물을게요. 혹시 여러분이 맡았다는 그 악취가 약품 냄새를 말하는 건가요?”
“으응? 어떻게 알았어?”
“그래, 맞아. 뭔가 지독한 약품 같은 것들을 한데 섞어 놓은 듯한 냄새였어. 그래서 처음에는 어디 의약 쪽에 종사하는 약사인 줄 알았지 뭐야.”
“어, 그랬어? 나는 연금술사인 줄 알았는데. 그 인간 더운 낮에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잖어. 음침하게 얼굴도 꽁꽁 가리고….”
“그러니까 말이야. 아, 아가씨 보고 한 얘기는 아니야. 그 인간은 아가씨랑 다르게 시커먼 걸 뒤집어쓰고 있었거든.”
여인은 호호호 웃으며 멋쩍게 웃었다.
그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엘레인은 피해를 봤다는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그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는 아세요?”
“글쎄.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라서. 아마 우리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거나 잠깐 우리 영지에 들른 여행자이지 않겠어?”
“그렇군요…. 그럼 혹시 가게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설마 그 인간 만나 보려고? 관둬. 목소리도 음침한 것이 영 꺼림칙하단 말이야.”
여인은 정말 걱정된다는 듯 엘레인을 만류했다.
옆에 건장한 남자 둘이 있긴 했지만, 오늘 광장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뭐든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괜찮아요. 그냥 그 주위를 걸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독특한 사람이네. 요기 골목을 돌아서 5분 동안 앞으로 쭉 걸으면 과일 가게가 하나 나와. 지금은 문 닫았으니까 나중에 오면 서비스 팍팍 줄게.”
“감사합니다. 그럼 계속 이야기들 나누세요.”
“잘 가, 아가씨. 그리고 옆에 총각들도.”
엘레인은 친절한 여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다시금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으로 가면 냄새를 추적할 수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분의 몸에도 아직 냄새가 남아있는 걸 보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레눔의 자신만만한 말에 사프란은 입을 다물었다.
엘레인은 그런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주며 남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영지를 떠났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직 남아있었네.’
솔직히 엘레인 자신이 범인이었다면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인 뒤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갔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남아있다는 건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거나 아직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데….
“냄새가 납니다. 이쪽 골목을 통해서 이동한 모양인데….”
그때였다.
과일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레눔은 앞으로 쭉 뻗은 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에 엘레인이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한 엘프는 조만간 범인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욱 흥분하여 레눔의 어깨를 잡았다.
“빨리. 빨리 놈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줘!”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급하게 가서는 할 수 있는 일들도 그르치게 될 거예요.”
엘레인은 레눔의 어깨를 꽉 쥐고 있는 엘프의 손을 떼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에 입술을 꾹 깨문 엘프는 천천히 하얗게 질린 손을 떼어 내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레눔에게 집중되었을 때.
카론이 허리춤에 있는 검집을 강하게 꽉 쥐었다.
“골목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뭐? 설마….”
“냄새가… 이상할 정도로 진합니다.”
레눔이 뒤이어 말하자 모두의 의문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어두운 골목을 노려보고 있자니 데구르르. 무언가가 굴러 나와 그들의 시선을 강탈했다.
“저건 사과심…?”
카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쏠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어둠 속에서 타다닷! 누군가가 발을 박차며 도망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도망치고 있다!”
“잡아!”
깜짝 놀란 사람들은 범인을 쫓기 위해 바삐 발을 놀렸다.
레눔과 카론이 엘레인을 호위하며 빠르게 달려 나갔으며, 가장 날랜 엘프들은 좁디좁은 골목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 위로 훌쩍 올라가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왼쪽!”
“이번엔 오른쪽으로 갔다!”
“오른쪽에 없는데? 이놈, 어디로 갔어!”
이곳의 골목은 왜 이리도 복잡한지. 담벼락 위를 달리는 엘프조차도 몇 번씩 범인의 모습을 놓쳤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기템.
레눔의 코가 있었다.
“건너편에 있습니다.”
“잠시 실례.”
카론이 검을 뽑아내더니 담벼락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 탓에 원치 않게 엘레인 일행과 눈이 마주친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욕을 뱉어냈다.
“이런 미친…!”
“놈! 감히 우리 동료를 죽이다니!”
“!?”
남자는 파들파들 몸을 떨며 주위를 살폈다.
앞에는 담벼락을 두부 자르듯이 잘라낸 카론과 덩치가 산만 한 레눔이.
그리고 위쪽에는 분노한 엘프들이 활과 단검을 들고 이쪽을 향해 겨누고 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 그 자체.
보통이라면 양손을 내보이며 항복을 해도 모자랄 상황이었으나….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아!?”
남자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는지 품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을 향해 깨트리니.
지독한 악취와 함께 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독이다!”
“크하핫! 그래, 독이다!”
남자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치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신명나게 웃어 재꼈다.
그러나 엘프들은 정령과 친한 종족.
곧바로 실프를 소환하자, 산뜻한 바람과 함께 보라색 불길한 연기가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쳤다.
“쯧.”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너무나도 간단하게 파훼 되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아쉬워할지언정 절망하진 않았다.
“그럼 잘 있어라.”
남자는 히죽. 더러운 이를 드러내며 스크롤을 반으로 찢어냈다.
그와 동시에 피어오르는 밝은 빛.
파아앗—.
“뭣!”
“텔레포트?”
빛이 수그러들었을 때에는 이미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후였다.
“이럴 수가….”
“다 잡은 놈을 이렇게 눈앞에서 놓치다니.”
엘프들은 분한 듯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서 있던 사프란은 담벼락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가 카론의 멱살을 세게 움켜쥐었다.
“바로 앞에 있었으면서 어째서 놈을 붙잡지 않았지? 이렇게 담벼락을 쉽게 잘라낼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가 말이다!”
사프란은 담벼락을 자르고 난 후 카론과 레눔. 그리고 엘레인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분노를 토해내자 옆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그녀의 속에 불을 질렀다.
“그거 놓으세요.”
“황녀….”
“일부러 놓아준 거니까 진정하고 그 손 놓으세요.”
“뭐라고?”
사프란은 벙찐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놓아줬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게 무슨….”
“그렇게 강한 엘프를 둘이나 납치하고 한 명은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적이 한 명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
사프란은 그제야 제 실책을 깨달았다.
엘레인은 범인의 아지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일부러 놈을 풀어줌으로써 말이다!
“그, 그럼 어떻게 놈을 찾을 생각이지?”
“다 생각이 있죠. 운디네?”
엘레인이 빙긋 웃으며 운디네를 불렀다.
그러자 엘레인의 머리 위에서 포로롱 날아온 운디네가 사프란 앞에 당당하게 섰다.
-무우!
“운디네는 갑자기 왜…?”
“잘 보세요.”
엘레인의 말에 사프란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운디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디네가 콩눈을 질끈 감은 채 힘을 빡 주자, 머리 위로 새끼손톱만 한 운디네가 하나 더 튀어나왔다.
-무잉!
아기 운디네가 울자 사프란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 이건…?”
“운디네의 분신이에요. 어때요. 귀엽죠?”
“설마 그걸 범인에게 붙여놓은 겁니까?”
사프란의 경악 섞인 물음에 엘레인은 방긋 웃으며 외쳤다.
“딩동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