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6화 (335/417)

336화

올 것이 왔다.

카르넬의 말을 듣는 순간 엘레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역시 그날 당장 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람 심리라는 것이 그렇듯 카르넬의 한계는 저녁나절이 최대였나 보다.

엘레인은 제 손을 꼭 쥐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카르넬을 보며 속으로 절규했다.

‘어떡하지? 아직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지난밤 운디네가 나름대로 조언(?)해주긴 했지만, 안 그래도 혼돈의 카오스인 호수에 거대한 돌덩어리 하나를 던져 놓은 꼴만 되었다.

카르넬의 고백을 받아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야. 너 어제 반응 보니까 마냥 싫어하는 사람 같지는 않던데?’라는 말을 듣게 됐으니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으으. 기절하고 싶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쥐가 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정신은 멀쩡하다.

쓸데없이 건강한 정신을 탓하면서.

엘레인은 눈앞의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면 기절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엘레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으…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하필이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런 질문을 하다니.

엘레인은 괜히 속을 들킨 것 같아 허둥지둥거리면서 아닌 척을 했다.

“그보다 무슨 일이야? 단둘이서 해야 할 말이…?”

엘레인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카르넬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쿵쿵. 심장이 요동쳐대서.

혹여나 입 밖으로 그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카르넬은 그런 엘레인을 향해 싱긋 웃으며 답했다.

“기존에 조사를 나갔던 성기사들이 중요한 정보를 발견해 와서 말이야. 같이 공유하려고 불렀지.”

“어… 그거 말고 다른 할 이야기는 없고?”

“나도 많은 걸 알려주고 싶은데, 아직 들어온 정보가 별로 없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하는 그의 말에 엘레인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닌데.

어젯밤 고백의 대답을 들으려는 건가 싶어서 잔뜩 긴장해서 따라왔더니만.

갑자기 일 이야기를 한다고?

‘와. 사람을 그만큼 잠 못 이루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그래?’

엘레인은 울상을 지으며 카르넬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나 혼자 밤새 고민하고 끙끙 앓은 것 같아서 마음이 어수선한데 이렇게 또 뒤통수를 치다니.

엘레인의 입장으로는 퍽 억울할 만도 했다.

물론! 사람 실종되고 죽고 그런 심각한 일이기 때문에 공유할 정보가 있으면 전날 고백을 한 사이든 아니든 바로 해야 하는 게 맞다.

엘레인 자신도 이 상황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되긴 하지만….

문제는 감정이 제대로 못 따라간다는 것이다.

‘끄응. 괜히 이상한 착각을 하게 만들고 말이야.’

이런 심각한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 저 혼자 팔자 좋게 가슴 설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심란해졌다.

뭐랄까.

현자 타임이 아주 세게 오셨다고나 할까.

솔직한 마음으로는 ‘카르넬 네가 고백해서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거잖아!’라면서 어깨를 잡아 흔들며 책임 전가를 하고 싶었지만.

이 와중에 또 운디네의 말이 떠올라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무슨 정보를 알아 온 거야?”

결국, 엘레인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런 거였다.

어차피 대답을 정해온 것도 아니면서 그에게 따지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눈앞의 찻물을 들이켜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주신교의 대주교가 납치범 조사에 합류한 건 어제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평소처럼 조사를 진행하면서 주신교 사람들을 눈여겨보기로 했었고 말이야.”

“맞아. 그런데 따로 파견한 조사단원이 이상한 걸 목격했다고 하더라고.”

“이상한 거?”

“응. 이걸 한 번 봐봐.”

그리 말한 카르넬은 사진 한 장을 꺼내었다.

밖에서 안쪽을 찍은 탓인지 사진이 조금 흐릿했지만, 그래도 대주교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의 모습을 면밀히 살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알 수가….’

“워, 잠깐만. 설마 이거 핏자국이야?”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러자 카르넬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주교가 들고 다니는 성전에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추정되는 것이 묻어 있어.”

“허….”

엘레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성전은 온갖 더러운 것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무척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물건이다.

주교와 대주교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성전을.

대체 어떻게 관리했기에 핏자국을 저리도 당당하게 묻히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사진만으로는 확정 짓기 어려워. 어떻게 보면 와인 자국인 것 같기도 하거든.”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카르넬의 말에 엘레인은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와인 자국인지, 핏자국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저 성전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핏자국이 맞는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대주교 돌루스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없겠지.

“뭔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겠는데.”

“은신과 잠입에 유능한 자들을 내부로 침투시켰으니 조만간 소식이 들려올 거야. 그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여부는 조만간 밝혀지겠지.”

“…하긴. 우리 쪽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생겼으니까. 어쩌면 정말 조만간 범인이 밝혀질지도 모르겠네.”

카르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에서도 계속 수색을 할 테지만, 엘레인이 잡은 끄나풀을 제대로 심문할 수 있다면 진짜 범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무슨 방법을 쓰든지 간에 그들에게 걸린 세뇌만 문제없이 풀 수 있다면.

놈들을 심문하여 정보를 얻어내는 것쯤은 아주 쉬울 테니까 말이다.

“지금부터는 얼마나 빨리 정보를 수집하고 범인을 제지하느냐가 관건이네.”

“맞아. 그래서 서로 간의 도움이 아주 중요하고 말이야.”

카르넬은 그리 말하면서 엘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레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커다란 손을 맞잡았다.

“돌아가면 엘프들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우리 쪽에서도 안전하게 세뇌를 풀 수 있는 방법을 다방면으로 찾아보도록 할게.”

“고마워. 그리고….”

맞잡은 손에서 시선을 뗀 카르넬은 고개를 들어 올려 엘레인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이리 말했다.

“네 대답. 언제고 기다릴게.”

산뜻한 미소와 함께 마주쳐오는 그의 진중한 눈빛.

그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엘레인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응.”

* * *

신성제국 최외곽에 위치한 어느 한 마을.

그곳의 한 낡은 신전에서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멍청한!”

짝! 소리가 나게 복면인의 얼굴을 내려친 남자는 다름 아닌 돌루스였다.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복면인을 발로 뻥 차면서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대체 어떻게 관리했기에 일이 이 모양으로 돌아가? 미치광이 그 녀석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고!”

“쿨럭. 알 수 없….”

“이런 쓸모없는 것. 그럼 당장 튀어가서 어떻게든 폴을 찾아내!”

돌루스가 있는 힘을 다해 한 번 더 뱃가죽을 차버리자 복면인의 몸이 데구루루 뒤쪽으로 굴러갔다.

그는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돌루스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시야에서 사라졌다.

“쯧. 조만간 물갈이를 해야지 원. 한창 중요할 시기에 이게 무슨 일이야?”

돌루스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화려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신전의 낡은 외부와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의자는 푹신하게 그의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흐음. 그나저나 폴 이 녀석이 만약 죽어버린 게 맞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많은 차질이 생기는데….”

자리에 앉은 돌루스는 원대한 계획이 쓰여 있는 서류를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폴은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던 그의 계획에 큰 바람을 불어넣어 준 유일한 인재였다.

5년 전.

미치광이 연금술사 폴과 자신의 목표가 비슷함을 알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그 뒤로 돌루스는 폴과 서로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으며, 돌루스는 폴을 돕기 위해 몰래 연구소를 마련해주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계획에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해, 납치 및 실험을 진행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 덕분에 연금술사 폴은 갖가지 실험을 해올 수 있었으며.

신성제국 황실에서 실종 사건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는 낌새가 보이기 전까지는 폴은 나름 신성제국 내에 있는 비밀 연구소에서 호화로운 생활도 누렸었다.

“덕분에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도 만들 수 있었지. 뭐, 나의 원대한 목표와 비교하면 하찮은 실패작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돌루스는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빛의 정령의 힘이 깃든 단검을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하여튼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솔직히 언젠가 들킬 거라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시기가 좀 빨랐다.

그래서 돌루스는 지금 상황이 꽤나 당혹스러웠다.

최소한 베네딕트 제국으로 피신시켜 놓으면 미치광이 연금술사 폴이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무 성급했나?”

돌루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폴에게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의 심장은 다음 실험에 꼭 필요했다.

앞서 인간들의 인체로 실험해 보았지만, 결과는 실패. 실패. 그리고 또 실패였다.

그나마 건져낸 거라고는 인체 부위 중 심장이 가장 적합한 재료라는 것뿐.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건 마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엘프들의 심장을 가지고 실험해 보는 것이었다.

엘프들은 인간과 다르게 정령과의 감응력이 좋으니까.

‘인간과 정령의 완전한 융합’을 실험하기에 앞서 좋은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을 진행시킬 폴이 실종된 상태이니 돌루스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쯧. 연금술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닌데.”

돌루스는 비공식적으로 상당한 마법 실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신성력까지 갖춘 특출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연금술엔 영 젬병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폴의 부재가 아쉬울 수밖에.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장 20년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는 계획을 이대로 멈출 순 없는 노릇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던가?

재앙급 정령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지.

직접 제어가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 열파의 정령을 깨웠을 때 그는 정말 죽을 뻔했다.

앞서 오만한 드워프 왕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놈이 깨어났을 때 직접 확인하러 갔던 그는 뜨거운 열기에 익어 그대로 익힌 고기가 될 뻔했다.

뭐, 그에 비해 딜런 아스터에게 수해의 정령이 봉인된 물건을 건네는 건 식은 수프 먹기긴 했다.

오만한 드워프 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이 콧대 높은 아스터 공주에게 굽실거려야 하기는 했지만, 대가도 충분히 치렀겠다.

결국, 인간과 정령이 그냥 융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으니 별다른 불만은 없다.

“흐음. 이걸 어떡한다.”

돌루스는 테이블 위에 있는 주머니를 흘겨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두들겼다.

그리고는 또 다른 내용의 보고서.

세계수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그것을 힐끔 바라보더니 심장이 든 주머니를 움켜잡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심장보다 더 좋은 재료를 찾았으니 그걸 이용해서 내 방식대로 일을 진행해 보는 수밖에.”

돌루스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심장이 든 주머니를 쓰레기 버리듯 뒤로 휙 던졌다.

메인 재료를 얻기 위해서는 두 제국과 엘프들의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 보자. 베네딕트 제국 황제에게…. 우선 이렇게 시작하면 되려나?”

돌루스는 편지지 위에 펜을 휘갈기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오늘 그는 베네딕트 제국 황제에게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내용은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와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것.

“그 두 사람. 선남선녀 커플이 따로 없었지.”

돌루스는 흐흐 웃으며 전날 황궁에 입궁했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는 엘레인과 카르넬이 함께 있는 장면을 직접 목도한 바가 있는데,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 그 자체였다.

뭐, 황녀는 황태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황태자만큼은 황녀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었다.

“흐흐. 베네딕트 제국의 황제가 딸바보인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런데 그러한 황제가.

자신의 딸이 경쟁국 후계자와 밀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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