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어처구니가 없군.”
황제. 더글라스 베네딕트는 눈앞의 서류를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에 엘레인이 보내온 편지를 읽은 그는 곧바로 텡오르 영지에 기사단과 정보부원을 파견한 바가 있다.
그리고 눈앞의 서류는 그들이 조사한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보고서로, 연구실 안에 있던 연구 자료 내용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불로장생을 위한 계획이라….”
더글라스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고작 그런 하잘것없고 헛된 욕망 때문에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니 매우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짜증스레 인상을 구긴 그는 보고서를 올린 장본인인 정보대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미친 짓을 저지른 놈이 신성 제국에서 왔다고?”
“예. 미치광이 연금술사로 5년 전에 이름이 꽤 알려져 있던 범죄자입니다. 저지른 짓이 워낙 흉악하여 주신교단에서 처형했다고 대대적으로 공표했었는데… 모두 거짓이었던 모양입니다.”
미치광이 연금술사 폴은 5년 전 악마급 범죄자로 낙인찍히며 주신교의 대주교가 직접 그의 죄를 벌하기 위해 끌고 갔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5년 뒤 떡하니 나타나다니?
심지어 의문의 실종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일치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돌루스…. 그자도 불로장생을 원하는 건가?”
“높은 확률로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군. 여기서 성황이 개입되어 있을 확률은?”
“으음….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럴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고 봅니다.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 거라면 몰라도 이미 산 사람을 오래 살게 만드는 법이 필요하진 않을 테니까요.”
정보대신의 냉혹한 판단에 더글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성황이라면 자기 자신이 오래 사는 것보다 이미 죽은 아내와 첫째 아들을 살리는 쪽을 더욱 간절하게 원하겠지.
슬픔에 빠져서 오랫동안 일을 손에서 놓을 정도로 그는 제 아내와 첫째 아들을 각별하게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 탓에 둘째 아들인 현 황태자와 성황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마저 생겨났다지.’
더글라스는 언젠가 한 번 들어 보았던 성황의 하소연을 떠올리며 침음을 흘렸다.
어쩐지 남 일 같지 않은 일에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다.
‘그 아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비슷한 고민으로 괴로워했겠지.’
더글라스 또한 비슷한 이유로 아이들과 거리가 멀어졌었다.
특히 오르칼과의 사이가 가장 심각하게 어그러졌었는데.
만약 엘레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더글라스는 성황보다 더욱 끔찍한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다.
“…엘레인은 지금 신성제국에 갔다고?”
“예. 일 때문에 잠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황태자를 만나러 간 거겠군.”
엘레인이 사업 이야기로 황태자를 만나는 건 꽤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더글라스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씨익 웃은 그는 엘레인이 보내온 편지의 겉면을 부드럽게 쓸었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직접 손편지를 써서 보내준 사랑스러운 내 딸.
안 본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됐지만, 오늘따라 딸아이가 더욱 보고 싶은 건 너무 주책맞은 일일까?
…아니.
그럴 리가.
“정보대신. 요즘 20대 여인이 선물을 받았을 때 가장 반응이 좋은 물건이 무엇이지?”
“오오. 황녀님을 위해 선물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그래. 그러니 그대의 뛰어난 정보력이 필요하다.”
“핫핫. 폐하께서 저를 이리도 인정해주시니 너무나도 기쁩니다!”
“기쁘면 얼른 정보나 가져오도록.”
“그야 물론이지요. 어디 보자…. 여기 어디쯤 통계표가 있을 텐데…. 아, 찾았다!”
정보대신은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서류 뭉텅이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파라락. 서류를 넘기더니, 중간쯤에 멈춰서 서류 한 장을 빼냈다.
“이겁니다! 여기 이 통계표를 보시면…!”
똑똑—.
“폐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정보대신이 신이 나서 통계표를 더글라스에게 전달하려던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집사장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춘 더글라스는 심기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한 때에 방해하다니.
더글라스는 영 못마땅한 심정을 숨기며 들어오라 말했다.
“무슨 일이지?”
“주신교단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주신교단에서?”
더글라스는 제 앞으로 슥 내밀어진 편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주신교단 측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편지가 날아오다니.
워낙 시기가 적절했기 때문에 더글라스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황녀님, 황자님들 성인식 때만 의례적으로 편지를 보내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혹시 우리들이 미치광이 연금술사와의 관계를 눈치챈 것을 알고 변명이라도 하려는 걸까요?”
“…지금부터 확인해 볼 테니 재촉하지 마라.”
시종장을 내보낸 더글라스는 자꾸만 얼쩡거리는 정보대신을 밀어내고 편지 봉투를 뜯어내었다.
그 잠깐의 시간도 참지 못한 정보대신이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지만, 아쉽게도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선 편지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대주교는 대체 무슨 내용을 적어서 보낸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황제의 반응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떨떠름한 얼굴이었던 더글라스의 얼굴이 점차 굳기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반듯한 이마 위로 선명한 핏줄이 솟아났다.
“폐하? 왜 그러시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개수작을!”
콰앙—!
“흐어억!”
정보대신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더글라스가 테이블을 반으로 시원하게 쪼개버리면서 그 위에 쌓여 있던 서류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혹여나 중요한 서류를 밟을까 봐 한 걸음 물러난 상태에서 얼어붙어 있던 그는 천천히 황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여전히 분노한 얼굴의 황제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 폐하.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그러시는지요?”
“직접 읽어 봐라.”
일일이 설명하기도 싫은 걸까.
휙 하고 날아오는 편지지를 아슬아슬하게 잡아챈 정보대신은 서둘러 편지 내용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편지의 반도 읽지 않은 시점에서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허. 이게 무슨…. 이 말이 사실일까요?”
정보대신은 놀란 얼굴로 편지지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사실 편지의 내용을 별것 없었다.
그저 신성제국과 베네딕트 제국이 서로 진정한 화합을 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내용이 적힌.
어떻게 보면 순수하게 축하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하지만 여기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장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신성제국의 황태자와 황녀님의 사이를 응원한다니? 심지어 두 사람의 사이가 각별한 것은 궁 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고?’
황녀님과 황태자가 사업 파트너 사이임은 알고 있지만, 이런 소문은 그도 처음 듣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편지의 내용을 마냥 무시할 수만는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궁 내에서만 퍼진 소문이라면 정보대신인 그의 귀에 해당 정보가 아직 들어오지 않는 지금 상황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 마냥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만약 편지에 담긴 내용이 사실이라면.
엘레인의 아버지인 더글라스 베네딕트가 저리 화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정보대신.”
“예, 옙!”
“신성제국의 황태자에 대한 정보와 소문을 모두 읊어 보아라.”
더글라스는 이를 뿌득 갈며 살벌하게 말했다.
그의 기세에 짓눌린 정보대신이 군기가 바짝 들어서는 재빨리 제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토해냈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는 마음씨가 아주 선량하여 천사 같은 이미지로 자리 잡혀 있습니다. 거기에 승마, 검술, 정치, 전술, 경영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여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더.”
“그, 그리고 맡은 일에 실수하는 일이 절대 없어서 모두의 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답니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이고 황태자와 오랫동안 대면해온 귀족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신성제국에 위해를 가하는 것들은 가차 없이 물어뜯는다고 합니다.”
“그래. 바로 그게 문제다.”
“예?”
느닷없는 황제의 지적에 정보대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더글라스의 미간의 콱 구겨지며, 안 그래도 반으로 쪼개져 너덜거리는 책상의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콰득. 구겨버렸다.
“신성제국의 황태자는 자국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놈이다. 그런 놈이 과연 우리 딸에게 순수한 의도로 접근했을까?”
“아….”
그것은 정보대신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내용이다.
그 때문에 조금 전 탄식을 흘리지 않았던가?
더글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정보대신을 보며 어째서인지 더욱 분기탱천한 얼굴을 했다.
“물론 우리 딸이 무척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순수하게 우리 딸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사내들은 넘쳐난다는 뜻이다.”
“예? 아, 예, 그렇죠. 실제로 우리 황녀님이 1등 신붓감이라는 통계 분석도 나왔으니까요.”
정보대신이 재빨리 통계 기록을 입에 담자 황제의 얼굴이 조금은 덜 무서워졌다.
더글라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정보대신에게서 시선을 떼고 입꼬리를 비죽였다.
“어쨌든 결론은 그 발칙한 놈이 우리 딸을 이용하려고 접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거다.”
“끄응. 황녀님께서 정치질에 이용되는 건 바라지 않는데 말입니다.”
“그대의 말대로다. 내 딸이라면 순순히 이용되기만 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 일로 상처를 입을까 봐 걱정이 되는군.”
더글라스가 봤을 때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사위로서 마음에 드는 점은 하나도 없지만, 그보다는 엘레인의 안전이 먼저였다.
그리고 딸아이가 입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한다면.
현재 그의 눈에 카르넬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나쁜 놈에 불과했다.
“정보대신.”
“예.”
“그대의 딸이 만약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그 간덩이 부은 놈을 어떻게 처리할 텐가?”
“흐음…. 글쎄요. 보통은 다리 한쪽을 부러트리는 것으로 시작할 것 같습니다만.”
황제의 말에 잠시 감정 이입을 하고만 정보대신은 진지하게 대답하자마자 아차 했다.
보통의 상대라면 그러고도 남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황태자.
심지어 두 사람이 서로 밀애를 하는 사이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하게 판명 난 것도 아니다.
하물며 우리끼리 그저 지레짐작하고 있을 뿐.
편지에 ‘얘네 둘이 밀애하고 있대요!’라고 명확하게 적힌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 전하? 설마 정말로 하실 건 아니지요?”
정보대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리 물었지만, 이미 많이 늦은 듯하다.
불길하리만치 싱긋.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황제를 보며.
정보대신의 머릿속에 ‘망했다’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똑똑—.
살벌한 분위기를 뚫고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정보대신이 제발 누구든 좋으니 도와달라는 눈으로 문가를 바라보았고.
황제는 광기가 살짝 내비치는 눈을 번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또 뭐지?”
“폐하. 황녀님께서 도착하셨답니다.”
“!?”
엘레인이 왔다는 소식에 정보대신은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제 살았다. 황녀님이 온다면 황제 폐하의 미친 생각을 멈춰줄 거야!’
이제껏 그래왔듯이 황녀님만 오신다면 뭐든 해결되리라.
정보대신은 그리 생각하며 황제를 휙 돌아보았다.
그런데.
“잘됐군.”
“예? 무,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어쩐지 불안하다.
여전히 번들거리는 그의 눈을 마주한 정보대신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그리 물었다.
그러자 황제가 손 안의 나무 부스러기를 가볍게 털어내더니 두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뭐가 됐든,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나.”
“헉.”
이때 정보대신은 직감했다.
황제의 분노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아주 활활 불타오를 것이라고.
이번만큼은 황녀님의 존재가 진정제가 아닌.
치명적인 연료 그 자체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