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1화 (340/417)

341화

고대 정령의 봉인 구역이 파괴되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봉인된 고대의 정령이 모두 풀려났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즉, 제국에 큰 위기가 들이닥쳤다는 이야기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더 자세히 설명해라.”

“…엘프들이 공유했던 봉인 구역 중 서북쪽에 위치한 세 장소에서 의문의 폭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기사단이 파견됐을 때는 이미 해당 구역이 전부 파괴된 상태였고, 봉인되었던 정령이 뛰쳐나와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일단 대피 명령을 내렸으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보대신의 말에 장내에는 깊은 침묵이 흘렀다.

정령들의 봉인이 해제된 것도 모자라 놈들이 주변을 초토화시키면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당연히 충격으로 몸이 굳을 수밖에.

“시기가 너무 적절한데…. 하필이면 세상에 혼란을 주는 고대의 정령들이 여럿 풀려나다니.”

“돌루스. 그 인간이 꾸민 일일 확률이 높다는 말이야?”

“그래. 어쩌면 이게 제 죄를 묻어갈 수 있는 적절한 사건일지도 모르지.”

오르칼의 냉정한 판단에 다른 이들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이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우선 이 일을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해요.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사람들은 계속 다치고 있으니까요.”

“잠깐. 설마 엘레인 네가 직접 가려고?”

“당연하지. 나랑 운디네가 아니면 고대의 정령을 소멸시킬 수 없잖아.”

라네즈가 깜짝 놀라 묻자 엘레인은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다들 숙연해지자 황제가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당당히 가슴을 폈다.

“아니. 최상급 정령만 아니라면 나머지 정령들은 마법사나 기사의 힘으로도 소멸시킬 수 있다. 지금 풀려난 놈들은 전부 중급 또는 상급이니 굳이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그래도 제가 직접 나서는 편이 훨씬 더 빠르지 않을까요?”

황제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엘레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침음을 흘렸다.

딸아이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한숨을 내쉰 황제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정 그렇다면 너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남아 있도록 해라. 놈이 서북쪽에 있는 구역만 파괴시킬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리고 엘프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편이 좋겠군.”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황제는 엘레인과 그렇게 타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황자들을 보며 말하기를.

“오르칼. 라네즈. 아르닐. 너희 셋이 활약할 때다.”

“좋았어…!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죠.”

황제의 지목에 쌍둥이 황자들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리 답했다.

그리고 오르칼은….

“이 일이 끝나면 돌루스 그자에 대한 처우를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두 눈을 서늘하게 빛냈다.

* * *

각각 구역을 배정받은 황자들은 해당 영지로 이동하기 위해 무장을 마치고 텔레포트 마법진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 오르칼 형은 어디로 갔어?”

“첫째 형은 먼저 출발했대.”

“진짜? 엄청 빠르네….”

라네즈가 입맛을 쩝 다셨다.

자기가 1등으로 도착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니.

라네즈는 제 직속 기사단인, 황실 제4 기사단을 이끌고 텔레포트 마법진 위에 서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안 그래도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와중, 아르닐이 그의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을 했다.

“형. 가서 사고 치지 말고 놈을 잡는 데나 주력해. 알겠지?”

“야.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뭘 그런 충고를 다 하고 그러냐?”

“어린애는 아니지만 사고는 엄청 치고 다니잖아. 가서 괜히 힘겨루기한다고 난리 피우지 말고 그냥 빨리 쓱싹해버려.”

라네즈는 버럭 화를 내려다가 도로 입을 말아 넣었다.

아르닐의 말대로 정령과 한번 힘겨루기하면서 누구의 힘이 센지 알아보려고 했던 라네즈였기에 지레 찔린 것이다.

“근데 그냥 빨리 잡아버리면 좀 심심하지 않냐?”

“괜히 딴짓하다가 주변에 피해를 더 끼치는 것보단 낫지. 엘레인한테 미움받고 싶어?”

“아니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빨리 잡기만 하는 건 재미없다는 말이지.”

“그럼 뭐 어쩌자고?”

아르닐이 똑바로 말하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라네즈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내기할래?”

“내기? 무슨 내기?”

“그래. 누가 더 빨리 잡고 오는지 내기하자는 거지. 진 사람이 열흘 동안 엘레인한테 접근 금지하는 걸로!”

라네즈는 자신이 없었다.

이번 내기에서 질 자신이!

그런 마음이 잔뜩 우러나오는 그의 눈빛에 아르닐은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하기를.

“좋아. 나중에 울지나 말라고.”

“그건 내가 할 소리지! 절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야!”

“알았으니까 얼른 가기나 하시지.”

아르닐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때마침 라네즈의 발밑이 환하게 물들었다.

라네즈는 마지막까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라고 외치며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어휴. 이제야 귀가 편하네.”

아르닐은 고성에 혹사당한 귀를 매만지며 텔레포트 마법진 위에 섰다.

그러자 그의 곁에 있던 직속 마법 기사단의 단장이자 마법대신인 하르곤 바셀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런데 3황자 저하. 저쪽이 먼저 출발하면 이쪽이 좀 더 불리한 거 아닌지요?”

“…….”

혹시 일부러 페널티를 받고 시작하는 겁니까?

그리 덧붙이는 그의 말에 아르닐의 눈이 세모꼴로 변했다.

“빨리 발동 안 시키고 뭐 해!?”

“헉!”

“아, 알겠습니다!”

아르닐의 불호령에.

마법사들은 이게 웬 날벼락이냐는 듯 허둥지둥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 * *

“…여기가 아도르 영지?”

환한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라네즈 일행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완전 난리가 났을 거라던 정보대신의 말과 다르게 마을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뭐야.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설마 잘못 도착한 거 아니야?”

“아닙니다. 여기는 아도르 영지가 맞습니다. 저기 표지판에 그렇게 적혀 있는걸요.”

기사단장이 앞의 표지판을 가리키며 말하자 뒤에 선 다른 기사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라네즈는 ‘아도르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 안쪽에 있는 사람들은 왜 아무런 위기의식도 없어 보이지?”

라네즈의 말마따나 입구 안쪽의 마을은 매우 조용했다.

어디 파괴된 흔적도 없어 보이고 입구 근처에 있는 사람들 역시 평범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기사단장은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만요. 저하. 아까 브리핑할 때 마을 사람은 모두 대피시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 그러고 보니….”

꺄아아악—!

그때였다.

마을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은.

누가 봐도 위급 상황이 닥쳤음을 알 수 있는 그 소리에 라네즈와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곧바로 마을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근데 여기 사람들. 뭔가 이상합니다.”

“그러게. 비명이 들리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고 있잖아?”

라네즈와 기사들은 달려가는 동안에도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보대신에게 들은 내용과 다르게 평화로운 마을 모습과 비명이 들려오고 있음에도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너무나도 이질적인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으나 그것에 대한 확인은 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인을 구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라네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드디어 소리가 들려오는 근원지에 도착했다.

“뭐야. 아무것도 없는데?”

도착한 곳에는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라네즈는 서둘러 여인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이봐, 괜찮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흐으윽. 너무… 너무….”

“너무 다음은 뭔데? 진정하고 조금만 더 호흡을 천천히 해 봐.”

라네즈는 여인이 혹여나 뒤로 까딱 넘어갈까 봐 최대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라네즈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너무… 맛있어 보여…!”

“으헉!”

문득 뻥 뚫린 여인의 눈과 마주친 라네즈는 그녀를 팍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여인은 꽤 세게 밀쳐졌는데도 뒤로 발라당 엎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척비척 몸을 바로 세우더니 그녀의 온몸이 초록색깔 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아쉽다. 여태 본 것 중 최고로 맛깔나는 먹잇감이었는데. 너무 아쉬워.

가시 박힌 식물의 줄기로 이루어진 여인이 라네즈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라네즈는 그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식물인간(?)을 바라보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너 뭐냐?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그 먹잇감이라는 거 설마 날 보고 한 말인 거냐?”

-어머.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니? 지금은 정령어로 말하고 있는 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커다란 줄기 위에 턱을 괴며 요염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이목구비조차 모호하게 생긴 초록 괴물이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형국이라 혐오감만 더욱 치솟았지만 말이다.

-내 이름은 인둑티오. 맛있는 인간을 먹는 게 취미란다.

“취미 한번 끔찍하네.”

-후후. 취향이니 존중해주련?

괴물.

아니, 인둑티오라는 정령은 상체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럴 때마다 분홍색의 정체 모를 연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왠지 모를 악취에 라네즈의 이맛살이 와락 구겨졌다.

“어쨌든 네가 이 주변에 봉인되어 있던 정령이라 이 말이지?”

-왜. 날 잡아보려고? 아서려무나. 넌 날 죽이지 못해. 그 반대면 몰라도.

“자신만만하네. 여기 널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이렇게 수두룩한데. 뭘 믿고 뻗대는 거야?”

-후후훗. 네 눈엔 저들이 날 잡을 수 있는 상태로 보이니?

“뭐? 그게 뭔 뚱딴지같은….”

라네즈는 그게 무슨 개소린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기사단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한 라네즈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너 쟤들한테 뭔 짓거릴 한 거야?”

-무얼. 내 특기는 유혹이란다. 내 꽃이 주는 향기를 맡으면 누구든 저렇게 나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지.

인둑티오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며 헤롱거리고 있는 기사들을 가리키더니 깔깔 웃었다.

이 특수한 향기는 상대방의 음심을 자극하여 지독한 환각에 빠지게 만든다.

지금쯤 기사들은 향기에 취해 인둑티오의 위로 자신의 이상형을 덧씌워서 보고 있을 테지.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이상형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환상에 빠진 채.

괴물의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게 되는 것이다.

-후후훗. 아주 달콤한 향기지?

인둑티오는 머리 위에 핀 꽃잎을 팔랑거리며 더욱 강하게 향기를 뿜어냈다.

그리고는 가시가 박힌 줄기를 뻗어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라네즈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그나저나 내 말을 알아듣는 인간은 참으로 오랜만인데…. 그냥 잡아먹기엔 너무 아깝구나.

“누가 순순히 잡아먹혀 준대?”

-순진하구나. 아직 모르고 있나 본데 너 또한 저들처럼 될 거란다. 네 힘이 저들에 비해 강해서 잠식되는 것이 조금 느릴 뿐. 지금도 내 달콤한 향기는 착실히 네 몸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단다.

인둑티오의 말에 라네즈는 제 손을 쥐었다가 폈다를 반복했다.

멍하니 손을 쥐락펴락하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인둑티오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는 곧 기쁘게 내 품에 쓰러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힐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란다.

인둑티오는 이제는 말할 힘도 없는지 멀거니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라네즈를 향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말이 통하는 인간을 죽이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저만큼 엄청난 마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그를 잡아먹기로 결정했다.

뚝. 매끈한 뺨에서 흐르는 피를 게걸스럽게 흡수한 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간만에 깨어난 그녀의 식욕이 폭발하고 있었다.

-후후훗. 일그러진 표정이 아주 예술이구나.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마렴. 아름다운 나의 품에서 죽는 건 꽤나 행복한 일일 테니까 말이야.

인둑티오는 깔깔깔 웃으며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식물의 가시로 이루어진 이빨은 여린 살 정도는 산산조각 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라네즈는.

“아름답기는 개뿔. 너보다는 내 발가락이 더 아름답겠다. 그리고 냄새나니까 그 입 좀 저리 치워라.”

-?

인둑티오는 당황해서 움직임을 덜컥 멈췄다.

지금쯤이면 환각에 빠져서 저 기사들처럼 헤롱헤롱거리고 있어야 할 텐데 라네즈는 너무나도 멀쩡한 얼굴로 혐오스러움을 내비쳤다.

설마 이 자식.

처음부터 내 능력에 당하지 않은 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인둑티오는 한껏 분노한 얼굴로 외쳤다.

-너 설마 고자….

촤아악—!

-끼야아악!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마나를 두른 검이 인둑티오를 반으로 갈랐다.

라네즈는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피워 대는 인둑티오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내며 버럭. 화를 냈다.

“야, 이…. 나 고자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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