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아르닐이 마법 기사단원들을 모두 동원하여 이런저런 복구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
오르칼은 편하게 앉아 블랙커피 한 잔을 쭉 들이켜고 있었다.
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
그리고 운치 있는 마을의 분위기까지.
누가 보면 휴양지에 놀러 오기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오르칼은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그리고 잠시 뒤.
오르칼은 헐레벌떡 달려오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철컥철컥.
갑옷을 입고도 부리나케 달려오는 데에 아무런 지장도 없는 남자.
황태자의 직속 기사단인, 황실 제3 기사단장의 등장에 오르칼은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민간인들은?”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흐음. 정령은 아직인가?”
“예. 아직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알려오는 기사단장의 보고에 오르칼의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다.
사실 현재 그가 맡은 영지의 크기가 매우 넓기 때문에 고작 서른 명 정도밖에 안 되는 기사들만으로는 놈을 잡는 데에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름 실력자인 그들이 아직 흔적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니.
아무리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해도, 시간이 지체될수록 이쪽에서 좋을 건 하나 없기 때문에 오르칼의 기분이 깊게 가라앉았다.
“보통 봉인에서 풀려난 고대 정령들은 그 힘을 발휘하고 싶어서 주체를 못 한다던데. 우리가 맡은 놈은 아주 특이한 놈인가 보군.”
“죄송합니다….”
“됐다. 탓하려던 것은 아니니까.”
상대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면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놈은 이미 영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있는데도 그가 계속해서 영지를 수색하고 있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참으로 이상하군. 분명 주변에서 무언가가 느껴지는데….’
그랬다. 오르칼은 희미하지만 정령의 기운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듯 옅게나마 느껴지던 정령 특유의 기운은 기사단장이 나타나고 난 뒤부터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설마 고대 정령이 눈앞의 기사단장으로 둔갑했을 리는 없을 테고….
“저… 왜 그러십니까?”
기사단장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주군의 시선에 바짝 긴장해서 물었다.
기사단장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던 오르칼은 불현듯 두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경. 혹시 크아앙 자세라고 아나?”
“크아앙…? 이라니요?”
“모르는 건가? 엘레인이 마법사 대운동회에서 벌였던 깜찍한 퍼포먼스인데.”
“깜찍한 퍼포먼스…. 아! 혹시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르칼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엘레인 덕질 경력이 상당한 기사단장은 앙증맞게 양손을 그러쥔 채 귀엽게(?) 포효했다.
“크아앙! 이거 맞죠?”
“…….”
찡긋.
윙크까지 하는 그의 작태에 오르칼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내가 시킨 거라지만 이건 좀….’
근육질 그 자체인 마흔 살의 사내가 저 포즈를 취하니 깜찍하다기보다는 끔찍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포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이 끔찍하다고 여겨진 정령이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미세하게 뒤틀었기 때문이다.
“역시 그곳에 있었군.”
오르칼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옅게 떨리는 그림자를 향해 뜨거운 커피를 부었다.
“전하?”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기사단장이 의문을 품을 무렵.
-크아악!
느닷없이 커피를 뒤집어쓴 기사단장의 그림자가 비명을 내지르며 옆으로 훌쩍 빠져나왔다.
“저, 저게 뭡니까? 저런 게 왜 제 그림자 속에….”
“우리가 잡아야 할 고대의 정령이다. 특성을 보아 그림자 정령인 것 같군.”
오르칼은 텅 비어버린 커피잔을 도로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기사단장의 그림자에 숨어 따라다니고 있었다니.
취미 한번 고약한 녀석이다.
“이런. 여태 농락당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전하께선 이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림자가 묘하게 두꺼워 보였다.”
“예? 그게 무슨….”
“대충 이 몸의 관찰력이 뛰어난 거라고 말해 두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신을 칭찬한 오르칼은 서서히 형체를 잡아가는 그림자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그림자 주제에 멋들어진 코트와 중절모를 쓰고 있는 형태라니.
상당히 겉멋이 든 정령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봐, 그림자 정령.”
-크읏. 난 그림자 정령 따위가 아니다.
“음? 그럼 뭐지?”
-나는 위대한 어둠의 정령 칼리고…… 아니, 잠깐. 너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듣는 거지?
오르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혼잣말을 하고 있는 오르칼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미루어 보아, 보통 평범한 인간은 정령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
그러다 문득 엘레인이 떠나기 전에 하나씩 나누어주었던 것을 떠올린 오르칼은 피식 웃으며 머리 위에서 퍼질러 자고 있는 미니 운디네를 툭 하고 건드렸다.
-모, 모잉!
“아마 이 녀석 덕분인 것 같군.”
-저건 물의 정령인가? 아니, 그런 것치곤 너무 작은데….
어둠의 정령 칼리고는 버럭 성질을 내고 있는 미니 운디네를 게슴츠레하게 바라보았다.
온통 검은색투성이인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노란빛을 내고 있는 눈이 가늘게 좁혀지자 오르칼은 그런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보통 고대의 정령들은 모두 너처럼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지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갈리지.
“그렇군. 그래서 네놈의 목적은 무엇이지?”
-목적?
“그래. 다른 놈들처럼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죽일 건가?”
-글쎄. 어떻게 할까?
칼리고는 그렇게 질문하며 날카로운 눈을 반달 모양을 접었다.
그 모습에 미간을 와락 찌푸리자, 놈이 대뜸 뒤쪽으로 몸을 훌쩍 물렸다.
-솔직히 살육보다는 인간을 타락시키는 게 더 재미있긴 하지만, 네놈은 쉽게 타락할 것 같지 않군. 정신력이 너무 강하거든.
“흐음. 고대의 정령도 타락시키지 못하는 정신력이라니. 이거 칭찬인가?”
-그런 거로 해두지. 하지만 차라리 타락하는 편이 훨씬 더 좋을걸?
그리 말한 칼리고의 몸에서 천천히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짙고 또 짙어서 질척거리는 어둠은 순식간에 주위를 어둡게 만들었고, 기사단장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도 그것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날카로운 검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조심하십시오. 평범한 안개가 아닙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어때. 할 수 있겠나?”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참으로 신념이 굳은 사내다.
평소 부리는 이들과 다르게 우직한 면이 있는 기사단장은 습격에 대비하여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지금.
“정면!”
앞으로 검을 휘두르자 그림자의 날카로운 손톱과 맞부딪혔다.
키기기긱.
듣기 싫은 쇠 긁는 소리와 함께 한 차례 스파크를 튀긴 그림자는 제법이라는 듯 피식 웃는 소리를 내었다.
-내 공격을 미리 읽은 건가?
“그만한 존재감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그걸 막지 못하면 직함을 내려놓아야지.”
-하긴 그렇군. 그런데….
어둠의 정령 칼리고는 새하얀 손수건으로 제 손톱을 닦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상대가 나 하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크헉!”
퍼어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복부를 맞고 밀려난 기사단장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쿨럭!
죽은 피를 토해낸 기사단장은 흐려지는 초점을 잡으려 애쓰며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둠은 곧 나 자신이다. 어디에든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무기가 될 수 있지.
“설마 저 안개로 공격한 건가?”
-정답이다.
칼리고는 두 눈을 둥글게 휘며 기사단장을 칭찬해주었다.
그래봤자 조롱하는 것 그 이상은 아니기에 기사단장의 인상은 와락 구겨졌지만 말이다.
-아쉽게 됐군. 너의 검은 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은 순순히 항복하라는 말인가?”
-그럴 리가. 지금부터 고통에 몸부림쳐서 나를 즐겁게 만들어다오.
칼리고는 날카로운 손톱을 바로 세우며 척척. 앞으로 다가왔다.
기사단장이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검은 안개가 손으로 변모하여 그의 몸을 단단히 옭아맸다.
“젠장!”
-소용없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고 한들 상급 고대 정령인 나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흠?
칼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곧 죽을 초식동물에 불과하건만, 대체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그에 흥미를 가지고 오르칼을 지켜보고 있던 그때.
휘이잉—!
-이건…. 네놈. 마법사였나?
“아니.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자연적인 바람이 내 안개를 걷어낼 수 있을 리는 없을 텐데?
칼리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윤곽선만 뚜렷할 뿐. 이목구비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나자 칼리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서 이 많은 것들이…?
칼리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개가 걷히고 난 뒤의 주변에는 웬 흉악하게 생긴 인간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보다시피. …그보다 저놈을 포박했으면 좋겠는데.”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포박 말씀이십니까?”
“그래. 묻고 싶은 게 많거든.”
그림자의 물음에 그리 답한 오르칼은 씨익 웃으며 어둠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코트 자락처럼 보이는 곳이 떨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많이 당황한 듯했다.
-서, 설마 저놈들 다 네 부하인 건가?
“그렇다. 그런데 네놈. 실체가 있는 어둠인 것 같은데 혹시 다수전에도 일가견이 있나?”
-어, 없다만….
안개를 이용한다면 백여 명의 인간이 떼거지로 달려들어도 충분히 찢어발길 수 있지만, 눈앞에 모인 인간들은 무려 천여 명이 넘어 보인다.
심지어 이 중에는 그 안개마저도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실력자가 숨어있지 않은가?
“흠. 그런가?”
칼리고는 그런 오르칼의 말에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아까 포박하라고 말한 것도 그렇고.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걸 보면 순순히 살려줄 의향이 있는 모양인데.
잘만 하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 적당히 만져주면 되겠군.”
-뭐, 뭘 만져?
“알겠습니다. 적당히 한두 군데만 부러트리겠습니다.”
-잠깐! 항복한다! 크헉! 아니, 항복한대도!
가볍게 주먹 한 대부터 받아낸 칼리고는 애처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무자비한 명령을 내린 오르칼은 그쪽엔 눈길도 주지 않으며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커피.”
“옙.”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단장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기울여 커피를 탔다.
-크헥!
그리고는 구슬픈 비명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생각했다.
‘왠지 저럴 것 같아서 내 선에서 끝내려고 한 건데….’
기사단장은 비도 오지 않는 화창한 날.
먼지 나듯 얻어맞는 어둠의 정령을 불쌍하게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장면을 경악 섞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무리가 있었으니.
“세상에. 지금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저 악독한 어둠의 정령이 고작 인간들에게 얻어맞고 있다니….”
엘레인의 소식을 듣고 눈썹이 휘날려라 달려온 엘프들은 세상 측은한 눈으로 어둠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혹여나 저 악독한 인간과 눈이 마주칠 새라, 지붕 뒤쪽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엘프들 사이에서 인간 오르칼과 다구리의 무서움이 깊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