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6화 (345/417)

346화

“정말 잘하셨어요. 덕분에 놈을 찾을 시간을 줄일 수 있었어요.”

“무얼요. 세계수를 찾기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소중한 세계수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네? 저에게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엘레인은 제게 고개 숙여 사과하는 엘프 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사과해야 할 자들은 엘프들이지, 인간인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프 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당신께 큰 실수를 한 겁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제발 세계수를 되찾는 데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와, 왕이시여….”

엘프 왕의 지극히 예의 바른 태도에 사프란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던 왕이 인간에게 고개 숙이다니.

물론 엘레인은 다른 인간들과 다르게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만, 왕의 태도는 너무 과했다.

이렇듯 사프란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엘레인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돌루스는 우리 인간들의 적이기도 해요. 마침 신성제국에도 돌루스를 잡기 위해 혈안인 사람이 있으니까 가서 함께 힘을 합쳐 보도록 할게요.”

“염치없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이들을 함께 보내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죄송합니다.”

엘프 왕은 진심으로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미 대다수의 전력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적들을 맞이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인원을 차출하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런 그들의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엘레인은 아쉬운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신성제국에 우리를 도와줄 친구가 있거든요. 두 제국이 힘을 합치면 아무리 주신교의 대주교라고 해도 쓸데없는 짓은 못 할 거예요.”

엘레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자책하는 엘프 왕을 위로했다.

엘프 왕은 그런 엘레인의 따스한 목소리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감격한 얼굴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십시오.”

“이건…. 정령의 힘이 담겨진 잎인가요?”

“예. 적에게 붙여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면 잎이 알아서 안내해줄 테니, 품에서 떼어 놓지 말아주십시오.”

“고마워요. 큰 도움이 되겠어요.”

엘레인은 은은하게 빛나는 나뭇잎을 품 안에 고이 챙겨 두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프란. 일단 황궁으로 데려가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안절부절못하던 사프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재빨리 나뭇잎 배를 만들었다.

“자. 타시죠.”

“실례할게요.”

먼저 탑승한 사프란이 손을 내밀자, 엘레인은 그 손을 꽉 붙잡고 나뭇잎 배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리고 막 출발하려던 순간.

“엘레인 님!”

“네…?”

“부디…. 부디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

휘이잉—.

애처로운 그의 부탁에 엘레인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

높게 비상한 나뭇잎 배는 쏜살같이 바람을 가르며 엘프 숲에서 멀어졌다.

* * *

엘프 왕과 헤어지고 난 후.

엘레인은 사프란의 옷깃을 꽉 잡은 채 생각에 빠졌다.

‘거참 이상하다. 내가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있던가?’

조금 전. 엘프 왕이 보였던 행동과 표정을 떠올린 엘레인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엘프 왕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인데.

엘프 왕은 마치 엘레인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했다.

그것도 아주 소중한 존재에게 하듯이 말이다.

‘생각해 보면 물의 정령왕도 그랬었지. 단순히 정령 친화력이 높아서 그런 건 줄로만 알았는데.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건가?’

이쯤 되니 엘레인은 자신에게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머리털 나고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뭐,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그만큼 엘프 왕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아. 사프란이 혹시 저에 대해 알려줬었어요?”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엘프 왕이요. 돌루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제 이야기도 함께 한 게 아닌가 해서요.”

“물론 하긴 했습니다. 그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황녀님의 활약을 빼놓을 순 없으니까요.”

생각보다 명쾌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제야 엘레인은 엘프 왕이 왜 그렇게까지 극진하게 대접했는지 깨달았다.

“아하. 뭔가 했더니 은인한테 하는 평범한 대우였구나. 엘프들은 원래 은원 관계에 되게 확실하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께서 그렇게까지 극진하게 대하는 인간은 본 적이 없지만…. 우리 엘프들은 은혜를 잊지 않음은 물론이고 은인에게 두 배, 세 배로 갚습니다.”

사프란은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군요.”

“뭐가요?”

“이름 말입니다. 저는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님이라고 설명했지 황녀님의 이름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는데 왕께선 어찌 당신의 이름을 알고 계셨던 걸까요?”

“그게… 정말이에요?”

“예. 워낙 선견지명 하신 분이시긴 하지만. 이런 것도 가능한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당연히 불가능하지.

엘레인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사프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과 단절하고 살아온 엘프가.

혐오하는 인간 제국의 황녀 이름을 알고 있다니?

아무리 선견지명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그건 좀 많이 이상하지 않나?

“사프란도 제 이름 몰랐잖아요. 이엘로도 저랑 만나기 전까지 몰랐었고. 우리가 인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엘프 왕은 만나보지도 않은 제 이름을 어떻게 알죠?”

“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부분은 왕께서 미리 예측한 게 아닐까요?”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건 불가능한 일….”

“아, 도착했습니다.”

그 순간 들려오는 도착 소식에 엘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베네딕트 제국의 수도.

언제나처럼 굳건하게 서 있는 황궁을 바라보면서 엘레인은 복잡한 생각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사프란. 혹시 모르니까 황궁 밖에 내려줄래요? 우리 황궁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나뭇잎 배를 처음 볼 거거든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혹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 말하자 사프란은 순순히 성벽 바깥쪽으로 나뭇잎 배를 몰았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엘레인과 사프란은 안전하게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어요.”

엘레인은 사프란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황궁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그대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사프란이 엘레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사프란? 이엘로한테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정보 전달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전령이 갔을 겁니다. 그리고 정보 공유만 끝나면 바로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을 잡으러 갈 거잖습니까. 동료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제가 절대 빠질 수 없지요.”

복수심에 활활 불타오르는 사프란의 눈빛에 엘레인은 뺨을 긁적였다.

뭐, 그 말 그대로이긴 한데.

인간을 싫어하는 그녀가 다른 엘프들 없이 혼자 황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왜인지 모르게 걱정이 앞섰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야 해요.”

“알겠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일을 보시지요.”

사프란은 절대 사고 치지 않겠다는 듯 두 눈을 결연하게 빛내며 엘레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엘레인은 아주 빠르게 일을 마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사프란은 약속대로 조용히 엘레인의 뒤를 따랐다.

은인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들을 싫어하는 그녀라고 해도 싫은 티 하나 내지 않으며 꿋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사프란 입장에선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헉! 황녀님 오셨어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고요?”

“응. 완전 멀쩡해. 근데 아빠는 어디에 계셔?”

“폐하께선 아마 집무실에 계실 거예요. 그런데 진짜 다친 곳 없는 거 맞죠?”

허둥지둥 달려온 하녀.

베일리가 엘레인의 앞에 딱 달라붙어서 여기저기를 확인했다.

그 지극정성인 모습에 사프란은 침음을 흘리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인간들의 냄새만 맡아도 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사프란이다.

플로스 영지에서는 그 냄새가 심하지 않았지만, 이곳 황궁은 달랐기 때문에 혹여나 기분 나쁜 티를 낼까 싶어서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군. 여기 하녀들은 원래 다 저런가? 보통 아랫사람들은 인간 주군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는데.’

사프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현듯 솟아난 호기심이 인간에 대한 혐오스러움을 살짝 내리눌렀다.

들은 것과 반대로 눈앞의 하녀는 엘레인을 두려워하기는커녕 가족이 다쳐서 돌아온 것처럼 눈에서 걱정이 뚝뚝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한참을 의아해하던 사프란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가. 황녀님이 다정한 주군이라서 아랫사람들도 저렇게 대하는 건가.’

엘레인을 아는 모든 이들이 기립박수를 터트릴 정도로 완벽한 정답이었다.

나름 만족할 만한 답을 도출해 낸 사프란은 두 손을 그러쥔 채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는 베일리를 힐끔대며 엘레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황녀님은 몸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당신은?”

“사프란이라고 해. 이쪽은 베일리. 어쨌든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제대로 통성명하도록 하고. 있다가 또 보자. 알겠지?”

“히잉…. 네.”

귀엽게 훌쩍거리는 베일리를 뒤로 한 엘레인은 사프란을 이끌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걸어가는 내내 시종과 하녀들에게 인사를 받는 엘레인을 바라보면서.

사프란은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모두가 황녀님을 진심으로 동경하고 있군. 아랫사람에게 두루 존경받는 것은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해.’

엘프 왕께서 어째서 엘레인을 극진하게 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마 선견지명 하신 그분께서 미리 엘레인의 선왕 기질을 알아차린 것이겠지.

마음이 깨끗한 자에겐 그만한 대우를 해 주시는 분이니 엘레인의 그런 면모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리 극진하게 대한 듯하다.

그렇게 모든 의문을 해소한 사프란이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

그녀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쿵!

두두두두두—.

‘뭐지? 이 괴상한 소리는?’

평범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청각을 가진 엘프 사프란은 위층에서 들려오는 의문의 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설마 악당이 역으로 습격한 건가 싶어서 바짝 긴장한 채로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갖다 대고 있던 그때.

“엘레이이인!”

“헉. 라네즈 오빠?”

돌진하는 황소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온 라네즈가 엘레인의 앞에 딱 멈춰 섰다.

그리고는 걱정했다는 듯 꼭 껴안는 그의 모습에 사프란은 허리춤으로 가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오빠? 혹시 저 인간이 황녀님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신가?’

사프란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콧물을 킁 들이마시고 있는 남자를 살펴보았다.

황자라고 하기엔 조금 격식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동생을 향한 사랑만큼은 차고도 넘쳐 보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몸이 여러 개라면 내가 다 처리할 텐데…. 우리 엘레인 고생시키기만 하고.”

“으응.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우리 좀 떨어지면 안 될까?”

엘레인은 뒤쪽에 있는 사프란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뒤늦게 사프란의 존재를 인식한 라네즈가 미련 넘치는 얼굴로 천천히 엘레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엘레인에게 떨어지기 전.

“엘레인!”

뻐엉—.

“컥!”

새처럼 날아와 벌처럼 라네즈의 복부에 드롭킥을 날린 아르닐이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그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엘레인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휴.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나보다는 라네즈 오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엘레인은 저 구석에 처박힌 라네즈를 가리키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며 아르닐과 대거리를 하기 시작하는 라네즈.

“아르닐 너… 일부러 그랬지?”

“아니. 난 거기에 형이 있는 줄도 몰랐어.”

“너 성인 되고 나서 복도에서 마법 쓰면서 날아온 적 없잖아! 그럼 일부러 그런 거지 뭐가 아니야?”

“그럼, 엘레인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평범하게 걸어와?”

“평범하게 뛰어오면 되지!”

“형…. 어렸을 때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거 배우지 않았어?”

“야 이!$^%$#^%!”

엘레인은 다 큰 어른이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사프란이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그리고 벙찐 얼굴로 난장판을 바라보고 있던 사프란이 멍하니 질문했다.

“저거… 말리지 않아도 됩니까?”

“네. 걱정하지 마세요. 평범한 형제간의 인사일 뿐이에요.”

“예?”

저게요?

문화 충격 한번 제대로 받은 사프란은 달관한 듯한 엘레인과 열심히 치고받고 있는 두 황자들을 번갈아 보았다.

인간에 대해 적혀 있는 책에서는 분명 서로 손을 맞잡고 악수하는 것이 평범한 인사라고 했는데….

‘역시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건가….’

사프란은 이상한 곳에서 인생 최대의 교훈을 얻으며.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책을 꼭 불태우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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