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자자. 이제 다들 진정 좀 하고.”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엘레인이 직접 나서서 두 사람을 뜯어말렸다.
“손님이 계시는데 둘이서 뭐 하는 거야?”
“앗. 미안해. 곤란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가장 먼저 분란을 일으킨 아르닐이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다 큰 사내가 불쌍한 척 울상을 짓다니.
원래라면 정색하는 반응이 튀어나와야 하지만, 엘레인은 그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토끼 같아….”
어. 내가 소리 내서 말했던가?
엘레인은 당혹스러움에 몸을 흠칫거리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입을 살짝 가리며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 사프란이 보였다.
“뭐? 그거 혹시 나한테 한 소리야?”
그때 아르닐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사프란을 추궁했다.
건장한 성인 남자에게 토끼 같다니.
혹시 놀리는 건가 싶어서 짜증스레 쳐다보자, 사프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치 저희 집에서 키우는 토끼, 스노우 같군요. 나이는 일곱 살로 그쪽과 똑같이 새빨간 눈에 하얀 털을 가졌습니다.”
“하, 하얀 털이라니…. 물론 머리카락은 털이 맞긴 한데….”
엘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아르닐은 살짝 어질어질해졌다.
뭐랄까.
어감이 주는 문제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엘프에게 인간의 잣대를 들이밀 수는 없는지라 아르닐은 뭐라 대꾸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더구나 그냥 엘프도 아니고 엘레인의 손님이니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워. 완전 제대로 봤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 밖에 나가면 코도 새빨개져서, 완전히 눈에 파묻힌 토끼 그 자체라고.”
“…있지, 형. 간만에 몸 좀 풀고 싶은 것 같은데 우리 밖으로 나갈까?”
아르닐은 라네즈의 머리를 콱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졌지만, 사프란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다른 쪽으로 착각했다.
“흠. 아주 우애가 좋군요.”
“어딜 봐서!?”
오늘. 엘레인 덕분에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프란은 꽥 소리를 지르는 라네즈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저쪽이 토끼라면 이쪽은 으르릉 컹컹 열심히 짖어대는 강아지 같았다.
‘특히나 처음 황녀님에게 달려왔을 때는 정말 개 같았었지. 엉덩이 쪽에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흔들었을 거야.’
사프란은 저 혼자 그렇게 생각하며 두 황자들의 첫인상을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싹 사라졌다는 것은 인지하지 못한 채.
“어쨌든 나 지금부터 아빠 보러 갈 건데 오빠들도 같이 갈래? 다 같이 들어놓으면 좋으니까.”
“그야 물론이지. 근데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돌루스에 관한 이야기야.”
엘레인의 입에서 나온 ‘돌루스’라는 이름 세 글자에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싹 사라졌다.
사프란이 당황할 정도로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르닐이 양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그놈이 또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응. 자세한 건 모두 모였을 때 이야기해줄게.”
엘레인의 말에 아르닐과 라네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울 때가 아니었다는 생각과 함께.
두 사람은 군말 없이 엘레인과 사프란의 뒤를 따랐다.
* * *
“그래. 돌루스 그자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세 황자가 모두 모인 집무실.
그곳에서 또 한 번 엘레인이 다친 곳이 있는지 없는지 세세하게 확인을 끝마친 황제는 털썩.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네. 진짜 목적이 꼬리를 말고 도망칠 시간을 벌려는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좀 더 음험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음험한 계획이라….”
듣기만 해도 매우 거슬리는 내용에 황제는 매끈한 눈썹을 크게 들썩거렸다.
아마 그 계획에는 뒤에 있는 저 엘프와도 연관이 있겠지.
꿀꺽.
차가운 눈빛에 사프란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황제는 다시금 엘레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무슨 일을 벌였지?”
“고대의 정령이 날뛰고 있을 때. 숲에 있던 엘프들이 대거 차출되어 도움을 줬잖아요. 엘프들이 많이 빠진 틈을 타서 놈이 습격을 했어요.”
“엘프들의 숲에? 무슨 이유로?”
“그놈들이 어머니 나무를 훔쳐 갔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사프란의 목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엘프들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그들이라지만, 세계수가 얼마나 거대한 나무인지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커다란 나무를 베어 넘기거나 태워버린 것도 아니고.
무려 훔쳐 갔다니?
“그게 사실이야?”
“응. 조금 전에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아니, 그렇게 큰 나무를…. 대체 어떻게 훔쳐 갔는데?”
아르닐의 물음에 엘레인은 엘프 왕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투명한 구슬에 빨려 들어가듯이 넣어서 가져갔다고 들었어.”
“허. 대단한데? 일단 메커니즘은 아공간 주머니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 같은데, 그 거대한 생명체를 어떻게 집어넣은 거지?”
아르닐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순수한 마법사의 호기심으로 접근했다.
당근이나 양파처럼 이미 뿌리에서 나온 것들은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가지만, 나무나 살아있는 토끼처럼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것들은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을 수가 없다.
즉, 엘프들을 엿 먹이고 세계수를 훔쳐 간 돌루스라는 녀석은 보통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야. 넌 그런 상황에서도 마법 이야기냐?”
“그런 상황이니까 더 그러는 거야. 돌루스 그 장본인이든, 아니면 그놈 휘하에 그만큼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긴 한데….”
말 몇 마디로 라네즈를 조용하게 만든 아르닐은 턱을 매만졌다.
그 뛰어난 마법사가 누구이든 간에.
어쨌든 저쪽 전력이 어떠한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쳐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사람이라고도 불리지. 그놈의 영역에 들어가면 무슨 괴상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 쪽에서도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나서야 해.”
“우리들이 직접 나서도?”
“뭐, 우리들 실력이면 괜찮을지도?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야.”
아르닐은 괜히 엘레인을 의식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에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황제는 책상 위를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그럼 내가 가면 더욱 승률이 높아지겠군.”
황제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세 황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물론 소드 마스터인 그가 함께하면 아주 든든하긴 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동안 나라는 누가 지키고?”
“…….”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태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태클을 걸었다.
돌루스가 세계수를 가져가서 무얼 하려는 건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지금으로써는 황제 또한 엘프 왕처럼 제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 답답한 현실에 이맛살을 와락 찌푸린 황제는 곧바로 오르칼을 찾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르칼. 지금 당장 황위를 이어받도록 해라.”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아버지. 저는 아직 황위를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소리로군. 너는 이미 황위를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오. 저는 아직 한참 모자랍니다.”
“아니. 내 눈에는 충분하대도.”
사프란은 서로 황위를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부자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럴 수가.
인간들은 권력에 목숨을 거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 부자는 어째서….
‘아니지. 책의 내용을 믿지 않기로 해 놓고 또 이러는군. 엘프의 잣대로 인간들을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
사프란은 비장한 얼굴로 다시 한번 제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렇듯 뒤에 있는 엘프가 또 다른 착각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지 모르는 황제와 오르칼은 황태후가 직접 중재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둘 다 작작 하거라.”
“예.”
“쯧.”
곧바로 순응하는 오르칼과 달리, 황제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지만 말이다.
‘에휴. 오늘 사프란 앞에서 못 볼 꼴 많이 보여줬네.’
엘레인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사프란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딱히 싫어하는 표정은 아닌데….
그래도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어쨌든 지금은 엘프의 존망이 걸려 있는 문제니까.’
엘프들에겐 한시가 급한 일이기에 엘레인은 곧바로 본론을 말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 지금 바로 신성제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뭐? 거길 네가 왜 간다는 거지?”
예상대로 바로 반발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 역시 반대하는 모양.
돌루스 이야기를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변한 황제의 얼굴에 잠시 흠칫한 엘레인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카르넬에게도 이 이야기를 알려야죠. 서로 협력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상황을 설명하고 신성제국의 병력을 빌려서 돌루스를 제압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엘레인. 그런 건 네가 직접 가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렇지 않아. 이번 협정은 나와 카르넬 둘이서 맺은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직접 가서 이야기하는 게 옳아.”
이의를 제기하던 오르칼은 책임감 넘치는 엘레인의 말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엘레인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엘레인의 숭고한 결정에 찬물을 끼얹을 순 없기 때문에 입 다무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듯 가장 강력한 아군이 묵묵부답을 고수하자 답답한 건 성격 급한 라네즈였다.
“오르칼 형! 형이 여기서 포기하면 어떻게 해?”
“…포기한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해.”
“뭐? 그러면?”
라네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오르칼이 엘레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따라갈 거야.”
“그래? 그럼 나도 따라갈래. 마법사를 상대하려면 같은 마법사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
오르칼의 말에 아르닐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에 라네즈는 황당해하면서도 자기만 쏙 빼놓고 갈까 봐 목청껏 소리쳤다.
“검사도 쓸모 많아!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
엘레인은 그리 말하며 제 손을 꼭 붙잡는 라네즈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었다.
어차피 돌루스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어서 최대한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남의 나라에 강력한 군사들을 우르르 끌고 갔다가는 곧바로 전쟁이 터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은 당연히 기각.
그렇다면 엘레인이 할 수 있는 건 역시 가장 강력한 정예병을 소수로 데려가는 것인데….
“오빠들이라면 당연히 환영이지.”
엘레인은 활짝 웃으며 오르칼과 라네즈. 그리고 아르닐의 동행을 허락했다.
그러자 쌍둥이 황자들은 도리어 놀란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뭐? 그게 정말이야?”
“이럴 수가. 매번 우릴 떼어 놓고 가려고 했던 우리 엘레인이…. 달라졌어!”
아니, 그때는 자꾸 누구 만나는 걸 방해하니까 그런 거지.
엘레인은 무척 감격한 라네즈와 아르닐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평소랑 다르게 지금은 상황이 심각하니까.”
엘레인의 말대로 지금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다.
최악의 사태로 돌루스 외에 주신교를 믿는 모두와 싸울 수도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황제는 정말이지 매우 내키지 않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
황제는 엘레인과 오르칼. 그리고 쌍둥이 황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러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도록.”
“물론입니다. 엘레인은 저희가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르칼은 우리 걱정일랑 말라는 듯이 딱 잘라서 말했다.
그에 황제가 피식 웃자, 라네즈가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글쎄…. 내 생각엔 도망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럼 형이 선두에서 싸우는 걸로 하고. 나랑 엘레인은 뒤에서 편하게 관람하고 있을게.”
“뭐? 너는 왜 뒤에서 노는데?”
“노는 거 아니야. 엘레인을 지키는 거지.”
라네즈는 할 말이 없어져서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기 싸움을 하는 쌍둥이 형제의 모습에 엘레인은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황제와 황태후를 차례대로 바라보며 말하기를.
“그럼 다녀올게요.”
“…몸 조심히 다녀와라.”
“네. 아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고. 알았지?”
“그럼요, 할머니. 얼른 일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두 분 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엘레인은 황제와 황태후를 꼭 껴안아 주었다.
정말이지.
두 분은 너무 걱정이 많아서 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