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황자가 셋이나 모여서 그런 걸까.
어째 성황을 만나러 가는 길도 순탄치가 않았다.
“허억. 저 사람들은 베네딕트 제국의 황자들 아닙니까?”
“무슨…. 우리 신성제국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가장 먼저 황자들의 얼굴을 알아본 관료들의 경악하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자기들 나름대로 소리를 죽이려고 했지만, 워낙에 당혹스런 풍경이라 그런지 당황한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사프란을 두고 와서 다행이네.’
세 황자들의 등장만으로도 이런 반응인데.
만약 여기에 엘프인 사프란까지 데려왔다면 더 뒤집어졌을 것이다.
응접실에 카론과 함께 뒀으니 사프란이 따로 사고를 치지는 않을 터.
엘레인은 그나마 이게 나은 상황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하지만 라네즈는 그리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
“너희들. 뭐, 구경났어?”
“!?”
걸음을 우뚝 멈춘 라네즈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관료들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파도처럼 쏟아지는 기세에 흠칫 놀란 관료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살려 달라는 듯 데룩 눈을 굴리는 모습에.
앞서가던 카르넬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귀한 손님들 앞에서 무슨 추태입니까? 다들 그렇게 한가하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카르넬의 질책에 관료들은 황급히 사과하며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라네즈의 살기에 숨통이 막혀서 죽어버릴지도 몰랐기에.
그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다.
“…죄송합니다. 그들의 무례에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니 뭐. 그쪽이 대신 사과할 것까지야.”
라네즈는 경쟁국의 황태자가 이렇게까지 깍듯이 대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풀어진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러나 아르닐은 아니었는지 인상을 팍 쓰면서 말했다.
“그보다 너희 둘. 왜 이렇게 붙어 있는 거야?”
“예?”
“복도도 넓은데 뭐하러 그렇게 딱 붙어 있냐고.”
아니. 애초에 다른 쪽에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르닐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더니, 엘레인의 소매를 꼭 붙든 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엘레인. 나 섭섭하려고 그래.”
“뭐?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낯선 곳이라서 무섭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 좀 챙겨주면 안 될까? 응?”
“갑자기 왜 어리광을…. 아, 알았어. 같이 가자.”
엘레인은 진짜 어리광이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아르닐을 저지하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렇듯 외간 남자에게서 엘레인을 떼어놓는 데 성공한 아르닐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 카르넬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여기에 네놈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 꿈 깨.’
마치 그런 말을 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 카르넬은 그저 난감한 웃음을 삼킬 뿐이다.
“가족끼리 사이가 매우 좋네요.”
“그런 셈이지. 뭐해? 얼른 안내하지 않고.”
“아…. 목적지라면 이미 도착했습니다.”
카르넬은 멋쩍게 웃으며 정면에 있는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그에 한 방 얻어맞은 얼굴을 한 아르닐은 두 눈을 치켜뜨며 카르넬을 바라보았다.
“너….”
“얼른 들어가시죠. 아버지는 저 안쪽에 계십니다.”
아르닐은 뒷말을 삼키고 카르넬을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이미 목적지가 코앞이었다니.
짜증스레 혀를 찬 아르닐은 엘레인에게서 천천히 떨어졌다.
성황에게 인사하는 자리에 가서까지 엘레인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화, 황태자 전하와 베네딕트 제국의 자제들 드십니다!”
그때 황자들의 얼굴을 알아본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덕분에 성황의 놀란 얼굴을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엘레인은 괜스레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자네…. 아니, 그대들이 어째서 이곳에?”
황녀가 왔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황자들이 왔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성황은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성황 폐하.”
“그, 그래. 나도 반갑네.”
얼떨결에 오르칼의 인사를 받아준 성황은 여전히 당혹스런 얼굴로 황자들을 쳐다보았다.
그에 카르넬이 크흠. 헛기침을 하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성황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이런. 내가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구나. 다들 거기 서 있지 말고 가까이들 오게나.”
성황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일행을 불렀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엘레인은 황자들을 이끌고 성황의 앞에 섰다.
“그래서. 다들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성황의 말에 카르넬과 엘레인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아직 성황은 돌루스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특히나 성황은 돌루스를 무척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성황은 무척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사실이냐? 돌루스… 그자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예. 그는 신성제국은 물론이고 베네딕트 제국과 엘프들의 숲에서도 큰 피해를 끼쳤습니다. 그러니 놈이 더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 전에 재빨리 저지해야 합니다.”
“그런….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이….”
성황은 매우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신성제국에서 돌루스는 성인 그 자체로 알려져 있다.
온갖 선행과 은덕을 베풀며 많은 이들을 고통 속에서 구해준 이가.
알고 보니 악마급 범죄자와 손을 잡고 사람들을 납치 살해한 것도 모자라 다른 곳에서도 큰 피해를 끼치고 있었다니.
워낙 이미지가 좋은 쪽으로 굳어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황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혹시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니더냐?”
“이봐, 성황 폐하. 그 말은 설마 우리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네만….”
라네즈가 발끈하자 성황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성황의 입장에선 그들이 착각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라면 무릇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두어야 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미안하지만 명확한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네. 지금 자네들이 말하는 건 오로지 심증뿐이잖나.”
“하지만 엘프 왕이 직접 돌루스를 봤다는 대도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단순히 사람을 잘못 봤을 수도 있는 거고, 그저 닮은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몇 번을 설득하려 해도 소용없네. 우리 신성제국은 베네딕트 제국과 다르니까. 우리 제국법에 맞게 공정한 절차를 따라야만 하네.”
성황은 계속해서 발을 뺐다.
이럴 때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도 좋을 텐데.
그는 계속해서 신성제국 법을 따라야 한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떡하지? 지금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돌루스는 무언가 작당을 꾸미고 있을 텐데….’
엘레인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이렇게 위급할 때에 성황이 자꾸만 답답하게 구니 고구마를 몇 개나 집어먹은 것처럼 속이 꽉 막혀왔다.
‘어쩌면 최악의 수단으로 우리끼리라도 돌루스를 저지해야 할 수도….’
엘레인은 낙담한 얼굴로 성황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때.
엘레인의 옆에 서 있던 오르칼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저와 협약을 하나 하도록 하죠.”
“협약?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희의 말이 틀렸을 경우. 그러니까 만약 신성제국이 교단과 척을 지게 된다면 우리 베네딕트 제국이 전력으로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겠다는 겁니다. 이래 봬도 우리들. 서로 동맹국 사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든든하겠네만…. 그런 걸 맺으려면 황제가 직접 와야 하지 않겠나? 적어도 황제의 인장을 찍어야….”
“이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성황은 오르칼이 꺼낸 인장을 보고 두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차기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황제의 인장을 가지고 왔을 줄이야.
놀란 마음에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니 오르칼이 빙긋 웃었다.
“황제 대리로서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돌루스 대주교를 구속하는 데에 힘을 보태주시겠습니까?”
오르칼의 말에. 성황은 물론이고 엘레인과 다른 황자들까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형.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성황과의 알현을 끝낸 후.
응접실로 돌아가는 길에 라네즈가 질문했다.
마찬가지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엘레인의 모습에 빙그레 미소 지은 오르칼은 라네즈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었다.
“성황의 말대로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높은 확률로 망설일 것을 예상해서 미리 아버지에게 인장을 빌려왔지.”
“그 말은 아버지도 이 일을 알고 계신단 말이야? 알면서 그걸 허락했고?”
“그래. 맞아.”
오르칼의 말에 라네즈와 아르닐은 경악했다.
신성제국과 동맹을 맺은 것을 항상 후회하던 사람이 황제였는데.
이번에는 그 스스로가 새로운 동맹 협약을 맺기로 결정하다니?
“뭐. 그만큼 우리 엘레인을 생각한다는 거니까.”
“응? 나?”
엘레인은 갑자기 저를 지목하는 오르칼의 말에 흠칫 놀랐다.
오르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엘레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우리 엘레인이 기껏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 신성제국까지 갔는데 퇴짜를 맞고 돌아오면 마음 아프니까.”
“아….”
엘레인은 저를 생각해주는 황제와 오르칼의 마음에 가슴이 다 뭉클해졌다.
그에 감동 받은 얼굴로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자니, 옆에서 라네즈가 툴툴거렸다.
“치밀하다, 치밀해. 이런 식으로 또 엘레인한테 점수 따가네.”
“정 부러우면 형도 그렇게 하던가.”
“나는 육체파라서 그런 건 힘들거든? 그리고 나 별로 안 부러워. 이제부터는 내가 활약할 때니까 말이야.”
“하긴. 지금부턴 우리들이 힘을 쓸 차례이긴 하지.”
라네즈와 아르닐이 서로 주먹을 꽉 쥐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스산한지 누가 보면 이쪽이 악당인 줄 착각하겠다.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 카르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이제 바로 출발해도 되는 거야?”
“응. 아버지께서 모든 병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니, 훨씬 안전하게 돌루스를 잡을 수 있을 거야.”
카르넬의 말에 엘레인은 안도했다.
사실 돌루스를 제대로 제압하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그들에겐 어마어마한 숫자의 신도들과 사제들.
그리고 충직한 성기사가 있으며 몇 명인지 모를 세뇌된 집단도 존재했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빌어먹게도 돌루스는 만신전의 리더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만신전에 속한 다른 교단 또한 완전히 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물론 태양신교와 풍요신교는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곳이지만….
어쨌든 항상 최악의 수를 생각하고 움직여야 하므로 만전을 기해야 했다.
“카르넬. 돌루스는 평소 어디에 있어?”
“보통은 신전에 있지만, 만신전으로도 자주 외출하는 걸로 알고 있어. 하지만 네 말 대로라면 본인이 마법사이거나 동료 중에 뛰어난 마법사가 있다는 건데….”
“감시자의 눈을 피해서 텔레포트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거네.”
“그럴 확률이 높지.”
엘프 왕이 준 잎사귀는 돌루스와 어느 정도 근접한 곳에 가야 효력을 발휘한다.
결국, 신전과 만신전 둘 중 한 군데를 고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엘레인의 고민은 깊어졌다.
뭐,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부대로 나누어서 급습하는 거지만 말이다.
“어쩌지? 우선 만신전에 갈 사람부터 정해볼까?”
“흐음. 나는 엘레인이랑 같이 가고 싶은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아 참. 라네즈 형은 어차피 싸우는 걸 더 좋아하니까 혼자 가도 상관없지 않아?”
“뭐? 내가 아무리 싸움을 좋아해도 그렇지 엘레인이랑 같이 있는 것만큼은 아니거든!”
“하지만 형은 어차피 근거리 공격 타입이라서 바로 옆에서 엘레인을 못 지킬 거 아니야.”
“무, 무슨 소리야? 검에 마나를 주입하면 원거리 공격도 충분히 가능한데?”
“참 나. 그러면 빙글빙글 돌면서 싸우게? 그러다가 누가 텔레포트로 접근해서 공격하면 어쩌려고?”
“너…. 그렇게 다재다능하면 네가 혼자 가든가!”
“아니, 난 엘레인을 지켜야 한다니까?”
라네즈와 아르닐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쌍둥이 형제의 싸움을 처음 목도한 카르넬은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 안 말려도 돼?”
“…응. 괜찮아. 저러다 다시 친해져.”
엘레인은 결국 카르넬 앞에서도 싸우는 쌍둥이 형제를 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창피하지만 어쩌겠나.
저들이 내 오빠들인 것을.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다음 거취를 정하려던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뭐, 뭐야?”
지진이라도 난 듯.
갑자기 땅이 울리는 느낌에 라네즈와 아르닐은 곧장 싸움을 멈췄다.
그리고 천지개벽하는 굉음 속에서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야…?”
신성제국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그리고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푸르른 잎사귀까지.
“저건… 설마 세계수?”
엘프의 숲에서 사라졌던 세계수가.
신성제국 한가운데에 다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