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실드!”
새까만 가오리들이 직격하기 직전.
두꺼운 실드를 만들어 사프란과 제 몸을 보호한 아르닐은 곧 이어질 충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잠시 뒤.
놈들의 몸이 실드와 직격했을 때 아르닐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콰드드득—.
“뭐야. 별로 강하지도 않잖아?”
소리가 꽤 살벌하긴 하지만, 놈들은 아르닐의 실드를 제대로 깨부수지 못했다.
저 많은 녀석들이 열심히 때려봤자 금이 조금 가는 정도.
그마저도 아르닐이 겹겹이 실드를 사용하는 것으로 절대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완성됐다.
“나 참. 별것 아닌 걸로 괜히 긴장했네.”
무언가 압도되는 광경에 잠시 긴장했던 아르닐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왠지 대단해 보이는 기술과 다르게 실상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니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사프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여전히 바짝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조심하십시오. 폭주 정령의 힘은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뭔가 다른 거라도 있다는 거야?”
“우선 전해져 오는 문헌에 따르면 폭주 정령이 지나간 자리는 땅거죽이 다 뒤집혀 지형지물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했습니다.”
“뭐, 저 덩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법도 하지. 하지만 그건 저놈의 공격을 모두 피하면 되는 일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습니다. 곳곳에 마치 무언가가 터져나간 듯한 흔적이 발견되었거든요.”
“터져나가?”
“예. 저 덩치로 난리 쳤다고 보기에는 조금 작은 흔적이었습니다.”
“흐음….”
사프란의 말에 아르닐은 턱을 매만졌다.
저 덩치가 난장판을 피우면 집이든 뭐든 단숨에 터져나갈 법도 하지만, 규모가 작았다면 말이 달라진다.
혹시 저 가오리들이 무언가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의심하며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던 순간.
가오리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얘들 갑자기 왜 저래?”
“글쎄요….”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가오리들은 조금 전 미친 듯이 공격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아르닐이 만든 실드 주변을 빈틈없이 휘감는 그런 형태로 말이다.
“잠깐. 이러면 시야가 가려지잖아!”
당황한 아르닐은 인상을 찌푸리며 새로운 마법을 시전했다.
윈드 레이크라는 마법으로, 바람이 갈퀴처럼 주위에 있는 것들을 긁어서 치워버리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뭐야, 이 녀석들.”
운 좋게 마법을 피해낸 가오리 몇 마리가 실드에 착 달라붙었다.
그러자 눈처럼 보이는 비공과 히죽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입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놈들. 시야를 가려서 본체가 공격하게 만들려는 모양인데….”
아르닐은 피식 웃으면서 실드 위로 날카로운 눈을 소환해냈다.
마법명은 위저드 아이로, 멀리 있는 적을 아무런 방해 없이 확인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음? 왜 움직이지 않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폭주 정령은 먼 거리에 둥둥 떠 있는 채로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무언갈 알아챈 사프란이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놈들의 몸이 이상합니다!”
“뭐?”
아르닐의 시선이 빙그레 웃고 있는 가오리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점차 몸이 달아오르는 듯 선분홍색에서 새빨간 색으로 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아니지?”
“아르닐 님!”
당혹감을 담은 웃음을 흘리고 있던 그때.
사프란이 아르닐의 어깨를 꽉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퍼어어엉—!
쨍그랑!
엄청난 폭발과 함께 어지간한 충격을 모두 방어하는 아르닐의 실드가 와장창 깨어져 나갔다.
미리 몸을 뺀 덕분에 다행히 큰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폭발의 여파가 워낙 강했던 탓일까?
두 사람은 한참을 뒤로 데굴데굴 굴러가서야 비로소 멈춰 설 수 있었다.
“으윽. 머리야….”
“아르닐 님? 괜찮으십니까?”
“으응. 몸은 좀 쑤시지만, 덕분에 살았…. 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리 말한 아르닐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우뚝. 모든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순간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맞닿을 거리에 있는 오똑한 코.
코앞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듯 팔랑거리는 풍성한 속눈썹.
그리고 푸르른 숲을 담은 듯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맑은 눈동자까지.
이렇듯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사프란을 마주한 아르닐은 얼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반면 아르닐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마치 그를 덮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프란은….
“헉! 죄송합니다!”
뒤늦게 제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여전히 단단한 감촉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을 재빨리 뒤로 감춘 채.
사프란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르닐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나. 내가 지금 무슨 짓을…!
아니, 그것보다.
대체 왜 이제야 눈치챈 거지?
사프란은 혼란스러웠다.
원래라면 인간의 냄새만 맡아도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그녀였다.
하지만 대담하게 인간 남자와 접촉을 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인간 혐오증이 고쳐졌을 리는 없을 텐데?’
엘프라면 모두들 앓고 있는 혐오증.
그것이 그냥 사라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이 부끄럽고 이상하게 간질거리는 느낌은 뭐란 말인가?
사프란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또 한 사람.
아르닐은 발갛게 물든 얼굴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아르닐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라도 통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대체 뭐냐고….”
아르닐은 조금 전 보았던 사프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얼굴을 바로 코앞에서 마주했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손가락 끝에 자그마한 힘조차도 제대로 줄 수 없었다.
엘레인과 있었을 때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괴상한 현상이란 말인가?
“…!”
“!?”
그 순간 두 눈이 마주친 사프란과 아르닐은 동시에 고개를 휙 돌렸다.
어쩐지 얼굴에서 열이 오르고 손발이 간질거리는 느낌.
이렇듯 난생처음 겪어보는 현상에 다들 곤란해하고 있던 그때였다.
-우우우우! 끼융!
“저 녀석….”
아르닐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멀리서 꼴 좋다는 듯 비웃고 있는 폭주 정령을 보고 있노라니 짙은 분노가 차올랐다.
“이제 보니 문헌에 나왔던 그 흔적은 저 가오리가 폭발하면서 나타난 흔적이었군요.”
사프란도 놈이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린 채 다가왔다.
아르닐은 그녀의 말에 깊이 동의하며 느릿하게 뒷목을 주물렀다.
“저놈을 어떻게 요리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이를 뿌득 가는 그에게선 살기가 줄줄 흘러넘쳤다.
그에 사프란은 시퍼런 검날을 슬쩍 확인하면서 답했다.
“적어도 곱게 죽이지는 말아야지요.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저 가오리들이 방해되는군요.”
사프란의 말이 맞았다.
물량도 엄청나고 돌격 위력도 준수하며 하물며 적군에게 착 달라붙어서 폭발까지 해대는 가오리들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엔 당황해서 1차적으로 방어만 했지만 말이야.”
아르닐이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가오리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프리즌 큐브.”
-캬오?
어마어마한 연쇄 폭발 이후 몸을 추스르고 있던 가오리들의 주변에 무지갯빛 영롱한 장막이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뒤.
곧이어 그것은 완벽한 입방체가 되어서 그들을 가두는 단단한 감옥이 되어주었다.
“뭐. 이런 것도 가능해.”
참 쉽죠?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그의 미소에 사프란은 얼떨떨한 얼굴로 무지갯빛 큐브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판인지, 당황한 가오리들이 빠져나가기 위해 열심히 몸을 부딪쳐도 완벽한 입방체는 실금 하나 나지 않았다.
“대단하군요. 놈들이 꼼짝 못 하고 있어요.”
“훗. 앞으로 한 시간은 거뜬해.”
사프란의 칭찬에 아르닐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그에 사프란은 두 눈을 초롱초롱거리면서 물었다.
“혹시 하나 더 만들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 내 사정거리권에 들어오기만 하면 똑같은 감옥을 선사해줄 수 있어.”
“희소식이로군요.”
아르닐과 사프란은 동시에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불길한 미소에 폭주 정령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끼, 끼융. 끼우우우!
놈이 가오리들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녀석의 도주를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실프.”
“플라이.”
각각 정령의 힘과 마법의 힘을 빌린 두 사람이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마치 마법 포탄처럼 빠른 속도였으나 폭주 정령과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쯧. 쓸데없이 빠르기는….”
“제가 먼저 가서 경로를 방해하겠습니다.”
“어?”
사프란은 아르닐에게 그리 통보하고는 더욱더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뒤처진 아르닐은 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되게 쿨하네.”
아르닐은 멍하니 중얼거리다 말고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앞을 보니 벌써 사프란은 폭주 고래를 거의 따라잡은 상태.
아르닐은 몸에 마나를 더욱 두르며 날아가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만 포기해라!”
한편 사프란은 실프를 이용하여 폭주 고래의 앞에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그에 잠시 흠칫한 폭주 고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돌려 바닥을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이런…!”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해.”
“앗?”
놈이 잠시 멈칫한 그 짧은 틈에 빠르게 거리를 좁힌 아르닐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막 바닥을 뚫기 위해 있는 힘껏 머리를 갖다 박은 녀석은.
꾸웅—!
-꾸, 끄우어엉!
“…….”
“…….”
“뭐야. 얘 설마 기절한 거야?”
“…저런.”
아르닐과 사프란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폭주 정령을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로 어처구니가 없는 게 이 녀석.
단순 기절을 넘어서 소멸하고 있었다.
“참 나. 죽을힘을 다해 달려와서 마법을 시전했더니만, 제힘에 자기가 죽는 꼴이라니.”
“아르닐 님의 마법에 맞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겠지요. 그만큼 이 마법이 대단하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야 그렇지만….”
사프란의 칭찬에 아르닐은 괜히 볼을 붉히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쩐지 조금 맥이 빠지는 결과였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아서 좋기는 했다.
“그럼. 이제 이곳을 빠져나갈 일만 남았군요.”
“…뭐, 그렇지.”
사프란이 슬쩍 다가서며 말하자 아르닐은 괜스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했었지? 너는 둘 중 어떤 방법으로 나갔으면 좋겠어?”
“저는….”
사프란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힐끔. 아르닐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 공간의 끝을 찾는 편이 더 쉬울 겁니다. 한쪽 방향으로 그냥 나아가면 되니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아르닐은 괜히 사프란을 의식하며 앞장섰다.
사프란은 그런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다시 묘하게 간질거리는 심장 부근을 문질렀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며 걸어가는 기묘한 동행.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