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한편 정령이 만든 공간 밖에서는.
“크윽. 도대체 왜 안 깨지는 거지?”
신성제국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 만신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황궁 성기사들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검을 휘둘렀다.
갑자기 눈이 멀 것 같은 섬광과 함께 등장한 대주교들과 교단의 성기사들.
그리고 느닷없이 생겨난 저 검은 돔 형태의 막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은 황태자 전하의 부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누가 봐도 저 검은 막 안에 황태자 전하께서 갇혀 있을 게 뻔한 상황.
그에 황궁 성기사들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검을 내리그어도 이 단단한 막에는 작은 스크래치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암담한 상황은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떨어져 나오게 된 카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아앙—!
“…젠장.”
살짝 닿기만 해도 살을 헤집고 찢어발기는 검기가 저 불길할 정도로 검은 막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 변하지 않는 사실에, 수백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한 카론은 진물이 터지도록 칼자루를 꽉 쥐었다.
“진정해라.”
그때 누군가가 카론의 어깨를 잡았다.
동시에 황녀님의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 등으로 정신을 좀먹어가던 상념이 뚝 하고 멈췄다.
카론은 좁아졌던 시야가 확 트이는 것을 느끼며 무의미한 상념 속에서 꺼내준 장본인을 돌아보았다.
“…1황자 전하?”
카론의 어깨를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1황자 오르칼 베네딕트였다.
그는 카론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직까지 검은 막을 두드리는 황궁 성기사들에게 냉정한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소용없다.”
“!?”
차갑디차가운 말에 정신없이 날아들던 검이 우뚝 멈춰 섰다.
황궁 성기사.
그들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단장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 오르칼을 노려보았다.
“1황자….”
마음만 같아서는 나약한 말 따위를 내뱉는 그를 질타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베네딕트 제국의 1황자다.
비록 언제 깨질지 모를 위태로운 관계이지만, 어쨌든 동맹국의 황자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십시오.”
성기사 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높이 들어 올렸을 때.
“백성들은 나 몰라라 할 생각인가?”
“뭐?”
“주위를 한 번 둘러봐라.”
우뚝. 내리치던 검을 멈춰 세운 단장은 이번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주변엔 아직도 사람들의 비명이 난무하고 있었다.
아직 다 처리되지 못한 고대의 정령들이 내 세상인 것처럼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황태자냐, 신성제국의 국민들이냐.
마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듯한 그의 말에 쉽사리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오르칼은 차마 목숨의 가치를 재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성기사 단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만약 황태자라면 의미 없는 곳에 힘을 빼기보단 밖의 백성들을 먼저 구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건….”
무어라 반박하려던 성기사 단장은 오르칼의 진중한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분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황태자님이시라면 그의 말대로 백성들을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을 테니까 말이다.
“단장님….”
동료 성기사가 그를 불렀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
모두가 그를 바라보며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 잘 알고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님을 그도 이젠 알았다.
오르칼의 말대로 지금은 당장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였다.
성기사 단장은 잠시 미련이 뚝뚝 넘쳐흐르는 눈으로 검은색 돔을 한번 노려보고는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냉정하게 전장을 살펴보며 말했다.
“저 많은 놈들을 처리하려면 우리들의 힘만으로 부족하겠군.”
신성제국의 수도는 매우 넓다.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열이 넘는데 곳곳에 얼마나 많은 놈들이 진을 치고 있을지 감히 예상하기 어렵다.
하물며 고대의 정령이 신성제국 수도에만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즉, 증원이 꼭 필요한 상황.
가장 좋은 건 각 신전의 성기사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만, 그들은 자기 신전을 지키느라 바쁠 것이다.
뒤쪽에 있는 신전의 성기사들 또한 대주교들을 지키는 걸 더욱 우선시할 터.
그러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테이먼. 네가 가장 발이 빠르니 황궁에 가서 증원을 요청해라. 남은 이들은 증원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틴다.”
단장의 말에 다른 성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급하게 나오느라 황태자 직속 성기사단만 출발했지만, 지금쯤 제랄 님의 명령 하에 다른 성기사단도 준비를 끝마쳤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늦더라도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원하는 증원을 받을 수 있을 터.
하지만 그의 명령에 따라 테이먼이라는 성기사가 달려가기 전.
오르칼이 먼저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무슨 소립니까?”
“너희는 동쪽을 맡아라. 나머지는 내가 맡지.”
다짜고짜 그리 말하는 1황자의 모습에 성기사들의 이맛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다른 나라의 황자가 수도의 절반 이상을 맡기라고 하는 것도 어이가 없지만.
저 혼자서 대체 뭘 어쩌겠다고 저리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읽어낸 것일까. 오르칼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설마 나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
성기사는 설마 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오르칼의 옆에는 황녀의 직속 호위 기사인 카론만이 존재했고 주변에는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1황자는 허언증이 있는 건가?
저도 모르게 불경한 생각을 하던 그 순간.
“!?”
성기사 단장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곳에 새카만 옷을 입은 자들이 떡하니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치 땅에서 쑥 솟아나듯이 말이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심지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마법인가 싶어서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지만, 그랬다면 마나의 파동이 먼저 느껴졌겠지.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진다.
마법도 아니라면 그가 상정할 수 있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저들은 우리들의 실력을 훨씬 상회하는 자들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곳에 있는 성기사들의 목을 순식간에 떨어트릴 수 있는 실력자들.
그 어마어마한 차이에 몸을 딱딱하게 굳힌 성기사 단장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진 얼굴을 돌려 1황자를 쳐다보았다.
‘어디에 저 많은 병력이 숨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순 없겠지.’
성황께선 이미 그들의 참전을 허락했다.
하물며 적극적으로 돕기로 새로운 동맹 계약서까지 맺은 마당에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적할 건 똑바로 지적해야 했다.
“준비성이 철저하시군요. 하지만 그래도 그 인원으로 세 방위를 모두 맡는 건 어렵습니다. 저들은 우리 성기사들보다 숫자가 작지 않습니까.”
1황자 측 병력은 고작 스무 명.
그에 반해 이쪽은 서른 명 남짓한 인원이 존재했다.
아무리 저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 드넓은 수도를 모두 커버할 순 없을 것이다.
“이들은 북쪽을 맡을 거다.”
“예? 그럼 서쪽과 남쪽을 맡을 자들이 따로 존재하는 겁니까?”
성기사 단장은 새까만 옷을 입은 자들이 또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기 위해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오르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보여줘도 상관없겠지.”
그리 말한 오르칼은 오른쪽 손을 들어서 마나를 주입했다.
뜬금없는 그의 행동에 모두들 의문을 가지기도 잠시.
곧이어 아무것도 없는 그의 손등에 검은색 문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슨…?”
성기사 단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1황자의 손등.
정확히는 검은 문양에서 폭발적으로 뻗어져 나온 검은 기류가 무언가 괴상한 형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괴상한 형상이 완전히 만들어졌을 무렵.
사람들은 두 눈을 의심했다.
“저게… 대체 뭐지?”
검은 모자에 기다란 코트를 두르고 있는 성인 남성의 실루엣.
그 어두침침하면서도 묘하게 시원한 쿨내가 진하게 풍기는 괴생명체는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왼손에는 걸레를.
그리고 앞에는 분홍색 깜찍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뭐지? 이 묘하게 가정적이면서도 괴이하게 생긴 녀석은!?’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 괴상한 게 튀어나왔다!
모두가 그 생명체를 보고 그런 첫인상을 받았을 무렵.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던 어둠의 정령. 칼리고가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싸그리 청소해 보이겠습니다악!
칼리고는 강제 소환당한 줄도 모르고 목청껏 소리쳤다.
그리고 계속되는 침묵에 은근슬쩍 고개를 든 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여기는…?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박을 받고 있던 카르텔 길드가 아니었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쪽을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는 상황.
괜스레 머쓱해진 칼리고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소환해 낸 오르칼을 바라보았다.
-그….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그리 말한 칼리고는 힐끔힐끔. 오르칼의 눈치를 봤다.
며칠 전 신나게 얻어맞은 뒤로 그는 지고한 어둠의 정령에서 오르칼의 막내 수하로 새로 태어났다.
아, 물론 진짜로 새로 태어났다는 건 아니고 단순히 비유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뭐, 그 누구보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던 그가 오르칼의 앞에서는 바로 수그리고 다니고 있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터다.
하지만 그런 굴욕적인 상황에서도 그의 입에서는 자꾸만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는데….
‘적어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궁상맞게 걸레질을 하는 것보단 저자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게 훨씬 낫겠지.’
칼리고는 제 속내를 숨기고는 오르칼을 향해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오르칼은 그런 녀석을 아무 표정 없이 바라보고는 그가 할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은 고대의 정령들을 처리하는 거다.”
-아하. 어쩐지 주위가 좀 시끄럽다고 했습니다. 저런 저급한 녀석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 맡겨만 주십시오!
깜찍한 앞치마를 맨 어둠의 정령 칼리고가 걸레를 꽉 쥐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고 있던 성기사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저놈은 대체 정체가 뭐야? 저런 걸 수하로 거느리는 1황자는 또 뭐고?’
성기사 단장은 정체 모를 생명체에게 무어라 명령하는 오르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뿔이나 날개가 달리지 않은 걸 보면 악마를 소환한 건 아닌데….
그래서 저 괴상한 생명체는 왜 소환한 거지?
서쪽과 남쪽을 담당할 만한 병력이 부족한 건 여전한데 말이다.
-흐흐. 오랜만에 스트레스 좀 제대로 풀겠군.
그때 모든 설명을 들은 칼리고가 우드득. 살벌하게 목을 풀며 앞으로 나섰다.
이어서 대뜸 머리 위로 손바닥 쫙 펼치기 시작하자 곧이어 그곳에서 순수한 어둠이 무수히 뻗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건 또 뭔….”
그리고 성기사 단장은 어째서 오르칼이 그리 자신만만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둠이 쓸고 지나간 곳.
그곳에 꾸물꾸물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칼리고와 똑같이 생긴 실루엣 수백여 명이었다.
칼리고는 도로와 지붕, 그리고 나무 등.
사방에서 나타난 제 분신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그들아. 일하러 가 보자.
-와아아!
칼리고가 분위기를 잡고 목소리를 낮게 깔자 그의 분신들이 우레와도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우르르 달려가 동쪽과 서쪽으로 쫘악 갈라지는 거대한 군단.
오르칼은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상한 걸 배웠군.”
“나중에 가서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되었다. 그런 것보다 너희들도 얼른 가 보도록.”
“존명.”
오르칼의 명령에 그와 가장 가까운 심복 하나를 제외하고 남은 이들이 모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일련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황궁 성기사들은 생각했다.
베네딕트 제국 1황자.
그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다고.
적어도 그는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될 남자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