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6화 (355/417)

356화

“얼른 안 가고 뭐 하고 있지?”

저력을 알 수 없는 1황자.

그에 대한 생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던 그때 오르칼이 턱 끝을 까딱거렸다.

정확히 동쪽을 향해있는 그의 턱짓에 흠칫 몸을 떤 성기사 단장은 더 잴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얼른 출발한다!”

“예!”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타국의 황자가 이렇게까지 도와주는데 정작 본국의 성기사들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그리고 신속하게 괴물들을 처리하고 제국민들을 구해낼 것을 결심한 성기사 단장은 곧바로 성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했다.

“흠. 기세는 꽤 괜찮군.”

성기사 군단은 동쪽으로 진군하며 눈앞에 보이는 고대의 정령들을 하나둘씩 격파하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도움을 받은 제국민들이 감사의 인사도 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뒤로 물러날 정도.

이렇듯 동쪽으로 나아간 성기사들이 시야에서 모두 사라졌을 때.

오르칼은 야훔과 디비아를 돌아보았다.

“대주교님들. 괜찮으시면 다친 이들을 좀 보살펴주시겠습니까?”

“후후. 원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니 그리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신전에 있는 다른 아이들도 나서서 제국민들을 치료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수도에 있는 이들은 저희가 책임지고 살펴보도록 하죠.”

이미 서로 간의 이야기가 됐는지 다른 대주교들과 교단의 성기사들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직한 그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오르칼은 네 팀으로 나누어 흩어지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

그때 침울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오르칼이 옆을 바라보자 예상대로 잔뜩 풀이 죽어 있는 카론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무얼 하면 될까요?”

“그에 대해 답하기 전에 한 가지 묻고 싶군. 너는 이 거대한 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느닷없는 오르칼의 질문에 카론은 고개를 돌려 새카만 돔을 바라보았다.

돔의 크기는 꽤 컸는데 그래도 일대를 덮은 거대한 세계수를 모두 삼킬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계수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혹시… 이 안에 새로운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 겁니까?”

“역시 내 동생을 지키는 호위 기사답군. 정답이다.”

오르칼의 칭찬에 카론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조금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오르칼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무엇입니까?”

“일전에 엘프 사절단에게서 받은 대가다. 신성제국에 봉인된 고대의 정령에 대한 정보가 일부 적혀있지.”

“예? 베네딕트 제국 외에 다른 곳의 정보도 받아낸 겁니까?”

“뭐, 기본이다.”

오르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두루마리를 풀었다.

그리고 그는 어딘가 낯익은 생명체가 그려져 있는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간의 정령. 여러 개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으며 상대방을 가둘 수 있다. 이 특별한 공간은 밖에서 그 어떠한 충격을 주어도 절대 깨지 못하며 안쪽에 갇힌 자들이 스스로 깨야만 벗어날 수 있다고 하지.”

“그 말씀은 황녀님이 저 공간을 깨고 나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거로군요.”

카론의 어깨가 축 처졌다.

황녀님을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안에 있는 놈이 워낙 흉악한 인물이니만큼 많은 걱정이 드는 것이다.

“실망하긴 이르다. 어디까지나 ‘공간’을 깰 수 없다는 거지, 저것을 없애는 방법은 존재한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카론의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오르칼은 의지를 불태우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새까만 돔의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것.”

-큐우?

돔 꼭대기에 숨어 있다가 딱 걸린 공간의 정령이 깜짝 놀라서 몸을 뒤로 물렸다.

카론이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녀석을 노려보고 있자, 서늘한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저것을 없애면 이 공간을 없앨 수 있다.”

“!?”

카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리고 그는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저것만 없애면 황녀님을 구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때.

그의 곁으로 오르칼의 충실한 개.

그림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다.”

그림자를 앞세운 오르칼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공간의 정령 사냥. 그 후 엘레인을 지키는 거다.”

기다렸던 그의 말에.

카론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 * *

한편 그들이 그토록 찾는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웬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여긴 또 어디야?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고?”

문제는 카르넬 이외에 다른 이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

엘레인이 당황해서 주위를 휙휙 둘러보자, 카르넬이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아무래도 공간의 정령이 만든 공간에 들어온 것 같아.”

“…여기가 정령이 만든 공간이라고?”

엘레인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숲을 바라보았다.

새소리가 가득한 울창한 숲.

엘레인이 느끼기에 이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풀 내음은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이 공간 어딘가에 있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딱히 멀리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간의 정령이 만든 곳에 엘레인과 카르넬이 들어왔다면, 다른 이들 또한 함께 휘말렸을 텐데 그건 아니라니.

그럼 그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 묻는 듯한 모습에 카르넬은 제가 본 것을 천천히 떠올렸다.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 1황자 전하와 그 뒤에 있던 대주교 일행들을 멀리 밀어내는 걸 봤어. 그리고 어둠이 단단한 막을 형성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지금 이 공간이 펼쳐져 있었지.”

“…그게 정말이야?”

카르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주쳐오는 진중한 그의 눈빛에, 엘레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이런 이상한 곳에 휘말려 봤자 좋을 건 하나 없으니까. 그런데 오르칼 오빠랑 대주교 일행만 밀려난 거라면 그 이외의 사람들은 지금 이 공간에 같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거네?”

“글쎄…. 다른 이들은 몰라도. 돌루스 그 작자가 함께 들어온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네.”

그리 말한 카르넬은 조용히 숲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엘레인은 거대한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계수….”

엘레인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돌루스는 세계수와 딱 달라붙어 있었으니.

카르넬의 말대로 그 역시 이 공간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가면 돌루스를 만날 수 있겠네. 마침 이정표도 있으니까 바로 이동하자.”

“다른 사람들을 먼저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이라고 해 봤자 쌍둥이 오빠나 사프란. 카론 정도인데…. 다들 똑똑하니까 굳이 찾지 않아도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카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들은 실력도 출중하니 울창한 숲을 헤쳐나가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그럼 바로 출발하자. 혹시 위험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내 옆에서 너무 떨어지지 말고.”

“어? 으응….”

엘레인은 우물쭈물 카르넬의 옆에 다가섰다.

그리고는 양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생각해보니 나 지금, 카르넬이랑 단둘이 있잖아?’

-무우!

(나도 잊지 말라고!)

아. 물론 운디네도 함께 있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둘이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에 딱 좋았다.

즉, 지금 당장 카르넬이 지난 고백에 대한 답을 달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큰일이네. 대답은 나중에 듣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지금일 수도 있는 거잖아.’

엘레인은 카르넬을 힐끔대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아직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머릿속이 다 복잡했다.

그렇게 얼마나 고민하고 있었을까.

“엘레인.”

“어! 왜, 왜 그래?”

갑작스런 부름에 지나치게 당황한 얼굴로 답한 엘레인은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그를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잠시 뒤.

바스락.

“응? 뭐야.”

우측 덤불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엘레인은 바짝 긴장했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주변에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적일까, 아군일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눈앞에 흔들리는 덤불을 응시했다.

그리고.

크아아앙—!

“엘레인!”

“이런!”

엘레인은 한 바퀴 몸을 굴려 거대한 재규어의 앞발을 피해냈다.

그러자 뒤쪽에서 들려오는 콰직!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

황급히 몸을 추스르고 재규어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허리가 부러진 나무를 앞발로 콱! 내리찍은 채 입맛을 다시고 있는 놈이 보였다.

“아니, 여기 정령이 만든 공간이라면서. 그런데 왜 재규어가 있는 건데….”

크르르르….

녀석은 배가 고픈지 엘레인을 바라보면서 연신 혀를 날름거렸다.

그렇다고 순순히 먹혀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엘레인은 녀석을 마주 노려봐주었다.

“카르넬. 저 재규어는 내가 처리할게.”

“괜찮겠어?”

“그럼. 물론이지. 이 녀석 나를 먹잇감을 점찍은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난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거든.”

마지막에 가서 재규어에게 단단히 경고한 엘레인은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회귀 전. 나름 용병으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엘레인이었다.

정령이 없었을 때에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결국에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던 게 바로 그녀인데.

이런 정체 모를 장소에서 재규어의 배 속에 잠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운디네.”

-무웃!

(나한테 맡겨)

지금은 가장 강력한 운디네까지 곁에 있는 상황.

아무리 위압감이 장난 아니라고 해도 열파의 정령과 수해의 정령까지 잡아낸 마당에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재규어는 덩치 큰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회귀하고부터 사람에게는 사용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린 엘레인은 용병 시절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슥 말아 올렸다.

그리고는 크왕! 포악하게 입을 벌리고 달려온 녀석은 엘레인의 앞에 갑자기 몸을 키운 운디네에게 그대로 잡아먹혔다.

-꾸루룩?

운디네의 커다란 몸 안에 갇힌 녀석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가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당연하지만 숨 쉴 구멍이 없어진 가엾은 포유류는….

꼬륵. 꼬르르륵….

그대로 몸을 축 늘어트리고 숨을 거두었다.

“잘했어, 운디네.”

-무우웃!

(이 정도야 기본이지!)

운디네는 잘난 체를 하며 물에 푹 젖은 재규어의 머리 위로 통통 튀어 올랐다.

마치 승리 후 세리머니를 하는 듯한 모습에 엘레인은 허허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거…. 진짜 재규어잖아?”

혹시 환상은 아닐까 했지만, 이것은 진짜 살아 움직이는 재규어가 맞았다.

지금은 비록 죽음에 이르렀지만.

어쩌면 이것과 비슷한 맹수가 도처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캬아악!

“!?”

그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 잡은 줄 알고 신나게 뛰어놀고 있던 운디네도.

뒤늦게 새로운 맹수의 출현을 깨닫고 뒤를 돌아본 엘레인도.

눈앞에 달려드는 새로운 맹수의 앞에서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렇게 놈에게 최소 팔 한쪽은 뜯겨 나갈 것을 예상하고 있던 그때.

푸욱—.

-크, 크오오….

시퍼런 검날이 녀석의 갈빗대 사이를 뚫고 빨갛게 번들거렸다.

정확히 심장을 꿰뚫렸는지 녀석은 눈알을 데룩 굴려 검을 찔러 넣은 인간을 확인하더니, 서서히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엘레인, 괜찮아?”

“카르넬….”

거칠게 검을 뽑아낸 카르넬은 곧바로 달려와 엘레인의 몸을 부축해주었다.

그리고는 찬찬히 몸을 살펴보기 시작하는데.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대하는 것처럼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바라보고 있는 엘레인이 괜스레 부끄러울 정도였다.

“난 괜찮은데….”

엘레인이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으나 카르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모조리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떼어냈다.

“하아. 다행히 다친 곳은 없네.”

“으응….”

“응이 아니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

나 참. 그러게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그렇게 대꾸하려던 엘레인은 갑자기 혼을 내는 카르넬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내가 혼날 만한 짓을 했던가? 싶다가도 걱정 가득한 그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입이 쏙 들어갔다.

“다음부터는 혼자 앞으로 뛰어가면 안 돼. 위험하잖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언제 엄하게 말했냐는 듯, 상냥하게 어르고 달래는 그의 말에 엘레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 대답에 깊이 안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왜인지 모르게 엘레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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