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일어설 수 있겠어?”
“물론이지! 날 뭘로 보고.”
엘레인은 괜히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푹 숙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눈치 없이 빨리 뛰기 시작하는 심장 부근을 매만지며 당혹스런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지. 부정맥인가? 그냥 평소처럼 걱정을 받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거야.’
그냥 카르넬이 저를 걱정해서 충고를 해줬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걱정은 평소 가족들에게 많이 받아왔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똑같은 걱정일 뿐인데.
이상하게 지금 엘레인의 심장은 자꾸만 콩닥콩닥 뛰어댔다.
“아니면 그냥 놀라서 그런 건가….”
엘레인은 힐끔. 카르넬이 죽인 맹수를 쳐다보았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상황에서 방심을 하다니.
엘레인답지 않았다.
운디네도 하마터면 주인을 잃을 뻔했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울적한 얼굴로 뺨에 몸을 비벼왔다.
-무우….
(주인, 내가 미안해….)
“괜찮아. 결국, 아무 일도 없었잖아.”
-무뭉.
(그치만.)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지. 이미 지나간 일보다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잖아. 그렇지?”
-뭇! 무뭉. 무우웃!
(응! 나 정신 똑바로 차릴게. 그리고 주인을 꼭 지킬 거야!)
엘레인이 달래주자 금방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갈 것처럼 굴던 운디네가 파이팅 넘치게 외쳤다.
그리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제 목숨을 구해준 장본인인 카르넬을 힐끗 바라보며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고마워, 카르넬. 덕분에 살았어.”
“그래.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으응….”
엘레인은 마지막까지 제 안전을 생각하는 카르넬을 바라보며 가슴께를 문질렀다.
단언컨대 심장 주변이 간질거리는 이 느낌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얼른 출발하자. 더 늦으면 다른 맹수들과도 마주칠지 몰라.”
“하긴. 소란이 꽤 컸으니까.”
엘레인은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카르넬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말을 잊지 않았다는 듯.
옆에 꼭 붙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카르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처리한 게 진짜 맹수라면 위에 떠 있는 해도 진짜일지 몰라.”
“그 말은 얼른 가지 않으면 해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구나.”
“그래. 이정표가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좀 더 서두를 필요가 있겠어.”
밤에 만나는 맹수는 낮에 만나는 맹수와 또 다를 것이다.
성가신 적을 더 늘릴 여유는 없기 때문에 발걸음을 더욱 빨리해야 했다.
“그럼 얼른 서둘러야… 응? 갑자기 손은 왜?”
엘레인은 문득 눈앞에 내밀어진 카르넬의 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카르넬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 약속을 지켜야지.”
“뭐? 그럼 그냥 옆에 붙어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굳이 손을 잡을 필요는 없는… 헛!”
카르넬은 조용히 엘레인의 손을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꽉 맞붙잡는 그의 손길에, 겨우 제 색을 되찾은 엘레인의 얼굴이 다시금 벌겋게 달아올랐다.
“앗, 잠깐! 진짜 이대로 간다고?”
“걱정하지 마. 한쪽 손을 잡고 있어도 검을 휘두르는 데에 큰 문제는 없으니까.”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니면?”
“아, 아니 그것도 문제이긴 한데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으, 그러니까.”
“어쨌든 불편한 건 아니라는 거구나. 시간이 촉박하니까 그 이야기는 가면서 마저 하자.”
“뭣? 어떻게 하면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카, 카르넬!?”
카르넬은 당황한 엘레인을 부드럽게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엘레인을 지키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는 하늘 높이 뻗어있는 이정표를 노려보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
“호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돌루스는 저와 세계수를 삼킨 공간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현재 삼킨 구슬의 힘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타이밍 좋게 방해꾼들이 도착했고, 자칫 잘못하면 그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간의 정령이 나를 도와줄 줄이야. 어쩌면 정말로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돌루스는 크하핫 웃으면서 마음 편히 구슬의 힘을 제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순조롭게 이 힘을 내 것으로 만들기만 한다면 그는 그리도 고대하던 신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제 발아래에 두고 마음대로 굴리면 될 테지.
이 세상의 유일신으로서. 이 세계에 군림하면서 말이다.
“으음?”
그러던 그때 신경 쓰이는 일이 발생했다.
쿵! 굉음과 함께 숲 한 부근에서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 것이다.
“설마 다른 녀석도 함께 딸려온 건가?”
돌루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다른 건 몰라도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닌 베네딕트 제국 3황자.
아르닐 베네딕트만큼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된다.
그의 마법은 제 마법 실력을 훨씬 상회하니까.
그가 작정하고 모든 마법을 디스펠 해버린다면 구슬의 힘을 제 것으로 완벽하게 만들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지. 그 녀석이 들어왔다면 벌써 여기를 찾아왔을 거야.”
그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플라이 마법으로 이미 옛적에 이곳에 당도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 소란의 원인은 아르닐 베네딕트가 아닐 터.
“그 녀석만 아니면 승산이 있지.”
이곳엔 세계수와 자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뇌당한 복면인들 역시 그와 함께 공간의 정령이 만든 곳으로 빨려 들어왔다.
즉, 저것들을 방패막이 삼아서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뜻!
“흐흐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와라. 가능하다면 여기서 죽여주마.”
돌루스는 소란의 주인공이 이곳까지 당도하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살짝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예상했던 방향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돌루스….”
“호오. 누군가 했더니 당신들이었습니까?”
돌루스는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엘레인과 카르넬을 보며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서로 손을 꼭 붙들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허어. 이런 상황에서까지 연애라니. 이거 참. 속 편하다고 해야 할지.”
“뭣? 여, 연애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혀를 쯧 차면서 하는 말에 엘레인은 허둥지둥 카르넬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에 불만을 느낀 카르넬은 엘레인의 손을 떨구게 만든 원인.
돌루스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허. 그 눈빛은 뭡니까?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겁니까?”
돌루스는 엘레인과 카르넬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굳이 다른 이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애초에 다른 병력과 만나지 못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분명 그럴 진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크흐흐. 차라리 조용히 숨어 있었으면 좀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을. 안타깝게 되었군요.”
“그런 말을 하기에 앞서 그대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게 더 이로울 텐데.”
“…무슨. 헛소리로 시간을 벌려고 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복면인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돌루스는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세계수.”
이어지는 단 하나의 단어에 그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당연하지만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카르넬은 피식. 여유롭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굳이 세계수를 훔쳐 온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아직까지 손을 떼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적어도 그대의 계획에 세계수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더군.”
“흐음…. 이걸 잘 알아냈다고 칭찬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제가 이걸 따로 숨긴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라도 단번에 알 법한 것을 알아냈다고 거들먹거리는 거라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건 그냥 통보다.”
“통보?”
카르넬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읊은 돌루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과 함께 그의 세상도 함께 기울기 시작했다.
“아?”
푸화악—!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온다.
돌루스는 세계수 줄기에 얹고 있던 제 손에서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지저분하게 잘린 단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크으…. 크아아악!”
툭 하고 떨어진 손목에 시선을 줄 새도 없이 돌루스는 휑한 제 팔을 부여잡고 꽥꽥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끄으윽. 대체, 어느 틈에…!”
고통으로 시뻘겋게 충혈된 그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훑는다.
그리고 그는 발견할 수 있었다.
공중에 둥둥 떠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나의 물의 정령을.
“황녀어어!”
“우왓. 깜짝이야.”
쩌렁쩌렁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엘레인의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러자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은 카르넬이 엘레인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아, 응.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놀랐을 뿐이야.”
엘레인은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돌루스를 힐끔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대충 어떻게 할지 카르넬과 의견을 나누었던 엘레인은 돌루스가 다른 쪽으로 정신이 팔렸을 때 은밀하게 운디네를 보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딱 절반만 성공했다.
“미안. 목을 날리려고 했는데 이상한 반발력이 느껴져서 공격이 빗겨나갔어. 아무래도 중요 부위를 보호하는 아티팩트를 두르고 있나 봐.”
“아니야. 지금도 충분히 잘해줬어. 고통 때문에 평소처럼 집중력을 발휘하긴 어려울 테니까. 수식이 복잡한 마법은 사용할 수 없을 거야.”
카르넬은 아주 잘해주었다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전부 듣고 있었던 돌루스는 분노에 가득 차서 외쳤다.
“빌어먹을 놈들이! 아주 뒈지려고 작정했구나!”
“쯧. 이젠 존댓말도 집어치운 건가?”
카르넬은 혀를 차며 검날을 바로 세웠다.
고통스러움에 이성이 살짝 날아간 건지.
엘레인과 카르넬에게만큼은 형식적으로나마 예의를 차렸던 돌루스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당장 저놈들의 목을 내 앞에 가져와라! 지금 당장!”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잘린 손을 집어 든 돌루스는 자기 자신에게 신성력을 퍼부으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마 저대로 두면 얼마 가지 않아 멀쩡하게 손목을 움직일 수 있겠지.
하지만 녀석이 간과한 게 하나 있는데.
그의 손을 자른 것은 날카로운 검날이 아닌, 강력한 수압이 주체인 물의 칼날이라는 거다.
갈기갈기 찢겨 나간 상처를 회복하는 건 그로서도 꽤 힘든 일일 터.
“그 안에 복면인들을 모두 정리하는 것. 그게 우리 목표야.”
“물론이지. 시간은 충분해.”
카르넬의 말에 그리 답한 엘레인은 그에게 물로 이루어진 실드를 씌워주면서 웃었다.
가장 먼저 녀석의 수족을 잘라버린다면 안전하게 돌루스를 처치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지금처럼 돌루스가 복면인들을 마법으로 서포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태라면 더욱 손쉽게 복면인들을 처리할 수 있다.
“자만이 불러온 참사는 참 무섭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게 골로 갈 수 있거든.”
당장 엘레인만 해도 조금 전에 맹수의 식사거리로 전락할 뻔하지 않았던가.
푸화아악!
물기둥을 날려서 복면인 하나를 치워버린 엘레인은 옆구리를 노리는 복면인에게 워터 블레이드를 날려주었다.
무려 최상급 정령이 날리는 공격이어서 그런지 가볍게 날리는 듯해도 운디네의 공격에 직격당한 복면인들은 다시 두 발을 딛고 일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카르넬은….
“와…. 카르넬 너 소드 익스퍼트였어?”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경지.
소드 익스퍼트.
현재 라네즈가 도달해 있는 경지에 발을 들인 카르넬은 간단하게 복면인의 검을 피해내며 답했다.
“그래도 네 둘째 오빠와 자웅을 겨룰 정도는 아니야. 그분과 다르게 나는 이제 막 입문한 상태거든.”
휘리릭.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오는 검을 모조리 피해낸 뒤 상대방의 목을 단숨에 날려버린 카르넬이 그리 답했다.
엘레인은 그의 깔끔한 솜씨에 감탄하면서 물로 만든 손아귀를 이용해 달려오는 복면인을 그대로 바닥에 꽂아 넣었다.
“그래? 내가 보기엔 라네즈 오빠와 비견될 만한 실력인 것 같은데 말이야.”
참고로 라네즈의 검술이 모든 것들을 박살 낼 것처럼 포악하다면 카르넬의 검술은 물처럼 유연하고 또 자유로웠다.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파고드는 카론의 검술과는 또 다른 느낌의 검술은 마치 검무를 추듯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마 카르넬의 말대로 소드 익스퍼트 급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그 유연함을 무기로 라네즈를 상대할 순 있을 것이다.
단순함과 유연함은 나름 상극이니까 말이다.
뭐, 잡담은 이쯤에서 각설하고.
“이제 거의 다 정리된 것 같은데….”
엘레인의 말을 끝으로 마지막 남은 복면인을 처리한 카르넬이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휙 털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제 막 손목을 붙이는 데에 성공한 돌루스가 당혹스러움이 짙게 묻어난 동공을 잘게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