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이, 이럴 순 없다. 저놈들이 그리 약한 놈들이 아닐 텐데….”
“저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강했나 보지 뭐.”
엘레인은 뭘 그리 당연한 걸 말하느냐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무리 무기에 정령의 힘을 담아 놓았다고 한들 진짜 정령의 힘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물론 잘만 사용한다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운디네처럼 최상급 정령 앞에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쉽게 꺼트릴 수 있는 힘에 불과했다.
“크윽. 닥쳐라!”
퍼어엉—!
돌루스는 나름 아무도 모르게 시전하고 있던 불꽃 마법을 기습적으로 날렸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몸을 길게 늘린 운디네의 몸에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큭. 이 하등한 생물이!”
-무웅!
(뭐라는 거야 이 못생긴 인간이!)
운디네가 볼을 부풀리며 물로 만든 채찍을 날렸다.
그에 흠칫한 돌루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운디네가 노린 건 그의 뺨이 아니었다.
“아, 안 돼! 나의 아티팩트가…!”
유연하게 굽어지는 물줄기가 돌루스의 손가락에 빼곡히 자리하고 있던 아티팩트 반지들을 모조리 빼내었다.
덕분에 보호할 수단을 한순간 모두 잃어버린 돌루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운디네를 쳐다보았다.
-무우웃!
(주인, 나 잘했지?)
“그래그래. 정말 잘했어. 우리 운디네가 아주 최고야.”
엘레인은 그런 운디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운디네에게서 건네받은 아티팩트 반지들을 뒤에 있는 숲속에 휙 던져버렸다.
하나하나 있는 힘껏.
찾지 못하게 아주 멀리 말이다.
“크으윽…. 이제 어쩔 셈이지? 이대로 나를 죽일 셈인가?”
“원래는 구속하는 게 목표였지만, 대주교들을 살해하려고 한 그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전면 수정됐다.”
카르넬은 그리 말하면서 검을 들었다.
결국,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겠다는 그의 말에 돌루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크흐흐.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생각인가? 내가 이 세계수로 무얼 할지 궁금하진 않나?”
“…물론 궁금하긴 하지만 후환을 남겨두는 건 싫어서 말이지.”
카르넬은 더 지체하기 싫다는 듯 그에게로 다가갔다.
검을 늘어뜨린 채 걸어오는 모습이 흡사 영혼을 수확하러 온 악마처럼 보였다.
“자, 잠깐 내 말을 들어 봐라!”
정말 코앞으로 다가온 위기감에 돌루스가 다급히 말을 걸었지만, 카르넬은 그의 말을 싸그리 무시했다.
그에 겁을 먹은 돌루스가 뒷걸음질쳤지만, 소용없었다.
등 뒤로 닿은 세계수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앞으로 다가온 카르넬은 검을 위로 치켜든 뒤 싸늘하게 말했다.
“죽어서도 영원히 고통받기를 빌지.”
후웅—!
“커헉!”
카르넬의 검이 돌루스의 목을 사선으로 깔끔하게 잘라냈다.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목이 잘렸음에도 돌루스는 잠시 동안 눈을 깜빡일 수 있었다.
그러나 중력의 힘까지 버티지는 못했던 것일까.
기어코 그의 목이 뒤로 스르륵 밀려 떨어질 때.
카르넬은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털어내며 뒤로 돌았다.
“고생 많았어. 이제 이 공간을 탈출할 방법만 찾아내면….”
“잠깐만, 카르넬!”
“!?”
엘레인의 외침에 무언가 직감한 카르넬은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돌루스를 돌아보자, 뒤로 넘어가던 그의 목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게 보였다.
“무슨….”
히죽—.
당혹스런 얼굴로 놈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놀란 듯 크게 뜨인 돌루스의 눈과 입이 기쁘게 휘어졌다.
그 기괴한 모습에 흠칫한 카르넬이 인상을 찌푸리자,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그의 목이 서서히 다시 달라붙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좀비도 아니고. 목이 잘렸는데 어째서….”
“흐흐흐. 다행히 늦지 않았구나.”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던 엘레인은 히죽 웃으며 하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니.
설마 그가 원하던 무언가가 이루어졌다는 뜻인가?
그래서 저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벌어진 거고?
“후우. 뿌리와 계속 접촉하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정말이지. 1초만 늦었어도 그대로 골로 갈 뻔했잖아.”
돌루스는 깔끔하게 붙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느긋하게 웃었다.
눈치껏 세계수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손목을 잘라낸 건 잘한 일이지만, 엘레인과 카르넬은 돌루스가 딛고 있는 뿌리까지 신경 쓰지 못했다.
덕분에 구슬을 모두 소화해내는 데에 성공한 돌루스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은 나의 승리가 되겠구나.”
“!?”
뿌드득. 뿌드득.
승리 선언을 끝으로 돌루스의 몸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관절이 뒤틀리고 몸이 부풀어 오르는 등.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그런 모습들을 보이며 그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저게 뭐야…?”
“나도 모르겠어.”
엘레인과 카르넬은 점점 괴상하게 변화하는 돌루스를 보며 인상을 굳혔다.
그들은 몰랐지만, 현재 돌루스는 ‘상승한 격’에 어울리는 몸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그의 몸 자체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크흐으….”
그리고 마침내 모든 변화를 끝낸 그는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3미터 남짓으로 거대해진 키와 상어처럼 날카롭게 돋아난 이빨.
그리고 왕관처럼 돋아난 기괴한 뿔과 회색빛으로 물든 그의 몸이 그랬다.
“키긱. 엄청난 힘이로구나…!”
돌루스가 너덜너덜해진 신관복을 펄럭이며 감탄했다.
그리고 그 힘의 정체를 깨달은 엘레인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정령의 힘…? 설마 고대의 정령을 흡수한 거야?”
“호오. 눈치가 빠른 계집이로구나. 그래, 맞다. 나는 고대의 정령과 융합에 성공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엘레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돌루스는 보란 듯이 사특한 기운을 흩날리면서 킬킬 웃어댔다.
“그야 나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서지. 격을 상승시키는 데에 고대의 정령은 최고의 재료다. 그리고 이로써, 나는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이제 모두가, 나를 굽어볼 것이다.”
“…뭐?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끔찍한 짓들을 해댔단 말이야?”
엘레인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돌루스는 매우 불쾌해졌다.
위대한 그의 목표를 고작 그런 것으로 폄하하는 엘레인이 머저리로 보였다.
“하! 모든 건, 위대한 나의 탄생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다! 그리고 나의 탄생은, 고작이 아니야!”
“그래? 지금 그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돌루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꼴이 뭐가 어때서?
새하얀 안광에 피눈물을 주륵 흘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돌루스는 의문스런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내가… 뭘 하고, 있었지? 나는…. 나는, 누구지?”
갑자기 시작된 물음표 행렬에 엘레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문을 표하는 그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이지를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격의 상승을 버티지 못하고 자아가 붕괴되고 있어. 그 때문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야.”
“그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뜻이야?”
엘레인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권력에 관한 욕심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봐 주길 바랐던 걸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는 융합에 성공했을지언정.
진정한 목표를 이루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리석은 사람이야. 결국, 자아를 잃게 되면 제가 무엇을 원했는지도 모르게 될 텐데.”
“자기 자신을 잃게 될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지.”
카르넬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 괴로워하고 있는 돌루스.
아니. 괴물을 바라보며 검 자루를 꽉 쥐었다.
모두 자업자득이었지만, 잘된 일이라며 가만히 관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판인지 놈이 서 있는 곳의 풀들은 이미 모두 시들어버렸고.
그 영역 또한 서서히 확장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 놈이 생명력을 앗아가고 있어.”
“완전히 정령화가 되면서 무언가 능력을 얻은 건가…. 어때, 운디네? 처리할 수 있겠어?”
-뭇! 무우웃!
(걱정 마! 내가 처리할게!)
운디네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괴물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착실하게 모든 이지를 상실한 괴물은 자신이 삼킨 고대 정령들의 사념에 휩싸여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냈다.
“그워어….”
온전한 파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본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괴물은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된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눈앞에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운디네는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크아악!”
-무잇!
갑자기 날아오는 거대한 주먹에 운디네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정녕 이지를 상실한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주먹질이 운디네를 심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뭐야. 몸집에 맞지 않게 속도가 엄청나잖아? 운디네, 괜찮겠어?”
-무무웃!
(충분해!)
운디네는 혹여나 엘레인이 끼어들 새라 재빨리 공격을 퍼부었다.
강력한 수압으로 이루어진 칼날부터 시작해서 물회오리나 맹수를 질식시킨 공격까지.
평범한 몬스터라면 이미 산산조각이 나도 모자랄 공격을 정신없이 퍼부었지만, 괴물의 재생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운디네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건재했으며.
그것은 곧 최상급 정령의 힘을 지닌 운디네보다 녀석의 격이 더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도 안 돼. 그럼 저 괴물이 정령왕급 힘을 지니고 있단 말이야?”
엘레인은 두 눈을 부릅뜨고 괴물을 바라보았다.
재앙급을 넘어서 멸망급 힘을 가지고 있는 저 괴물은 현재 운디네의 힘으로도 처리할 수 없었다.
“큰일이야. 여기엔 운디네의 격을 잠시나마 상승시켜줄 정령들이 없는데….”
엘레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공간의 정령이 만들어 낸 이 기이한 숲에는 하나의 생태계가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지만, 딱 하나.
정령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난번 수해의 정령을 처리했던 것처럼 정령들의 힘을 빌려서 놈을 처리하는 방법은 꾀할 수 없었다.
“공간을 먼저 깨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건? 이후 시간을 번다면 정령들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그렇게 하더라도 다른 문제가 있어. 신성제국에는 정령들이 별로 없는 데다가 안면을 따로 익히지 않아서 도움을 주지 않을 확률이 높아.”
엘레인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곳이 플로스 영지라면 상관없겠지만, 신성제국 한가운데에서 지난번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건 어려웠다.
즉, 지금 현재 저것을 상대할 수 있는 뾰족한 수는 달리 없다는 뜻이다.
“이제 어떡하지? 저런 게 풀려나오면 세상은 엉망이 되고 말 거야.”
“진정해.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함께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하지만 시간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운디네는 괴물에게 공격을 퍼부으며 놈들의 시선이 엘레인과 카르넬에게로 가지 않게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나마 괴물이 단순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엘레인이 마력을 모두 소진하고 나면 그것도 끝이리라.
그러니 마력이 바닥나기 전에 뭔가 묘수를 찾아내야 한다는 건데….
“잠깐만, 엘레인. 지난번에 세계수는 정령계와 통하는 문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저기를 통해 자연계의 정령이 정령계로 들어가기도 하고 정령계에 있는 정령들이 자연계로 놀러 오기도 한대.”
“그럼 저 문을 활성화시키기만 한다면 다른 정령왕들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대체 무슨 수로?
이론상 가능하긴 한데 엘레인은 저 문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머리로는 전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직감적으로 무언가 알 것 같다.
“…세계수에 정령력을 집어넣으면?”
“정령력을 집어넣으면 되는 거야?”
“으응. 세계수에게서 반응이 보일 때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정령력이 필요해.”
엘레인은 이번엔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답했다.
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카르넬은 한 발자국 앞서서 검을 바로 세웠다.
“내가 놈의 시선을 끌게. 그동안 네가 정령문을 열어줘.”
“너 혼자 괜찮겠어? 아무리 그래도 정령왕급 괴물인데….”
“잠깐이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그러니 부탁할게.”
카르넬은 올곧은 눈빛으로 엘레인을 응시했다.
나는 너를 믿으니까.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신뢰 가득한 그의 눈빛에.
“…알겠어.”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