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엘레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방법을 사용하면 분명히 정령문이 열릴 거야.’라고 확신했던 엘레인이었으나, 카르넬의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아내고 난 뒤에는 그 확신이 흔들렸다.
어디까지나 직감으로 비롯된 확신일 뿐이니까.
완전히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는데, 만약 실패하면 어떡하지? 부터 시작해서 만약 성공한다 치더라도 그동안 카르넬이 과연 다치지 않고 버텨줄 수 있을지 등.
오만가지 불안한 생각들이 엘레인의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것대로 문제였다.
‘공간이 저절로 깨지지 않는 이상. 놈은 이곳에 있는 것들부터 먼저 파괴할 거야.’
이러니저러니 해도 죽는다면 무엇이라도 시도하는 편이 좋다.
그렇다고 카르넬이 다치는 꼴은 절대로 보기 싫었기 때문에 엘레인은 운디네를 불렀다.
“최대한 단단한 실드로 여러 겹 부탁해.”
-무우!
괴물의 주먹을 민첩하게 피해낸 운디네는 곧바로 카르넬의 몸 주변에 물로 만들어진 실드를 여러 겹 생성시켜주었다.
충격을 흡수해주는 실드가 여러 개 생성되었으니 목숨이 위험한 상황을 두세 번 정도 모면시킬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아까 돌루스가 가지고 있던 방어용 아티팩트 반지를 버리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카르넬이 싱긋 웃으며 엘레인과 시선을 마주쳐왔다.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나중에. 그보다 만약 위험한 순간이 다가오면 바로 도망쳐야 해. 나도 곧바로 따라갈 테니까. 약속이야.”
“물론이지.”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엘레인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시원스런 그의 대답이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엘레인은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운디네와 카르넬이 교대하는 순간.
괴물은 비명을 내지르며 나자빠졌다.
“크와악!”
카르넬의 기습 공격이 통했다.
덜렁거리는 목이 순식간에 회복되었지만, 돌루스였던 시절 카르넬의 검에 목이 잘려 죽을 뻔했던 때를 몸이 기억하는지.
녀석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눈앞의 인간을 깊이 경계했다.
그리고 이렇듯 놈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을 때.
엘레인은 최대한 조용하고 은밀하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버텨줘, 카르넬. 내가 어떻게든 정령문을 열어 보일 테니까.’
마음만 같아선 운디네도 함께 붙여주고 싶지만, 마나를 정령력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운디네가 꼭 필요했다.
그렇다고 지원 사격을 했다가는 놈의 어그로가 이쪽으로 끌릴 수도 있기 때문에 엘레인은 카르넬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치지 않기를.
잘 버텨주기를 말이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고 있는 상황에서.
드디어 세계수에 도착한 엘레인은 운디네와 시선을 마주쳤다.
“운디네. 부탁해.”
-뭇! 무우웃!
(응! 바로 시작할게!)
운디네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엘레인의 마나를 쭉 뽑아내어 어마어마한 양의 정령력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세계수에 퍼붓기 시작하자 거대한 기운의 흐름을 읽은 괴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보는 거지? 네놈 상대는 나다.”
“그워어?”
퍽. 소리와 함께 녀석의 오른손이 잘려나갔다.
인간의 공격은 깔끔하여 작은 물의 정령이 퍼붓는 공격보다 덜 아팠지만, 이상하게 상처가 쓰라렸다.
그래서일까?
괴물은 귀찮은 파리를 내쫓듯 대충 손을 휘젓던 태도를 접어두고 진지하게 카르넬을 응시하더니, 지독한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기 시작했다.
“크오오오!”
“이런. 화가 많이 났나 보군.”
괴물은 눈앞의 인간을 밟아서 터트리고 주먹질해서 다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인간은 너무나 날쌨다.
괴물의 주먹질도 꽤 빠르긴 했지만, 작은 인간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비록 본능만이 남은 괴물이었지만, 지금 상황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힘을 일깨우기로 했다.
“크르륵….”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힘을 끌어올리는 모습에 카르넬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불길함을 직감한 그가 재빨리 놈에게 공격을 퍼부었지만, 괴물은 몸이 잘게 찢겨나가는데도 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끼긱. 끼기기긱.
“이건…. 설마 검에 있는 정령들을 일깨운 건가?”
뒤를 돌아보니, 복면인들이 쥐고 있던 무기들이 공중에 붕 떠올라 분해되고 있었다.
그리고 무기가 모두 분해된 자리에는 우중충한 색깔의 동그란 생명체가 대신 떠올라 있었는데.
눈알 없이 사람 이빨만 달려 있는 형태라 더욱 기괴한 느낌을 줬다.
“크히히힉!”
“곤란하게 됐군.”
녀석의 말을 직역하자면 넌 이제 끝났다 정도가 될까.
그리고 놈의 예상대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크윽….”
괴물에 의해 새로이 태어난 정령들은 최소 중급 이상이었다.
그런 놈들이 떼거리로 달려드니, 카르넬의 몸을 지켜주는 실드도 하나둘씩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네놈. 비겁하게 여럿이서 공격하기냐.”
-크하하학!
놈이 무슨 상관이냐는 듯 웃었다.
그리곤 주먹을 휘두르는데, 이번엔 주위에 방해하는 것들이 많아서 회피가 쉽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죽을 맛인데 그사이 괴물 녀석은 순수한 육체 능력뿐만이 아니라, 정령의 힘을 운용하는 방법을 깨우쳤는지 간간이 검은색 불길한 덩어리를 카르넬에게 휙휙 던졌다.
당연히 카르넬은 불길한 덩어리를 피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읏!”
조금이라도 불길한 덩어리와 가까워진다 싶으면 이상하게 몸이 그쪽으로 끌려들어 갔다.
마치 누군가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느려지고 힘도 조금씩 빠져나가서 한쪽 무릎을 꿇게 되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급 정령들이 이빨을 딱딱거리며 몸통 박치기를 해왔다.
“중력 관련 능력인가?”
피하기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카르넬은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때를 노리고 달려드는 중급 정령을 베어내고.
몸을 끌어당기는 불길한 구체에 날려 보내기도 했다.
-캬아아악!
“저런 최후를 맞게 되는 건가….”
불길한 구체에 빨려 들어간 것은 잘게 분해되어 가루가 되어버렸다.
아마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실드 정도는 저것에 닿자마자 깔끔하게 깨어져 나가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저것을 움직일 정도로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는군.”
하물며 아군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다.
녀석 또한 그 문제점을 알고 있는지 분한 듯 콧숨을 내쉬며 능력을 해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쿠르르릉—!
하늘에서 용트림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내리꽂는 검은 번개는 조금 전 카르넬이 서 있던 땅거죽을 완벽하게 엎어놨다.
“…설마 여러 정령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카르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고대의 정령이 여럿 들어 있는 구슬을 흡수한 탓일까?
괴물은 여러 가지 속성 공격을 할 수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이 적중한 듯.
놈의 주변에 검은색 화염 덩어리와 타르처럼 질척한 물의 구체.
그리고 썩은내가 진동하는 흙덩어리가 다수 생성되었다.
“크읏!”
아무런 준비 동작도 없이.
무지성으로 날리는 공격은 재앙 그 자체였다.
구르고 회피하고 또 치명적인 공격을 피해냈지만, 무자비한 폭격 속에 그대로 노출된 카르넬에겐 체력의 한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괴물은 자신과 달리 쉽게 지치는 인간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을 휘둘렀다.
“커헉…!”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이었으나 완벽하게 피해낼 순 없었다.
급하게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아냈지만, 근력이 얼마나 강한지. 뒤쪽에 있는 나무로 날아가 처박힌 카르넬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카르넬!”
깜짝 놀란 엘레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운디네가 걸어주었던 실드는 이미 모두 날아간 상태였고 카르넬은 누적된 피로와 대미지로 인해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카르넬!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마.”
엘레인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카르넬은 몸에 힘을 주었다.
지금 그의 역할은 괴물의 시선을 이쪽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엘레인이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 제가 다치는 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에 그는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고 몸을 바로 세웠다.
퉷.
“겨우 그 정도인가?”
“크오오오!”
입에 고인 핏물을 뱉으며 하는 도발에 놈이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격전에 엘레인은 점점 다급해졌다.
“운디네!”
-무오옹…!
(조금만 더…!)
엘레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외침에 운디네는 온 힘을 다해서 정령력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노력에 대한 보답인 것일까?
우우웅—!
세계수에게서 청아한 공명음이 들리며 줄기 중앙에 무언가 이변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륵?”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든 카르넬을 잡아 죽이기 위해 난리를 피우던 괴물의 몸을 우뚝 멈추게 했다.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던 거대한 힘의 흐름이 잠시나마 멎는가 싶더니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카르넬!”
정령문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을 확신한 엘레인은 미련 없이 카르넬에게로 뛰어갔다.
“운디네. 치료 좀 해줘.”
-무뭇!
운디네는 별 어려움 없이 카르넬의 몸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엘레인이 지닌 마나량이 워낙 방대한 탓에 상당히 많은 마나를 소모했음에도 이 정도 치료쯤은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정령문은…? 성공한 거야?”
“응. 성공했어. 조금 있으면 완전히 열릴 거야.”
엘레인은 카르넬의 손을 꽉 잡으며 세계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꺼운 줄기 한가운데에서 서서히 몸집을 키워나가는 동그란 형태의 포탈.
그곳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힘과 따스한 빛에 부정한 것들로 이루어진 괴물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뒤.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그곳에서 조그마한 운디네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모잉?
“크륵?”
방대한 힘에 비해서 보잘것없는 정령이 등장했다.
그에 괴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녀석은 깨닫고 말았다.
이 방대한 힘의 원천은 저 세계수라는 것을.
그 안에서 나오는 것들은 이 막강한 힘과 완전히 별개라는 것을 말이다.
“크흐흐….”
괴물은 잠시나마 미지의 힘에 주춤했던 것을 떠올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자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운디네가 화들짝 놀라서 정령문 너머로 쏙 들어가 버렸다.
보아라.
저 하찮은 존재는 저를 보자마자 놀라서 몸을 숨기지 않는가.
정말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괴물은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쓸데없이 불길한 나무를 할퀴어 부수려던 찰나.
-아우우—!
“이 목소리는…?”
카르넬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래전 일이지만, 분명히 기억에 남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쏜살같이 정령문을 비집고 튀어나와 괴물의 손목을 콰직! 깨물어 뜯어내었다.
“크아아악!”
순식간에 한쪽 팔을 넘겨준 괴물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한편 여유롭게 놈의 팔을 입에서 뱉어낸 녀석은 만족스런 콧숨을 내쉬며 엘레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크르릉.
“엘라임!”
그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듬직한 등장에 엘레인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엘라임은 그런 엘레인의 부름에 화답하듯 가까이 다가와서 콧잔등을 비볐다.
“최상급 정령?”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카르넬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쉽게도 정령왕은 아니었지만, 그가 난입함으로써 형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어쩌면 최상급 정령의 힘을 빌려 운디네의 격을 잠시나마 상승시킬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크르르….
-컹컹!
엘라임과 똑같이 생긴 늑대가 하나둘. 정령문을 비집고 나오더니 그 뒤로 상급 물의 정령 엘리비아와 중급 물의 정령 엔다이론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쿠웅—!
“저게 뭐야?”
“엘레인 너도 모르는 거야?”
“으응.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어.”
엘레인과 카르넬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정령문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손을 바라보았다.
더듬더듬.
문 앞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인지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은 연신 세계수 주변을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엘라임 한 마리가 콧잔등을 이용해 거대한 손을 한쪽 방향으로 밀어내자.
“설마 지금 우리한테 인사하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엘레인과 카르넬은 이쪽을 향해 반갑게 흔드는 거대한 손을 바라보며 마주 인사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마친 엘레인은 생각했다.
‘설마 저거 물의 정령왕 손은 아니겠지.’
실로 그럴듯한 가정에.
엘레인은 난감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