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2화 (361/417)

362화

엘레인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카르넬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너무 갑작스럽게 알아버린 그녀의 속마음에.

그는 당혹스런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홍당무처럼 새빨개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그러니까 다음부터 그러지 마. 나한텐 조심하라고 하면서 너는 왜 이렇게 네 몸을 못살게 구는 건지 모르겠네.”

엘레인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아니, 머리론 이해하고 있지만, 그러지 않아 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일부러 더욱 뾰족하게 말했다.

하지만 바보같이 헌신적인 이 남자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야 나는 비교적 튼튼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넌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나 엄청 튼튼해! 잔병치레 거의 없이 살아온 게 바로 나야.”

“지금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잖아. 사람은 약해, 엘레인. 그리고 지금 너에겐 운디네도 없어서 더 위험해.”

카르넬이 살살 달래며 엘레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비겁하게 팩트로 후드려 패다니.

그런 주제에 눈에는 걱정이 뚝뚝 떨어져서 엘레인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럼…!”

“하지만 적어도 다친 너보단 멀쩡한 내가 저놈을 상대로 더 오래 버틸 수 있겠지.”

“…….”

카르넬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신이 또렷해질 정도로 내상이 회복되긴 했지만, 부러진 뼈가 붙을 정도로 약효가 강력하지는 않았다.

오른팔은 여전히 덜렁거렸고, 왼쪽 발목에서는 여전히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영악한 놈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할 것도 없이 딱 봐도 견적이 나왔으나 때로는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내세워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엘레인. 약효가 얼마나 뛰어난지 지금 당장 달려도 될 정도로 몸이 괜찮아졌는걸.”

“거짓말. 기가 막혀서 코가 막혀버릴 것 같아.”

엘레인은 부러 차갑게 말하며 카르넬의 상체를 나무 기둥에 기대게 했다.

유리 세공품을 옮기듯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손길에 멍하니 몸을 맡기고 있던 카르넬은 발끝부터 차오르는 불길함에 다급히 엘레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에 힘을 주려던 순간.

-깨갱!

엘라임 한 마리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뱉으며 바닥에 처박혔다.

동시에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것을 놀란 눈으로 확인한 카르넬은 문득 주변이 아주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모두 당했다고?”

정확히 모두 당한 건 아니지만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정령왕의 손을 제외한다면 다른 정령들은 모두 역소환된 것 같았다.

마지막 엘라임이 남긴 빛무리를 거대한 손으로 한 차례 휘저은 괴물이 히죽 웃으면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녀석은 메인 디쉬를 앞둔 사람처럼 입맛을 다시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쿵— 쿠웅—!

“으윽…. 엘레인. 도망쳐.”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카르넬이 다급히 말했다.

하지만 엘레인은 카르넬이 잡은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단검집에서 단검을 쑥 뽑아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 지금부턴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아니, 그러지 마. 내가 시선을 끌 테니 너는 얼른 도망쳐.”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하는 그의 말에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엘레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퍽 퉁명스런 얼굴로 그를 휙 돌아보았다.

“너 진짜 치사한 거 알아?”

“치사… 하다니?”

당혹스레 되묻자 엘레인이 아공간 주머니에 있던 유리병 세 개를 꺼내서 그대로 괴물에게 던졌다.

“크오오오!”

유리병에 정통으로 맞은 괴물이 치이익. 연기를 뿜어내며 괴로워했다.

극독이나 산성 물질이 가득 담겨 있었는지 놈의 피부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다시 회복하기를 반복했다.

비록 카르넬처럼 검기를 사용하진 못해도 이렇듯 놈을 견제할 수단은 많았다.

그조차도 아르닐이 위급한 일이 생길 때 사용하라고 잔뜩 안겨준 것이지만.

하여튼 그 수단이 저 괴물에게 먹힌다는 게 중요했다.

한 차례 놈의 움직임을 저지시킨 엘레인은 여전히 퉁명스런 얼굴로 카르넬을 바라보며 답했다.

“너는 목숨을 걸고 몇 번이고 나를 지켜줘 놓고 왜 나만 그러지 말라는 거야?”

“하지만 그건….”

“됐어. 너도 네 마음대로 했으니까 나도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할 거야.”

카르넬은 처음으로 제게 고집을 부리는 엘레인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차마 엘레인의 박력에 밀려 따지지도 못하고.

그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엘레인이 괴물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저 자식한테 한 방 먹이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릴 것 같아.”

“뭐?”

엘레인은 카르넬의 의문에 답하지 않고 곧바로 단검을 이용해 치맛자락을 길게 찢어냈다.

움직이기 편하게 허벅지 부근에 길을 튼 엘레인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며 자세를 다잡았다.

‘운디네는 없지만 그래도 회귀 전 용병으로서 살았던 경험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

“크으으….”

괴물이 눌어붙은 피부를 신경질적으로 떨쳐내며 이를 드러냈다.

살기가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 위세였으나 엘레인은 오히려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괴물을 응시했다.

놈의 공격을 회피하며 시간을 끄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저 거적때기 같은 옷 속에 꼭꼭 숨어 있는 꼬리가 언제 튀어나와 어느 경로로 기습 공격을 하는지만 잘 확인한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닐 테지.

게다가.

으드득.

엘레인은 이를 갈며 괴물을 노려보았다.

감히 카르넬을 몇 번이고 다치게 하다니….

“넌 내 손에 죽었어!”

“크륵?”

인간 여자가 갑자기 살벌하게 외치며 달려오는 모습에 괴물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곧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비웃음을 가득 매단 채 주먹을 내질렀다.

“어딜!”

파공음이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공격이었으나 상대를 잘못 만났다.

엘레인은 놈의 주먹을 가뿐하게 피한 후 날카로운 단검으로 손등을 슥 긁고 지나갔다.

“크오오!”

고작 인간 따위에게 피를 봤기 때문일까?

놈은 괴성을 내지르며 숨겨두었던 꼬리를 힘차게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녀석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엘레인은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크아아악!”

‘됐다. 어그로가 확실하게 끌렸어.’

다행히 녀석은 정령의 힘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뇌만큼은 텅 비었는지 엘레인의 의도대로 카르넬에게서 멀어졌다.

쿵! 콰쾅!

한 번이라도 맞으면 곧바로 곤죽이 될 만큼 위협적인 공격이 연이어 이어졌으나 놈은 계속해서 애먼 땅만 내려칠 뿐이었다.

‘공격이 단순해서 다행이야. 불안한 건 내 체력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인데….’

엘레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곤 있었으나 회귀 전과 달리 지금의 몸뚱어리는 둔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운디네와 계약을 맺게 되면서 운디네의 성장만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하물며 운디네가 아주 잘 성장해주었기에 엘레인은 따로 체력 훈련이라든가 근력 훈련 같은 걸 할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회귀 전에 비해서 몸이 잘 따라와 주질 않았고, 때문에 놈의 공격을 허용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놈의 공격이 단순한 것이 엘레인에게는 그나마 천운이었다.

‘이런. 벌써 몸이 지치고 있어.’

후웅. 옆으로 후려치려는 공격을 간신히 피해낸 엘레인이 숨을 헐떡였다.

뭐,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르닐의 물약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만, 놈은 좀처럼 거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막 녀석의 꼬리 공격을 피해낸 순간.

쿠르릉—!

‘잠깐. 이 기운은?’

엘레인은 기겁을 하며 몸을 옆으로 굴렸다.

동시에 온몸에 오싹한 기운이 느껴지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레인이 있던 자리에 검은 번개가 내리치며 땅거죽을 가볍게 뒤집어버렸다.

“윽.”

입안에 들어간 흙먼지를 뱉어내며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난 엘레인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다.

아직도 전신을 내달리는 짜릿한 기운에 입술을 깨문 엘레인은 재빨리 아르닐의 물약을 꺼낸 뒤 더욱 거리를 벌리고자 했다.

그런데.

“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 오른쪽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아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웬 검은 덩굴 같은 것이 엘레인의 발을 콱 붙잡고 있었다.

“무슨….”

엘레인은 사색이 된 얼굴로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히죽. 불길한 미소를 지은 괴물이 엘레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크읏.”

엘레인은 재빨리 덩굴을 끊어내었다.

그리곤 어느새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녀석이 양손을 들고 내려찍으려는 모습을 보곤 기민하게 몸을 굴렸다.

그렇게 간발의 차이로 놈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그때.

“크아악!”

“어?”

갑작스런 괴성에 번쩍 고개를 들자, 내려치려던 손을 회수하고 잔뜩 몸을 비틀고 있는 괴물이 보였다.

그 과정에서 놈의 등에 매달린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확인한 순간 엘레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카르넬!?”

카르넬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놈을 응시하며 이를 갈았다.

“감히….”

엘레인을 눈앞에서 잃어버릴 뻔했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는 진득한 분노가 서린 눈을 번뜩이며 등 깊숙이 박힌 검 자루에 힘을 더했다.

“크아아아악!”

귀가 아플 정도의 괴성이 터지며 섬뜩한 예기를 지닌 검이 괴물의 등가죽을 길게 찢었다.

회복이 빨라도 고통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녀석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연신 손을 휘저었다.

“크읏.”

무지성 공격을 간신히 피해낸 카르넬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몸을 재빨리 부축한 엘레인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다그쳤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으랬잖아!”

“너 혼자 위험한 일을 자처하는데 어떻게 편하게 쉴 수 있겠어.”

“너… 정말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은 거지?”

“하핫. 그렇게 말해도 하나도 안 무서워.”

카르넬은 언제 버럭 화를 냈는지 울상을 짓고 있는 엘레인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바보같이.

내가 뭣 때문에 이 고생을 하면서 거리를 벌렸는데.

마음 한구석에서 원망스러운 마음이 샘솟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위험에 처한 저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 줬다는 것에 고마운 마음 또한 샘솟았다.

이렇듯 복잡한 감정에 엘레인이 울상을 짓고 있을 때.

카르넬은 자꾸만 놓칠 것 같은 검 손잡이를 꽉 그러쥐며 세계수로 시선을 옮겼다.

“운디네는… 아직인 걸까?”

“글쎄….”

슬슬 한계였다.

엘레인의 체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아직 큰 상처를 달고 있는 카르넬은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운디네가 꼭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늦어질수록 불안해지는 마음은 자꾸만 커질 수밖에 없었다.

“크오오오오!”

그리고 정말이지 절망적이게도.

상황은 더욱 최악을 향해 치달았다.

“저거 왜 저러는 거야?”

“기운이 점점 더 강대해지고 있어. 아무래도 지금까지 전력을 다하지 않았던 것 같아.”

“뭐? 그게 정말이야?”

엘레인은 떨리는 눈으로 분노하고 있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놈의 몸은 점차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고,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고 끈적거리는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여기서 더 강해지다니….”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

엘레인은 질린 얼굴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힘을 모두 개방했는지 녀석의 입에선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우드득 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을 때.

엘레인은 직감하고야 말았다.

‘저건 못 이겨.’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힘의 차이였다.

근육으로 부푼 저 다리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을 때 엘레인과 카르넬은 결코 저 괴물의 돌진을 피해내지 못할 테지.

“여기까지가 끝인가 봐.”

“엘레인….”

엘레인과 카르넬은 착잡한 얼굴로 서로 손을 맞잡았다.

물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끝까지 발악하고.

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 볼 것이다.

“크아아악!”

그리고 마침내 놈이 이쪽을 향해 높이 도약했을 때.

푸욱—.

“아?”

엘레인과 카르넬은 도약한 상태 그대로 강력한 빛의 검에 꿰뚫린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는 빛의 검.

그것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문득 괴물의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디네!”

그것은 엘레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이었다.

그렇게 반가움을 가득 담아 쿠당탕! 바닥을 나뒹구는 괴물을 무시하고 그 뒤를 바라보는데.

“어…. 누구세요?”

파도처럼 굽이치는 머리카락.

모든 것을 포용해줄 것 같은 자애로운 미소.

그리고 괴물보다 훨씬 거대한 몸집을 지닌 푸른 여인이 엘레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무웃?

“???”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깜찍하고도 익숙한 목소리에.

엘레인과 카르넬은 벙찌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