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운디네? 설마 진짜 운디네 너야?”
-무우웃!
(당연하지!)
운디네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동시에 파도치는 머리카락이 한껏 기울어지니, 그 아래에 있던 괴물이 머리카락의 무게에 짓눌려 비명을 질러댔다.
엘레인은 괴물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그제야 모든 것이 실감 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구나. 성공했구나!”
-무웃!
(응. 나 다녀왔어, 주인!)
“그래. 잘 돌아왔어. 고생 많았다, 우리 운디네.”
엘레인은 코앞까지 들이민 운디네의 커다란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
한 층 업그레이드된 괴물을 가뿐하게 처리할 만큼 운디네가 아주 강해져서 왔으니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여긴 엘레인과 카르넬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크르르륵….”
그때 묵직한 머리카락을 헤치고 엉금엉금 기어 나온 괴물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싸늘하게 식은 시선으로 그런 녀석을 내려다본 운디네는 조금 전 괴물에게 꽂아 넣었던 검 여러 개를 허공에 띄워놓으며 말했다.
-무뭇무.
(주인, 뒤로 물러나 있어.)
“응.”
엘레인은 군말 없이 카르넬을 부축하며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세계수의 힘을 양껏 흡수한 운디네는 정령왕급 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다행히, 앞서 정령문을 활성화시키느라 마력을 상당수 소모한 엘레인이 따로 도움을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무우우웃!
“크와아악!”
운디네와 괴물이 격돌했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번개 폭풍이 휘몰아쳤고 그 사이로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거 완전 재앙이잖아?”
역시 정령왕들의 싸움은 다른 걸까.
다른 재앙급 정령들은 하지 못했던.
날씨와 기후까지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저력에 엘레인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카르넬. 네가 보기엔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 것 같아?”
“내가 보기엔 운디네가 훨씬 우세한 것 같아. 같은 정령왕이라고 해도 급이 나누어지는 모양이야.”
“역시 그렇지?”
카르넬의 분석에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만에 하나…’하고 불안해하던 마음마저도 싹 사라졌다.
그리고 그 차이를 괴물 역시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지.
놈은 죽을힘을 다해서 힘을 끌어다 쓰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용트림.
훨씬 굵어진 번개부터 시작하여 불기둥과 거대한 나무줄기.
그 외에 갖가지 현상들이 운디네를 저지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무우웃!
(이까짓 거!)
운디네의 주위로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모든 현상을 집어삼키고 괴물까지 홀랑 삼켜버렸다.
이후 일대를 모두 휩쓸 것처럼 굴던 해일은 그대로 거대한 구체가 되어 운디네의 앞으로 떠올랐다.
“꾸르륵!”
정령은 숨이 좀 막힌다고 죽지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놈에게 당할 게 뻔하기에 괴물은 물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물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있는 힘껏 허우적거려도 계속해서 제자리에 멈춰 있을 뿐.
결국, 괴물이 이 끔찍한 물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운디네의 힘을 듬뿍 담은 신성한 물의 검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무웃!
(끝이다!)
그리고 운디네가 끝을 고하는 순간.
푸우욱—!
“크륵!?”
십여 개의 검에 박힌 괴물이 두 눈을 까뒤집었다.
쿨럭!
동시에 검은색 핏물이 깨끗한 물속에서 풀어지기 시작하며 괴물의 눈동자에 서린 빛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찾아온 것은 완벽한 죽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레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인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정말… 해낸 거야?”
-무우웃!
(완전히 끝내버렸어!)
파아앗. 물을 증발시키고 검은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괴물을 뒤로한 운디네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운디네의 외침을 들은 엘레인은 고개를 휙 돌려 카르넬을 마주 봤다.
“카르넬….”
“응. 정말로 끝이야.”
그리 말하는 카르넬과 엘레인의 머리 위로 서서히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끝임을 알리는 듯.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에, 엘레인은 긴장으로 다리의 힘이 쫙 풀려버렸다.
“괜찮아?”
“으응.”
카르넬이 휘청거리는 엘레인을 간신히 지탱해주었다.
덕분에 꼴사납게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던 엘레인은 이번 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자.
운디네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운디네. 정말 수고 많았어!”
-무우웃….
“운디네?”
그런데.
운디네가 좀 이상했다.
갑자기 상체를 굽힌 운디네가 온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엘레인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운디네, 왜 그래!?”
카르넬과 함께 허둥지둥 달려갔으나 운디네는 옹송그린 몸을 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마 세계수의 힘을 얻어낸 부작용인 걸까?
엘레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운디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커다란 몸에서 무언가 이변이 생겼다.
파아앗—!
“윽. 빛이….”
강력한 섬광이 두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 것처럼 다가왔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 눈이 멀어버릴지도 몰랐기에 엘레인과 카르넬은 서로를 꼭 껴안으며 고개를 팍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더 이상 빛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 천천히 고개를 든 두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경악하고 말았다.
-모잉?
“우, 운디네? 너 어떻게 된 거야?”
-무잉!
(나도 몰라!)
운디네가 활기차게 답했다.
딱히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지는 않지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운디네의 몸이 아주 작아졌다.
미니 운디네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말이다.
“운디네에게 느껴지는 힘도 훨씬 작아진 것 같아.”
“그런…. 혹시 세계수의 힘을 빌린 부작용일까?”
“그렇다기보다는 한 번에 많은 힘을 소모해서 생긴 일 같아.”
카르넬의 추측에 엘레인은 침음을 흘렸다.
하긴 세계수에게 빌린 힘 이상으로 운디네 본연의 힘을 더욱 끌어다 썼다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원래 힘을 복원하려면 최소 1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그만큼 지금의 운디네가 지닌 힘은 미약했다.
“이거 곤란한데…. 운디네. 혹시 지금 카르넬을 치료할 수 있겠어?”
-모이잉!
(한번 해 볼게!)
운디네는 카르넬의 날카로운 콧대 위에 사뿐히 내려앉더니 온 힘을 다해 그를 치료하고자 했다.
하지만.
-끄오옹…!
찌익—
-무잉?
아차차.
어째서인지 필요로 하는 치료의 힘은 전혀 나오지 않고 정령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맑은 물이 카르넬의 콧대를 살짝 적셨다.
민망함에 운디네가 얼굴을 붉히며 엘레인의 머리 뒤에 숨었고.
엘레인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변명을 했다.
“아, 아무래도 운디네의 힘이 너무 많이 약해졌나 봐. 지금 당장 치료해줄 순 없을 것 같아.”
“아니야. 네가 준 약 덕분에 어느 정도 회복이 됐는걸. 치료야 사제들의 힘을 빌리면 되는 거고.”
“그렇긴 하지만….”
엘레인은 카르넬의 상처를 깔끔하게 치료해주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그를 부축했다.
“이제 밖으로 나갈 방법만 찾으면 되겠네.”
“응. 그런데 세계수는 어떻게 하지?”
운디네가 세계수 밖으로 나오면서 엘리아스의 손과 정령문도 함께 사라졌다.
아마 많은 힘을 운디네가 흡수해서 나왔기 때문이리라.
조용해진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엘레인은 바닥에서 반짝거리는 구슬 하나를 찾아냈다.
무색투명한 구슬.
그것을 집어 든 엘레인은 카르넬에게 그것을 자세히 보여주었다.
“돌루스가 세계수를 담아갔던 그 구슬이야. 아마 이 구슬을 세계수에 갖다 대면 똑같이 담아서 가져갈 수 있을 거야.”
“좋아. 얼른 세계수를 담고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카르넬의 말마따나 그들은 돌루스와 괴물을 처치한 것이지 아직 이 공간을 빠져나갈 방법은 찾지 못했다.
여전히 이 광활한 숲에는 무시무시한 맹수가 도사리고 있고.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때까진 놈들과 지겹도록 마주쳐야 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세계수를 회수하고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야….
쩌어억—!
“어? 이거 무슨 소리야?”
귀에 거슬리는 소리에 엘레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차분하게 주위를 훑어보던 카르넬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좀 봐.”
“무슨… 하늘이 갈라지고 있어?”
엘레인과 카르넬은 서로 손을 꽉 맞붙잡았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듯.
하늘이 깨어진 유리 파편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기이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의 절반이 깨어져 나갔을 때.
파앗—!
검은 그림자가 두 사람을 확 덮쳤다.
* * *
“여긴…?”
한 차례 어둠이 두 사람을 휩쓸고 난 뒤.
다시 눈을 뜬 엘레인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의 무너지다시피 한 만신전.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파괴된 수도.
그리고 옅게 깔린 피 냄새까지.
“돌아왔어?”
어떻게 된 일인지 엘레인과 카르넬은 이상한 공간에 날려 보내기 전.
돌루스와 처음 대치했던 그 공간에 서 있었다.
쏴아아—.
산들바람에 거대한 세계수의 이파리들이 흔들렸다.
세계수의 안위까지 모두 확인한 엘레인은 문득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엘레인?”
“오르칼 오빠? 그리고 카론도….”
막 공간의 정령을 처치했는지 카론에게 멱살이 잡힌 무언가가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이상한 공간에서 갑자기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게 바로 저 두 사람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엘레인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다들 무사했구나!”
엘레인의 외침에 카론과 오르칼의 얼굴도 급격히 환해졌다.
하지만 엘레인이 누구와 손을 꼭 붙잡고 있는지 깨달은 두 사람은 곧 정색했다.
“황녀님. 왜 저 녀석이랑….”
당황한 카론은 황급히 칼을 갈무리하고 엘레인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말을 끝맺기도 전.
주위가 급격히 소란스러워졌다.
“우아아아악! 드디어 탈출이다!”
가장 먼저 라네즈가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온몸이 흙투성이인 그는 힘차게 만세 하며 자신의 기쁨을 표출해댔다.
그리고 그의 반대쪽에선 아르닐과 사프란이 연신 헛기침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흐흠. 벌써 빠져나왔네요.”
“커흠. 그러게 말이야. 길이 꽤 짧네.”
어쩐지 묘하게 핑크빛 기류를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가까워진 걸까?
순수한 호기심에 두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어색하게 웃고 있던 아르닐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엘레인! 너 무사했구나!”
“뭐? 엘레인 너도 이상한 공간에 휘말렸던 거야?”
아르닐과 라네즈가 차례대로 외치며 달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점차 달리는 속도를 줄였다.
“뭐야. 너희 둘 왜 그렇게 꼭 껴안고 있어?”
“어? 아! 그, 그러니까 이건….”
“너 미쳤어? 지금 어디를 만지고 있는 거야!?”
아르닐이 싸늘하게 말하며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썼으나, 라네즈는 아니었다.
그는 당장 엘레인의 허리에 얹고 있는 카르넬의 왼손을 탁 쳐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잠깐!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으, 응? 그야 저 녀석이 너를 꼭 껴안고 있잖아.”
깜짝 놀란 엘레인이 다그치자 라네즈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여동생을 사랑하는 오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지만, 엘레인은 이번만큼은 봐주지 않고 강하게 말했다.
“얘 다친 거 안 보여? 오히려 내 쪽에서 카르넬을 부축하고 있었던 거란 말이야.”
“아니, 아무리 다쳤다고 해도 왜 네가 직접 부축해주는 건데에….”
“그야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그러는 거지!”
깨갱.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라네즈가 상처받은 얼굴로 불쌍하게 눈을 떴지만, 엘레인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저 연기에 내가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엘레인은 카르넬의 왼손을 붙잡았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난 괜찮아….”
카르넬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말한 것과 다르게 그의 속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렸군.’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는 라네즈와 아르닐.
그리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하는 오르칼의 모습에서 카르넬은 순탄치 않은 미래를 맛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