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카르넬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에.
엘레인은 곧바로 제랄의 안내에 따라 카르넬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엘레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라네즈는 갑자기 제 앞을 가로막는 튼튼한 근육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합니다. 현재 황태자 전하께선 절대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 명씩만 뵐 수 있습니다.”
“뭐?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황태자 전하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여럿이서 우르르 들어가는 건 환자에게 스트레스를 다소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녀님의 면회가 끝나고 난 뒤에 따로 시간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라네즈는 할 말을 잃었다.
라네즈는 황태자 얼굴 따위가 보고 싶어서 따라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순전히 엘레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그 순진한 얼굴로 언제 소중한 여동생을 홀랑 잡아먹으려 할지 모르니까 옆에서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요량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라네즈. 쓸데없는 사고는 치지 말도록.”
“진심이야…?”
라네즈는 심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오르칼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난리를 피우지 않으면 저 음험한 놈의 소굴에서 우리 엘레인을 대체 어떻게 구출하라고?
라네즈가 말이라도 해 보라는 뜻을 담아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으나, 오르칼은 조용히 눈앞의 찻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보는 이들이 답답해질 정도로.
아주 천천히.
그에 라네즈가 가슴을 쿵쿵 내리치며 짜증스런 마음을 표출하고 있을 때.
엘레인의 허리에 손을 살짝 얹었다는 이유로 음험한 놈이 되어버린 카르넬은 꼼꼼하게 문을 닫고 쭈뼛쭈뼛 다가오는 엘레인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안. 시간이 좀 걸렸지?”
“아냐. 별로 오래 기다리지도 않았는걸. 게다가 그 정도 상처면 좀 걸리는 게 정상이지.”
엘레인은 도리질을 하며 카르넬의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카르넬을 치료해주던 사제들은 이미 모두 떠났는지 주위가 휑했다.
포근해야 할 침실이 어쩐지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생각한 엘레인은 조심스레 침상 앞에 놓인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몸은 어때? 사제님들이 깔끔하게 치료해준 거야?”
“그게….”
카르넬은 어색하게 웃으며 엘레인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엘레인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어?”
“으음…. 실은 이거 사제들이 못 고치겠대.”
엘레인의 집요한 시선에 카르넬은 멋쩍게 웃으며 이불 아래에 감추어진 오른팔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은 엘레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뭐? 설마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던 거야? 설마 단순 골절이 아니라 분쇄 골절이었다던가!?”
분쇄골절쯤 되면 뼈가 아주 산산조각이 나서 사제라도 치료가 불가능하다.
신성력의 질만 높다면 깨끗하게 잘린 손을 붙일 만큼 사기적인 성능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피부조직 아래에서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진 뼈를 저절로 원래 있던 곳으로 이동시키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어쩌면 카르넬은 평생 오른팔을 사용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아니, 나는 단순 횡골절이야. 다행히 3개월 정도면 뼈도 다 붙는다고 하고.”
카르넬은 엘레인이 더 큰 오해를 하기 전에 재빨리 끊어냈다.
덕분에 엘레인은 안심할 수 있었지만,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횡골절이라면 뼈 맞추고 바로 신성력으로 회복 가능한 거 아니야?”
“보통이라면 그럴 건데 지금 내 몸에 신성력이 통하지가 않아서 문제야.”
“뭐…?”
엘레인은 놀라 입을 딱 다물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니.
그게 대체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혼란스러움에 동공을 잘게 떨고 있는데 카르넬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정령왕급 괴물에게 당한 상처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사제들이 신성력을 불어넣었지만, 이상하게 어떠한 힘이 계속해서 신성력을 밀어낸다고 하더라고.”
“아.”
어디선가 익숙한 현상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카론도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지하 창고문을 따려다가 정령 여왕….
아니, 엘프 왕이 건 결계에 튕겨져 나가 왼팔이 부러졌었지.
“격의 차이 때문에 그런 거였구나….”
엘레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나마 물약이 든 건 약의 성분이 체내에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치료해줄 수 있는 신성력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기운이기 때문에 카르넬의 몸에 스며든 괴물의 잔여 기운.
즉, 격의 차이에 밀려나고 만다.
‘운디네가 미니 운디네로 변하기 전에 바로 카르넬을 치료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카르넬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 터였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기회.
일이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부러진 팔이 전부 나을 때까지 부목을 대고 살 수밖에 없다.
엘레인은 떨리는 동공을 들어 여전히 포근한 이불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의 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필 주로 사용하는 오른팔을 다쳤으니 한동안 얼마나 힘들고 불편할까?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울 텐데 그는 왼쪽 발목도 크게 다쳤으며, 어쩌면 갈비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른다.
숨 쉬는 게 지금도 영 불편해 보였으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이 나을 때까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내 부주의로 다친 상처인데.”
“하지만 날 지키려고 나서지 않았으면 다치지 않았을 상처잖아.”
엘레인은 무릎 위의 주먹을 꼭 그러쥐며 고개를 푹 숙였다.
깊이 자책을 하는 듯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몸이 무척 안쓰러웠다.
“엘레인. 잠깐 나 좀 봐줄래?”
“응…?”
엘레인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앙다문 채 카르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햇살처럼 밝게 웃은 카르넬이 멀쩡한 왼손을 들어 엘레인의 뺨을 쓸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의지였어.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자책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뜻이야.”
“그렇지만….”
“비록 오른팔은 한동안 사용할 수 없게 됐지만, 왼팔은 멀쩡하잖아? 이렇게 널 만질 수도 있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넌 아니야?”
엘레인은 차마 그렇지 않다고 말하진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그에 피식 웃고만 카르넬은 손을 내려, 무릎 위에 힘을 꽉 주고 있는 엘레인의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네가 무사해서 참 기뻐.”
“응. 나도 기뻐.”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나도…. 나도 네가 살아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
엘레인은 그의 말에 진심을 담아 대답하며 카르넬의 손을 맞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손.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나누었다.
***
고대의 정령들이 대거 나타나, 수많은 피해를 입히고 난 다음 날.
신성제국 황궁의 일상은 전에 없던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바쁘게 돌아갔다.
“엘레인은 어디에 있어?”
“황태자 전하의 방에 계십니다.”
“허! 한 시간 전에도 그 녀석 방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렇습니다만.”
“으. 미치겠네!”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마구 헝클이며 짜증을 내는 라네즈.
그의 전담 시종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답답해서 안 되겠다. 거기 너. 연무장으로 안내해.”
“아, 알겠습니다.”
시종은 혹여나 목이 날아갈세라 빠릿빠릿하게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원래라면 외부인.
그것도 오랜 경쟁국이나 다름없는 베네딕트 제국의 사람이라면 절대 나라의 국방력이 드러나는 장소에 다가가선 안 되지만, 그는 신성제국을 지킨 영웅 중 한 명이다.
이미 그들의 활약을 본 수많은 제국민들은 베네딕트 제국에 대한 오해와 고정관념 따위를 벗어던지고 그들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중이었고.
거기다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든 악당.
돌루스를 처치하기 위해 신성제국과 베네딕트 제국이 손을 잡았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자 제국민들은 더 이상 베네딕트 제국을 경쟁국이 아닌, 가까운 우방국으로 이야기하며 그들의 도움을 기꺼워했다.
그 덕분인지 황궁 내에서 황자들과 황녀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아주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겁에 질렸던 자들도 이제는 멀찍이서 동경의 눈빛을 보냈으며.
엘레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렸던 자들도 한껏 몸을 수그리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영웅들을 홀대했다가는 성황에게 좋지 못한 소문이 퍼질 터.
그 때문에 성황은 전날 밤.
영웅들에게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라 명했고, 원하는 건 될 수 있으면 들어주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그런데.
‘서, 성황 폐하.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시종은 떨리는 눈을 들어 눈앞의 상황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비록 라네즈는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무념무상으로 검을 휘두를 장소를 찾은 것이지만.
연무장에서 미리 훈련 중이던 성기사들은 영웅과 직접 실력을 겨뤄 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
“으아아악!”
“고작 그 정도냐? 제대로 덤벼 봐!”
시종은 사람이 이렇게나 종잇장처럼 쉽게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소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시종은, 두 눈을 꾹 감은 채 성기사들의 우렁찬 비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그는 라네즈의 합법적인(?) 깽판을 외면할 게 아니라 두 귀를 막았어야 했다.
퍼엉—!
쿠콰앙—!
“헉! 무, 무슨 일이야?”
한창 라네즈와 대련 중이던 성기사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황궁 외벽을 쳐다보았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후두둑 떨어지는 벽돌.
테러라도 당한 듯한 현장에 다들 검을 빼 들고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콜록, 콜록. 아…. 또 실패네.”
처참하게 부서진 곳에서 걸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아르닐이었다.
그는 음침한 로브 모자를 뒤로 휙 젖히더니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뭐야. 대체 뭘 만들기에 네가 실패라는 걸 해?”
라네즈가 휘적휘적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에 묻은 숯검댕을 가볍게 슥 닦아낸 아르닐은 성기사들과 사이좋게 모여 있는 라네즈를 힐끔 쳐다보더니 혀를 쯧 하고 찼다.
“황태자를 치료할 약. 저 빌어먹을 뼈를 빨리 붙여야 우리 엘레인이 간병하러 들어가지 않을 거 아니야.”
“뭐? 뼈를 붙이는 약도 있어?”
“아니. 없으니까 내가 직접 만들려는 거지.”
아르닐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없는 약을 만들어 낸다니.
성기사들은 ‘세상에 그런 약이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건가?’ 싶은 얼굴로 멀뚱멀뚱 아르닐을 쳐다보았다.
“뭐야. 뭘 그렇게 쳐다봐?”
“아,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저게 약을 만들다가 생긴 폭발 사고입니까?”
“그런데, 왜.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불만은 아닌데… 대체 재료가 뭐기에 폭발까지 일어나는 건지….”
“아아. 대충 메인 재료로는 고블린 발톱에 미노타우르스 꼬리털, 슬라임 핵, 그리고 인어 이빨 정도가 들어가.”
“예?”
서서히 나열되는 심상치 않은 내용에 성기사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저런 재료가 듬뿍 들어간(듬뿍이라곤 안 했다) 약을 우리들의 황태자 전하에게 먹이려고 하다니!
설마 독살하려는 건가!?
“어쨌든 보수 공사할 사람 좀 불러와 줘. 약 만드는 걸 남들한테 보여주는 취미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 그런….”
“뭐야. 우리가 원하는 건 다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다는 아니고 어느 정도 가능한 것들만 해준다고 했는데요!
성기사들은 서늘한 눈을 번뜩이는 아르닐을 보며 진땀을 뺐다.
그렇다고 황태자 전하를 낫게 하기 위해 친히 약을 만드신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황궁을 터트리시는 건 좀 곤란….’이라며 막아 세울 수 없다.
“…바로 데려오겠습니다!”
결국, 성기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르닐의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