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6화 (365/417)

366화

한편, 엘레인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흠칫. 몸을 굳혔다.

“들었어? 지금 그거 폭발음 맞지?”

“음. 그런 것 같은데.”

“설마 무슨 사고라도 친 거 아니야?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그렇게 당부했었는데….”

엘레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카르넬의 얼굴을 닦고 있던 물수건을 걷어냈다.

어젯밤 엘레인은 황자들에게 분명히 말해두었다.

혹시라도 신성제국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베네딕트 제국에 돌려보낼 거라고.

그런데 약속을 받아낸 지 고작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바로 문제를 일으키다니.

엘레인은 황당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 섞인 눈으로 카르넬을 바라보았다.

“아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던데. 아마 대련하면서 생긴 소리일 거야. 가끔 있는 일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 그런 거였어?”

엘레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카르넬이 그렇다며 싱긋 웃었다.

사실 지금껏 연무장에서 저런 폭발음이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카르넬은 높은 확률로 사고를 일으켰을 게 분명한 황자들을 변호해주었다.

아무리 쫓아내는 사람은 엘레인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안 좋게 헤어지면 안 그래도 바닥인 카르넬의 점수가 더욱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만약 우리 오빠들이 하루도 못 참고 사고 친 거였으면 정말 화날 뻔했어.”

카르넬은 조용히 웃었다.

‘이걸로 소중한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게 됐군.’

그런다고 황자들이 알아줄 것 같진 않지만….

어쨌든 카르넬은 조금 뿌듯해졌다.

“그나저나 답답하지 않아? 이렇게 좋은 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하다니. 지루할 것 같은데.”

“전혀. 엘레인 네가 옆에 있어 줘서 답답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아.”

엘레인은 사르르. 눈을 접으며 하는 카르넬의 말에 입을 딱 다물었다.

저렇게 치명적인 얼굴로 그렇게 달아 빠진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새삼 심장에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너… 혹시 아카데미 다닐 때 연애 학과 뭐 이런 거 나온 거 아니지?”

“음? 난 따로 아카데미에 다닌 적이 없는데…. 그리고 내가 알기론 연애에 관련된 학과는 따로 없어.”

“그렇구나.”

엘레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카르넬은 흐음. 침음을 흘리더니 문득 상체를 기울여 엘레인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 그건 왜 묻는 건데?”

“왁!”

엘레인은 갑자기 훅 다가온 치명적인 얼굴에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입술 박치기를 할 뻔했기 때문에 놀란 심장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다.

“까, 깜짝 놀랐잖아. 아픈 사람이 그렇게 막 움직여도 되는 거야?”

“아, 미안해.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카르넬은 머쓱한 듯 한쪽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그에 엘레인은 자꾸만 촉촉한 그의 입술로 이동하는 시선을 애써 떼어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서? 아까 그런 질문을 한 이유가 뭐야?”

“그걸 꼭… 물어봐야겠어?”

어쩐지 집요한 그의 물음에 엘레인은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몰랐는데 카르넬은 조금 짓궂은 면모가 있었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하게 만들다니….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엘레인은 재촉하는 그의 눈빛을 슬그머니 피하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하는 말마다 전부 낯간지럽잖아.”

“아…. 그래서 싫은 거야…?”

“아니! 하나도 안 싫은데!?”

처연하게 떨어지는 그의 눈썹에 당황한 엘레인이 삑사리까지 내가며 소리쳤다.

그에 카르넬이 크큭. 숨을 죽이고 웃자, 엘레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우, 웃지 마. 창피하단 말이야.”

“아, 미안. 크흠. 어쨌든 싫은 건 아니라는 거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힌 카르넬이 헛기침을 하며 말하자 엘레인은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지금은 내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 싫어하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거든.”

“싫기는. 오히려 조, 조, 조오….”

“좋아한다고?”

“으응….”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는 것이 아직은 어색한 엘레인이 냉큼 긍정을 표했다.

그에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린 카르넬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있잖아, 엘레인.”

“왜?”

“어느 정도 나으면 우리 같이 놀러 갈까?”

솨아아—.

밖에서 불어온 봄바람이 카르넬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어 놓았다.

그 그림과도 같은 풍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어디든.”

어느새 고개를 돌린 카르넬은 엘레인을 짙게 응시했다.

전날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으며 다시 한번 속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날 엘레인은 카르넬의 두 번째 고백을 받아들였고.

아까 전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었다.

정말이지 사랑스럽게도 말이다.

그리고 카르넬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소중한 연인이 곁에 있어서 현 상황이 답답하거나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엘레인에게 너무 미안했다.

기껏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이렇게 방안에 갇혀 간병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곧바로 엘레인에게 즐거운 기억을 심어주고 싶었다.

최소한 몸을 일으키고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바로 나들이를 갈 수 있겠지.

“산도 좋고 바다도 좋아. 아, 멀리 가는 게 부담되면 지난번에 갔던 호숫가를 다시 찾아가는 건 어때?”

비록 후반부에 습격을 받으면서 좋지 않은 기억이 심어졌겠지만, 엘레인이 호숫가를 꽤 마음에 들어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장소 또한 후보로 넣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쁜 기억이야 좋은 기억들로 덮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으음. 아무래도 가까운 쪽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엘레인은 카르넬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지 그의 오른팔을 보며 그리 말했다.

이왕이면 엘레인이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를 골라줬으면 하는데….

카르넬은 눈꼬리를 축 늘어트리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아냐. 그냥 호숫가가 제일 나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밤에 본 호숫가랑 낮에 본 호숫가는 또 다를 거 아니야. 그러니까 거기로 갈래.”

누가 봐도 카르넬의 몸을 신경 써서 한 말이지만, 엘레인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그에 피식 웃고만 카르넬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네가 좋다면야…. 그래. 거기부터 가자.”

“잘 생각했어!”

카르넬의 결정에 엘레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걸로 카르넬이 무리할 일을 빼놓았으니 상처가 덧나거나 할 일은 없겠지.

‘그나저나 카르넬. 말로는 아니라곤 했지만, 역시 많이 답답했나 보네.’

다 나아서 가는 편이 좋을 텐데. 굳이 ‘어느 정도 나으면’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가 바로 그것일 터다.

저 보아라.

벌써부터 마음은 바깥에 나가 있는지 손가락을 자꾸만 꼼지락거리고 있지 않은가.

‘마음만 같아선 완전하게 다 나을 때까지 외출을 삼가는 게 좋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래도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아쉽지만 엘레인은 자기 자신과 타협을 봤다.

무엇보다도 카르넬이 다 나을 때까지 계속 신성제국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저렇게까지 좋아하니까 굳이 초를 치는 말을 하진 않았다.

뭐, 이런저런 말을 해 봤자 카르넬과의 데이트가 기대되는 게 가장 크지만 말이다.

“으음.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요리는 아직이네.”

그때 카르넬이 시계를 힐끗 보며 말했다.

이것 또한 어제 처음 알게 된 거지만, 카르넬은 은근히 정해진 시간에 꼭 식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평소 카르넬은 자기 식사 시간을 그리 챙기지 않았다.

그 딴에는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엘레인이 식사를 거르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쓰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엘레인은 재빨리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젖히며 말했다.

“시종은 안 올 거야. 네 점심밥은 내가 준비했거든.”

“뭐? 그게 정말이야?”

“응. 뼈에 좋은 걸로 준비해 봤어.”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하는 말에 카르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엘레인이 날 위해 직접 점심밥을 준비해왔다니….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그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벌어진 입을 왼손으로 가렸다.

“고마워. 준비하는 데에 많이 힘들지 않았어?”

열 시쯤부터 찾아와서 간병을 시작했으니 엘레인이 그를 위해 식사 준비를 시작한 건 그보다 더 이른 아침일 것이다.

그 부분을 안타깝게 여기어 말하자 엘레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다지. 널 위한 거라서 그런지 힘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어.”

그리 말한 엘레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깨끗한 그릇과 스푼을 꺼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온병이라는 이름의 아티팩트를 준비했는데, 뚜껑을 열자마자 그곳에서 고소한 냄새가 솔솔 흘러나왔다.

“냄새 좋다.”

“그렇지? 이거 사골 수프라는 건데 뼈에 좋은 건 물론이고 기력까지 회복해줘.”

엘레인은 싱긋 웃으며 쪼르르. 그릇 안에 수프를 담았다.

그런데.

“으음…. 엘레인? 원래 사골 수프라는 건 이런 색인 거야?”

카르넬은 그릇 안에 담기면서 노출된 사골 수프의 색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사골 수프의 색깔은 모든 식욕을 앗아갈 것처럼 오묘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회색 수프라니.

난생처음 보는 무채색 음식의 등장에 퍽 당황해하자, 수프로 내용물을 듬뿍 뜬 엘레인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사골 수프만 먹기엔 아쉬울 것 같아서 콩을 통째로 갈아서 넣었어. 콩도 뼈에 좋거든.”

“아. 그런 거였구나. 혹시 요리에 콩가루 말고 다른 걸 넣기도 했어?”

“어떻게 알았어? 우유도 좀 넣었는데. 처음 시도해보는 거라서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

“…….”

카르넬은 침묵했다.

그냥 뼈에 좋다는 건 다 때려 넣었구나. 싶으면서도.

저 무채색 수프를 대체 어떻게 다 먹지? 하는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자, 아~ 해 봐.”

후후. 정성스럽게 수프를 식힌 엘레인이 스푼을 그의 입술 가까이에 갖다 대었다.

엘레인이 직접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를 거절할 수도 없고.

그냥 겉보기에만 이상한 걸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진 카르넬은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음식을 그대로 받아먹었다.

그리고.

“큽!?”

카르넬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사골 수프만 넣었으면 왠지 달랐을 것 같지만, 엘레인이 카르넬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것일까?

그의 뼈 건강을 위해 추가한 우유와 콩의 비린내가 그의 비강을 꽉 채웠다.

“어때? 맛있어?”

그때 조마조마한 얼굴의 엘레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모습에 흔들리는 동공을 애써 붙잡고 입안의 수프를 꿀꺽. 힘겹게 삼킨 카르넬은, 1분 전보다 좀 더 핼쑥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맛있어.”

“정말!?”

“응. 정말로.”

카르넬이 힘겹게 웃으며 말하자 엘레인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사실 사골 수프는 뼛속까지 가난했던 용병 시절에 어떻게든 버려지는 뼈를 식용으로 활용하고자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천상의 음식이었다.

딱히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엘레인에게 그냥 푹 고아서 먹기만 하는 사골 수프는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든든하게 속을 채워주고 맛까지 좋은 효자 요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거기에 콩과 우유를 추가하는 건 엘레인도 이번이 처음이라 그다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없어서 맛도 제대로 못 보고 급하게 요리를 담아서 왔기 때문에 많이 걱정했는데.

카르넬의 입맛에 맞다니 천만다행이었다!

‘후우. 잘했다. 정말 잘 넘겼어.’

그러는 한편, 카르넬은 기뻐하는 엘레인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오늘처럼 자기 자신이 장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다.

셀프 칭찬하듯 제 무릎을 툭툭 토닥인 카르넬은 아까보단 조금 나아진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짠! 여기 더 있으니까 많이 먹어!”

“아…?”

카르넬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느새 아공간 주머니를 활짝 열어젖힌 엘레인이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보온병 아티팩트를 왕창 꺼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 둘 셋.

점점 개수를 늘려가며 기어코 열 병을 채운 보온병의 향연에, 카르넬은 사색이 된 얼굴로 생각했다.

연인 사이가 된 지 고작 두 번째가 되는 날.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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