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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화 (366/417)

367화

쪼르륵. 와인잔으로 새빨간 액체가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영웅을 대접함에 있어, 부족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일까?

황궁에 있는 것 중 가장 최고급으로 가져온 와인이라서 그런지 향이 끝내주게 좋았다.

하지만 최고급 와인을 앞에 둔 오르칼의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감동은커녕 오히려 아주 지루하다는 듯, 긴 손가락을 뻗어 테이블을 간헐적으로 두드릴 뿐이다.

테이블 위의 스테이크가 싸늘하게 식든 말든.

그렇게 한참을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은 시종이 모든 행동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서야 우뚝 멈췄다.

“엘레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황태자 전하의 간병을 하고 있습니다.”

“더 자세히.”

“그… 10분 전 확인한 결과, 새벽 내내 자리를 지켜가며 만드신 특제 수프를 황태자 전하께 직접 손으로 떠서 먹여주고 계셨습니다.”

시종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엘레인이 직접 점심밥을 만들어 줄 거라고 요리사와 담당 시종에게 미리 말해뒀기 때문에, 깜빡 잊고 황태자 전하의 식사를 가져온 것처럼 연기해야 했으나.

덕분에 진귀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 물론 그조차도 오르칼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흐음…. 그걸 진짜로 받아먹었다고?”

한편 오르칼은 카르넬이 엘레인이 손수 만든 수프를 받아먹었음에 화를 내기보다, 놀랍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그는 이미 엘레인이 밤을 꼬박 새워가며 수프를 만들었다는 것을 저 시종의 입으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

하물며 그 재료와 조리 과정도 아주 낱낱이 말이다.

팔팔 끓는 물에 뼈를 오랜 시간 우리고.

검은콩을 우유에 불린 후 바로 잘게 갈아낸 것을 듬뿍 넣은 후.

검은콩을 불리는 데에 사용된 우유도 함께 넣어서 마무리했다고 했었던가.

아무리 오랜 시간 뼈를 푹 고아내어 잡내가 나지 않는다고 한들.

콩 비린내와 우유 비린내가 끼어든다면 결코 좋은 맛 평가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얌전히 받아먹고 있었다라….

“먹고 있을 때 표정은 어땠지?”

“예? 아…. 제가 들어갔을 때는 스푼이 입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라, 갑자기 들어온 저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어…. 그리고 또 절 보고 조금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알 만했다.

갑자기 등장한 시종이 엘레인의 특제 수프의 늪에서 구해줄 구세주쯤으로 보였겠지.

뭐, 맛의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구수한 사골 수프 냄새를 직접 맡아본 저 시종의 입장에선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테지만 말이다.

“표정은 됐고. 그래도 수프가 얼마나 줄어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앗, 네. 절반 정도 줄어있었습니다.”

“그렇군. 생각 외로 강단이 있는 녀석이군.”

그리 말하는 오르칼의 얼굴은 꽤나 즐거워 보였다.

어쩐지 깨소금 맛이 나는 것 같은 얼굴이랄까.

하여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시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오르칼이 문득 상체를 뒤로 젖히며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렇듯 거만함이 가득 담긴 행동에.

시종은 허둥지둥 오르칼의 옆으로 달려와 읍했다.

“하명하십시오…!”

오르칼은 뭐든지 시켜만 달라는 듯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부시종장.

정확히는 카르넬의 직속 시종 다음으로 카르넬과 자주 접촉하는 시종이라 그런지 그가 물어오는 정보들은 상당히 질이 좋았다.

덕분에 실제 카르넬이 어떤 사람인지.

또 그가 엘레인을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 그는 흡족한 얼굴로 시종을 바라보았다.

“네가 해줄 일은 이제 없다.”

“예?”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흡족한 표정과는 정반대의 말이었다.

동시에 그의 뒤에서 불쑥 나타난 그림자 때문에 화들짝 놀란 시종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쿠!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불안한 눈으로 오르칼과 그림자를 번갈아 보던 시종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벌렸다.

“호, 호,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요?”

“아니, 없다.”

“그, 그럼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히익! 설마 증거를 인멸하려고 그러는 건가요? 제가 이제 쓸모없어져서?”

“…?”

오르칼과 그림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엎드려서 벌벌 떠는 시종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잡아서 죽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앞으로 정보를 물어올 필요가 없다고 했을 뿐인데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쉿. 자꾸 떠들면 진짜로 죽이는 수가 있으니 조용히 하십시오.”

“히끅.”

결국, 보다 못한 그림자가 경고를 하고 나서야 시종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아티팩트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아. 받을 거나 얼른 받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예…?”

양손으로 입을 막고 있던 시종이 멍하니 되묻자 그의 앞으로 묵직한 주머니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살짝 열린 입구 사이로 금화가 여럿 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시종은 그제야 오르칼이 저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약속한 금액을 주려 했음을 깨달았다.

“하핫. 제가 괴상한 오해를…. 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시종은 혹여나 그림자가 금화 주머니를 도로 가져갈세라 재빨리 제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힐끗. 오르칼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런데 왜 벌써 약속한 금액을 주시는 건가요? 황녀님과 황태자 전하 사이를 살펴본 지 고작 하루도 안 지났는데요.”

약속한 금액을 받았으니 입 싹 닫고 그대로 돌아가면 되었지만,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시종이 조심스레 그의 심기를 살피며 묻자, 입꼬리를 비죽 말아 올린 오르칼이 와인잔을 모로 기울였다.

“궁금한 것은 이미 다 알았으니 되었다. 그리고.”

“그리고…?”

꿀꺽.

값비싼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인상을 찡그린 그는 차라리 로열 블루베리 와인을 마실 것을 그랬다며 깊이 후회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독촉 편지에 시선을 주며 말하기를.

“아무래도 지금 당장 귀향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그리 말한 오르칼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엘레인이 오기만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엘레인을 데려오기 위해 재밌는 짓을 저지르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얼른 베네딕트 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

청명한 하늘 아래.

황태후는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홍차를 들이켰다.

“후….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라니.”

하지만 맑은 하늘과 달리 황태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이들과 헤어진 지 고작 이틀째지만, 그 아이들이 간 곳은 무려 전쟁터였다.

그러니 이런저런 걱정이 들 수밖에.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황태후는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신성제국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서 시녀장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태후의 앞에 당도했다.

“황태후 전하. 급히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설마 아이들이 돌아온 것이냐?”

황태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시녀장의 얼굴은 반대로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는 황태후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누가 들을세라, 귓속말로 무어라 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황태후는.

“뭐라? 그게 정말이냐?”

“예…! 본의 아니게 들은 거지만, 정보대신과 외무대신이 하는 이야기이니 확실합니다!”

“이럴 수가. 그 아이라면 고작 그런 일을 당했다고 그리되진 않을 것인데.”

확신에 가득 찬 시녀장의 말에 황태후는 혼란스런 얼굴을 했다.

그만큼 그녀가 전달한 정보는 믿기 어려웠다.

소드 마스터나 되는 실력자가 무려 높은 곳에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니.

이건 뭐. 상공 2km에서 무방비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얼른 가 봐야겠다!”

하지만 황당함도 잠시.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

그리 여긴 황태후는 곧바로 황제가 있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발 시녀장이 정보를 잘못 알아 왔기를 염원하면서.

그렇게 잰걸음으로 이동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제의 방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황태후 전하?”

“이곳엔 어인 일로….”

“다들 물러나거라!”

아들이 다쳤는데 가장 먼저 달려와서 제게 알리기는커녕 비밀에 부치고 있다니.

괘씸했지만, 일단 대신들을 질타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룬 황태후는 곧바로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들아! 대체 어떻게 된…!”

하지만 황태후는 곧바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다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아들 녀석은 너무나도 멀쩡하게 서서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예까지 무슨 일로….”

“지금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아. 보시다시피 물건을 관리하고 있습니다만.”

황제가 엘레인이 선물로 준 컬렉션 중 하나인 꽃반지를 미니 먼지떨이로 톡톡 털며 말했다.

그 대수롭지 않은 대꾸에, 황태후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줄 아는 건가?

뭐, 황태후 자신이 아팠다고 해도 손녀딸 컬렉션을 직접 관리하는 건 하루도 빼먹을 수 없는 일과이긴 하지만.

지금 황제는 경우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너, 다리를 다쳤다고 하지 않았느냐? 골절이라고 들었는데 그렇게 돌아다니면 어쩌자는 것이야?”

“그렇군요. 아직은 알리지 말라 했는데 벌써 어머니의 귀에 들어간 겁니까.”

황제가 싸늘한 눈으로 문 너머를 바라보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정보대신과 외무대신이 황급히 몸을 숨겼다.

그에 혀를 쯧 찬 황제는 보란 듯이 오른쪽 다리를 바닥에 쿵쿵 내리찍었다.

“자. 보셨지요?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뭐, 조만간 대외적으로는 다친 것으로 알려질 테지만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황태후는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에 한숨을 푹 내쉰 황제는 ‘이것까진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하는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게 무어냐?”

“오르칼이 전날 밤 제게 보낸 편지입니다. 읽어보시면 제가 왜 이러는지 알 겁니다.”

“뭐? 그렇게 중요한 걸 왜 이제 알려주는 것이야?”

“이 편지를 읽어봤자 기분만 안 좋아졌을 테니까 그런 겁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뉘앙스의 말에 황태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편지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편지지를 펼쳐 든 황태후는 황제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분의 걱정을 줄이기 위하여 현재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여 전해드립니다.

전날, ‘적’들을 안전하게 토벌하였고, 지금은 신성제국 황태자에게 초대받아 신성제국 황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원래라면 정중히 거절하고 바로 귀향해야 하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신성제국 황태자가 엘레인을 구해주려다가 팔이 부러졌는데.

그것이 마음 쓰였는지 우리의 착한 엘레인이 황태자의 “수발”을 직접 들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아마 한동안 귀향길에 오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병마에 의해 쓰러지신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하여튼 일이 이렇게 되었음을 미리 알립니다.

그럼 이만.>

편지지 내용을 모두 정독한 황태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오르칼답게 깔끔한 정리였으나 중간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었다.

“우리 엘레인이 황태자의 수발을 직접 들고 있다고? 너는 그래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거고?”

“예. 이미 오르칼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조만간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허어.”

황태후는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를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르칼이 마지막에 쓴 ‘아버지께서 병마로 쓰러지신다면….’이라는 글을 보고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지른 것 같은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단 말이냐? 황제나 돼서 꾀병이나 부리고 말이야.”

황태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질타했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역으로 그녀를 나무랐다.

“그러면, 어머니. 하나밖에 없는 딸이. 남의 사내자식 수발을 든다는데 가만히 있습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해버리니 그녀도 할 말이 궁색해졌다.

꼭 제 손녀딸 일이 아니더라도.

제국의 황녀나 되는 사람이 타국에 가서 황태자의 수발을 든다는 게 썩 좋게 들리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제가 아픈 척을 하는 겁니다.”

“으음. 그, 그렇구나.”

이쯤 되니, 황태후도 황제를 계속 나무랄 수 없게 됐다.

방법이 좀 잘못된 것 같긴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마음을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렇듯 황태후가 반대로 설득당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자.

황제는 대뜸 그녀의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도 그냥 같이 아픈 척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뭐? 나도 말이냐?”

황태후가 멍하니 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황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예. 그러면 효과도 두 배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속삭이는 황제는.

마치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악마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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