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8화 (367/417)

368화

황태후는 솔깃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같이 앓아누우면 효과가 두 배라니.

확실히 그럴듯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 나까지 앓아누우면 국정은 누가 보라는 것이냐?”

“아,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어머니께선 간병인 역할을 해주십시오. 기왕이면 실감 나게 부탁드립니다.”

“아니. 지금 그게 말이라고….”

황태후는 나까지 사기극에 동참시키는 거냐고 따지기 위해 황제를 찌릿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

어딘가로 도망간 줄 알았던 정보대신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폐하! 황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 순간.

장내에 커다란 바람이 일었다.

황태후는 치맛자락이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니, 바람을 일으킨 원인.

더글라스 베네딕트가 신속한 손놀림으로 컬렉션을 전시한 유리 장식장을 흰 천으로 덮고 있는 게 보였다.

이후 모든 컬렉션을 감추는 데에 성공한 그는 곧바로 상의를 벗어 던지고 환자복으로 환복한 뒤.

바람처럼 달려가,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갔다.

“허어.”

황태후는 감탄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숨을 토해내며 입을 벌렸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단 10초였다.

고작 10초 만에 완벽히 환자로 변신한 아들내미를 경악스런 눈으로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원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른 진행해라!”

“예!”

누군가의 외침에 의원들이 잽싸게 이불을 걷어냈다.

그리고는 차마 벗지 못한 황제의 슬리퍼를 벗겨낸 뒤 재빨리 멀쩡한 다리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이걸 보고 아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참으로 치밀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황태후가 연신 헛웃음을 삼키며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의원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읍했다.

“전하, 지금 폐하께서 위독하신 상황입니다!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뭐…?”

황태후는 매우 당혹스런 얼굴로 의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무어라 반박하기에 앞서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마치 황제가 진짜로 위독한 것처럼 침통한 분위기여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뒤.

“아빠!”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며.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엘레인이 등장했다.

***

세 황자들과 함께 황제의 방에 도착한 엘레인은 가장 먼저 황태후의 축 처진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르칼에게 황제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를 다쳤는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듯 심각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도착하기 전까지 ‘뭐라는 거야! 아버지가 다쳤을 리가 없잖아!’라며 부정하던 쌍둥이 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가 다치다니….”

“나, 이렇게까지 기운이 약해진 아버지는 처음 봐. 설마 드래곤이라도 왔다 간 건 아니겠지?”

소드 마스터나 되는 괴물을 다치게 할 존재는 세상에 몇 없었다.

그 몇 없는 존재 중 하나를 꼽은 아르닐은 라네즈와 함께 퍽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렇게 모두가 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엘레인은 조심스레 황태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가야….”

황태후는 우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엘레인을 돌아보았다.

어쩌다 보니 이 어이없는 연극에 동참하게 됐지만, 그녀는 나름 이쪽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물론 완벽하게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얼굴과 다르게.

그녀의 입술은 당장이라도 ‘쟤 지금 꾀병 부리는 거란다.’라는 말을 뱉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간. 두 눈을 감은 채 사경을 헤매는 척을 하고 있는 아들 녀석은 물론이고.

앞서 분위기를 잡고 있던 황태후 자신마저도 엘레인에게 원망스러운 눈길을 받게 될 터다.

이미 한배를 타고 말았음을 깨달은 그녀는 몹시 비통한 얼굴로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글쎄 저 아이가 알고 보니 몽유병이 있었지 뭐냐.”

“네? 몽유병이요?”

예상치 못한 병명에 엘레인은 물론이고 쌍둥이 황자들마저 화들짝 놀라자.

기절한 척. 두 눈을 감고 있던 황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가 없는(사실 알아도 정정할 생각이 없는) 황태후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후우. 그렇단다. 몽유병. 그 악마 같은 병 때문에 전날 밤 저 아이가 황궁 가장 높은 지붕 위에 맨몸으로 올라갔단다.”

“설마….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신 거예요?”

“그래. 꿈속에서 독수리라도 됐는지. 그대로 몸을 던졌지 뭐니. 다행히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찌저찌 착지하긴 했지만…. 그 충격으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버렸단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황태후는 충격받은 엘레인을 보며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 쌍둥이 황자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소드 마스터나 되는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은 누가 봐도 믿기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태후는 이렇듯 그럴듯한 살을 덧붙여 이야기를 꾸며내었고.

덕분에 엘레인은 황태후의 말을 철석같이 믿을 수 있었다.

그 대신 황제는 하루아침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짓을 서슴지 않는 몽유병 환자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으, 으음….”

빈약한 이야기에 살을 덧붙여준 것은 감사하지만, 스토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여태 기절한 척을 하고 있던 황제가 슬그머니 소리를 내며 두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아빠!? 정신이 들어요?”

엘레인이 깜짝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희미하게 물체가 보이는 척.

의식이 가물거리는 척.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 그는 가만히 엘레인을 응시했다.

“…엘레인?”

“네, 아빠. 저예요!”

엘레인은 허공에 살짝 들린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이 마음이 쓰였던 것인지.

황제는 옅게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난, 괜찮다.”

“거짓말. 다리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괜찮아요?”

카르넬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무려 뼈가 부러졌는데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엘레인은 괜히 쓴소리가 나가려는 입을 한 차례 꾹 다문 뒤,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제들은 어디 갔어요? 신성력으로 치료하면 말끔히 나을 텐데.”

흠칫. 엘레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황제와 황태후의 몸이 움찔거렸다.

변이된 돌루스에게 당한 카르넬과 다르게 황제는 그냥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니 신성력이 통할 텐데 왜 아직도 이렇게 침상에 누워있는 걸까?

“생각해 보니 그러네? 여기 의원들은 많이 있는데, 사제들은 다 어디로 갔대요?”

“황제나 되는 사람이 쓰러졌으면 지금쯤 주교급 사제들이 줄지어서 왔을 텐데…. 이거 뭔가 이상한데?”

라네즈와 아르닐 또한 이상함을 느꼈는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렇듯 묘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오로지 모든 것을 다 꿰고 있는 오르칼만이 이 상황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 사제들은 지금 대부분 신성제국으로 파견 갔습니다.”

그때.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놓은 정보대신이 슬쩍 정보를 흘렸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 그래서 지금 베네딕트 제국에서 사제를 찾는 건 어렵습니다. 하물며 뼈를 붙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제는 더더욱이요.”

참고로 지금 정보대신이 흘린 정보는 모두 사실이었다.

황궁에 상주하고 있는 사제들마저도 ‘동맹국’에 도움을 주기 위해 파견을 간 상태이니 지금 뼈를 붙일 사제를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위의 설명을 모두 들은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그럼 황궁 소속 사제분들을 잠시 호출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 나는 그런 식으로 중요한 인력을 사사로이 쓰고 싶지 않다. 어차피 사태가 진정될 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그때까지는 그냥 기다리겠다.”

“아빠….”

엘레인은 놀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너그러우면서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씨라니.

실로 감격한 엘레인은 황제의 하얗게 질린 손을 꼬옥 감싸 쥐었다.

“하.”

한편 오르칼은 앞의 연극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신성제국 황태자가 골절이라는 말을 듣고 똑같이 ‘나도 골절이다!’를 시전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설마 그걸 이용해 동정표를 받아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까지 해낼 줄이야.

“정말이지 대단하십니다, 아버지.”

“칭찬 고맙군.”

오르칼은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을 건네며 씨익 웃었다.

그것을 ‘동맹국의 백성들까지 신경 써주는 착한 아빠를 칭찬하는 말’ 정도로 생각한 엘레인은 둘 사이에 서서 흐뭇하게 웃을 뿐이다.

“그러면 아빠. 제가 뼈에 좋은 수프를 직접 만들어봤는데, 한번 잡숴보실래요?”

“뭐? 엘레인 네가 수프를 직접 만들었다고?”

“네. 카르넬한테 먼저 먹여 봤는데, 맛있다고 했어요.”

“그 녀석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던 황제의 눈이 카르넬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게슴츠레하게 좁혀졌다.

엘레인이 무려 직접 만든 수프를 먹을 첫 번째 기회를 하필이면 경계 대상 1위인 신성제국 황태자에게 빼앗기다니.

속에서 용암이 끓어올랐지만, 여기서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렇군. 그럼 내게도 엘레인 네가 직접 만든 특제 수프를 부탁한다.”

“물론이죠! 식지 않게 아티팩트 안에 잘 보관해놨는데, 지금 바로 드릴게요.”

엘레인은 곧바로 아공간 주머니에서 보온병을 꺼내었다.

카르넬이 ‘너무 한 음식만 먹으면 오히려 몸에 독이 되지 않을까…?’하고 걱정하여 열 병 중 다섯 병만 남겨두고 왔었는데.

남은 수프의 주인이 생겨서 정말 다행이었다.

“흠. 아주 고소한 냄새가 나는군.”

보온병 뚜껑을 열자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냄새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에 주위에 있는 의원들이 입맛을 다셨고 쌍둥이 황자들도 보온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쵸? 이게 사골 수프라고. 뼈를 푹 고아서 만든 건데 엄청 담백하고 맛있어요.”

“그런가?”

정보대신의 도움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황제는 엘레인의 설명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일단 냄새가 너무 좋았고.

신성제국의 황태자도 맛있게 먹었다고 했으니 맛에 대한 의심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거… 색깔이 왜 이렇지?”

황제는 눈앞에 슥 내밀어진 수프를 보고 움찔. 몸을 떨었다.

냄새만큼 사골 수프의 회색 빛깔이 너무나도 강렬했는지.

군침을 삼키던 의원들과 쌍둥이 황자들의 입맛도 싹 사라졌다.

“뼈에 좋은 걸 이것저것 넣어봤거든요. 색깔이 이런 건 검은콩을 갈아 넣어서 그런 거예요.”

“아…. 그런 거였군.”

엘레인의 친절한 설명에 황제는 내심 안도했다.

하긴 냄새가 이렇게나 좋은데 맛이 이상할 리가 없다.

게다가 검은콩을 갈아 넣었으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고소한 맛을 낼 테지.

게다가.

“자. 아~ 하세요.”

“흠흠.”

황제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수줍게 입을 벌렸다.

네 살배기 이후 처음으로 딸이 직접 먹여주는 음식을 먹어보는 황제는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을 했다.

이쯤 되니, 우리 딸이 만든 건데 아무렴. 설령 맛이 조금 이상해도 그는 맛있게 먹을 자신이 퐁퐁 샘솟았다.

그러나….

“음.”

그 믿음이 곧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큰일이군.’

황제는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기 위해 일단 눈을 감았다.

하마터면 여기에 뭘 넣었냐고 물어볼 뻔했다.

고소하긴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린 향이 자꾸만 비강을 괴롭히는 것을 무시하며 인고의 시간을 가졌다.

생선과 다른 비린 맛이 존재한다는 것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한 사고를 멀리 날려 보낸 황제는 천천히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어때요? 맛있죠?”

“…그래. 너무 맛있어서 벌써 뼈가 붙어버린 기분이다.”

“하핫. 농담도. 뼈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붙을 수가 있겠어요?”

“그으렇지….”

“푸훕.”

기어코 터져버린 오르칼의 웃음에.

황제는 모든 판을 짰을 게 분명한 오르칼을 찌릿 노려보았다.

물론 입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내친김에 엘레인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보온병 다섯 개를 모두 꺼냈다.

“짠. 이거 전부 아빠 몫이에요. 많이 드시고 얼른 나으세요. 알겠죠?”

“……고맙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상황에.

황제의 두 눈이 아주 조금 촉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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