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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화 (368/417)

369화

베네딕트 제국으로 돌아온 엘레인은 한동안 바쁘게 지냈다.

우선 황제의 간병을 도맡아 했으며 그다음으로는 엘레인의 안위가 걱정되어 찾아온 베네딕트 제국의 귀족과 아스터 왕국의 귀족, 그리고 관료들을 맞이하며 멀쩡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시켜줘야 했다.

뭐. 그 밖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며 알찬 한 주를 보내고 난 후.

드디어 신성제국 수도의 재건이 거의 끝나간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오늘!

엘레인은 드디어 황실 소속 사제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황제의 방을 찾았다.

“어? 벌써 치료 끝난 거예요?”

목적지에 도착한 엘레인은 이미 황제의 방 안에 모여 있는 사제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안에 신성력이 가득 들어찬 것을 보면 이미 치료가 끝난 것 같은데.

엘레인의 시선이 침대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황제의 오른발로 고정되자.

황제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멀쩡하게 두 발을 바닥에 딛고 섰다.

“보다시피 완쾌했다.”

“정말요? 아프지는 않고요?”

“그래. 멀쩡하다.”

멀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아도 쉬이 믿지 못하겠는지 엘레인은 계속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무렇지 않게 제 곁으로 걸어오는 황제를 보고 엘레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완쾌됐나 봐요.”

“내, 말했지 않았나.”

“그래도 환상통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엘레인은 황제의 다리가 모두 나았다는 것에 기쁘기는 하지만 여전히 찝찝함이 남은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다리를 고쳐도 황제의 다리를 부러지게 만든 원인.

몽유병을 고치지 않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똑같은 일이 또다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러지?”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의원 협회 사람들을 불러서 그 사람들한테 조언을 들어봐야겠어요.”

“조언? 무엇이 궁금해서?”

황제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자 엘레인이 서글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몽유병에 걸렸잖아요. 결국, 몽유병을 고치지 않으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텐데 얼른 원인을 제거해야죠.”

“으, 음? 몽유병은 이미 다 나았다만….”

“네? 그게 정말이에요?”

엘레인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묻자 황제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누적된 스트레스가 원인인 병이었다. 한동안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는 괜찮다.”

“확실한 거예요?”

“그래. 밤마다 의원과 기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확인했으니 확실하다.”

황제의 확신에 가득 찬 얼굴에 엘레인은 침음을 흘렸다.

하긴 황제가 이런 쪽으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그의 말이 맞는 거겠지.

“그럼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몽유병이라는 게 실체가 없는 병이라서 되게 걱정했었거든요.”

“그랬나.”

황제는 그리 말하며 엘레인의 머리가 헝클어지지 않게 살살 쓸어주었다.

이리도 날 신경 써주다니.

대충 알아서 잘 낫겠거니 하고 있는 다른 황자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행동에.

황제는 이 맛에 딸을 키우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꾀병을 부렸다는 사실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테지만 말이다.

“이럴 게 아니라 함께 산책이라도 나가보는 게 어때요? 한동안 방안에 갇혀 지내느라 답답하셨을 거 아니에요.”

“좋은 생각이군. 안 그래도 조금 거닐어 보고 싶었다.”

황제는 씨익 웃으며 엘레인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훈훈하게 방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폐하. 아니 되옵니다.”

“재무대신?”

갑자기 복도에서 튀어나온 재무대신이 황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기가 막힌 행동 탓에 딸아이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는 계획이 살짝 늦춰지자, 황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지?”

그리 말한 황제는 두 눈을 선득하게 빛냈다.

만에 하나 재고할 필요도 없이 하찮은 이유라면 곧바로 응징을 가할 생각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재무대신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폐하께서 요 며칠간 푹 쉬신 덕분에 결재해야 할 서류가 한가득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폐하의 책상 주변을 넘어서 다른 영역까지 서류 산을 쌓아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재무대신은 어지간하면 서류 ‘산’이라는 표현을 잘 하지 않았다.

즉, 그 단어를 사용한 지금은 정말로 엄청난 양의 일거리가 그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데….

“휴식을 취한 지 고작 일주일이 넘지 않았는데 벌써 그만큼 일이 쌓였다는 건가.”

“제국의 황제이잖습니까. 그만큼 평소 폐하께서 처리하시는 일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황위 계승식을 서둘러야겠군.”

오르칼에게 얼른 황위를 물려줘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조만간 엘레인과 마음 편히 산책하는 날이 오기를 깊이 갈망하며.

황제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다. 산책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일하러 가시는데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까요?”

“나는 괜찮다. 매번 하는 일이기도 하고.”

“아….”

엘레인은 초연한 그의 대답에서 직장인의 고달픔을 느꼈다.

이미 아스터 왕국의 국왕으로서 국정을 보아온 엘레인이었기에 그의 고충이 더욱 잘 이해됐다.

그래서 더욱 짠한 마음을 느낀 엘레인은 황제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몸조리도 할 겸. 보양 차라도 만들어드릴까요?”

“아니.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다.”

황제는 엘레인이 무언가 ‘만들어준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거절했다.

그에 엘레인은 퍽 아쉬워했으나, 황제의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원래 인연은 짧고 아쉬울수록 좋은 법.’

조금은 구차한 변명을 속으로 하면서.

그렇게 그는 자신의 미각을 지키는 데에 성공했다.

***

“휴우. 이제야 제대로 쉴 수 있겠네.”

엘레인은 기지개를 쭉 켰다.

돌루스를 처치하고 신성제국에서 돌아오고 난 후에도. 황제의 건강을 신경 쓰느라 마음 편히 쉬지 못한 엘레인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오른쪽 다리가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지금.

엘레인은 드디어 휴식다운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평화롭네.”

간만에 앨리스와 베일리의 도움을 받아 티타임을 갖게 된 엘레인은 청명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넋을 빼놓고 있자니, 문득 엘레인의 시야에 베일리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깜짝이야. 무슨 일이야?”

“헤헷. 평화를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신 황녀님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그랬죠.”

“내가 이 평화를 만드는 데에 일조를 했다고?”

“그럼요! 황녀님께서 나쁜 정령들을 얍얍 해치워주신 덕분에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거잖아요. 여기 이 신문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걸요?”

베일리는 그렇게 말하며 신문 1면을 쫙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곳엔 무너진 만신전에서 돌루스와 대치하고 있는 엘레인이 크게 찍혀 있었다.

“와…. 이걸 또 언제 찍었대?”

보통이라면 ‘또다시 신문 1면에 실리다니!’라면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을 엘레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시기상으론 공간의 정령이 공간을 나누기 전인 것 같은데….

그 위험한 곳에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한 건지 의문이었다.

“흐흥. 거기서도 황녀님에게 진심인 사람이 있었나 보네요. 눈앞의 역경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 뭐, 이런 거였겠죠.”

“대체 얼마나 진심이면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만큼 장인 정신이 대단하다는 거죠.”

베일리가 엄지손가락을 척 추켜올리며 하는 말에 엘레인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거에도 장인 정신이라는 말을 갖다 붙였던 건가 싶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질문하진 않았다.

베일리가 저만큼 흥분할 때면 괜히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는 편이 모든 면에서 이롭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만 고생한 것도 아닌데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야?”

“에이. 다른 사람의 활약에 대해서도 여기 제대로 적혀 있는걸요? 그래도 결국 세계수를 구하고 나쁜 악당을 처치한 건 황녀님이니까 이렇게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구요!”

그리 말한 베일리는 ‘우리 황녀님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겸손하다니까.’라고 중얼거리며 툴툴거렸다.

그에 엘레인이 피식 웃자, 앨리스가 비어있는 찻잔에 새로운 찻물을 부으며 함께 웃었다.

“그럼요. 황녀님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셔요.”

“그치? 내 말이 맞지?”

“에휴. 너는 그 오두방정 떠는 입만 좀 가만히 내버려두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아냐. 나 다른 데서는 엄청 얌전해. 황녀님이랑 앨리스 너 앞이라서 이러는 거라고.”

“마음이 잘 맞는 사람 앞에서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니?”

“역시 앨리스라니까. 그런 거니까 좀 봐죠 잉.”

베일리는 양손으로 턱을 괴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그 치명적인 귀여움에 앨리스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자 베일리는 쌩하니 운디네의 옆으로 피난했다.

-무우?

(갑자기 뭐야?)

“운디네 님, 이것 좀 먹어 보세요. 이거 진짜루 맛있답니다?”

-무우…. 뭇!

(흐음. 공물이군…. 맛있게 잘 먹어줄게, 인간!)

베일리는 열심히 타르트를 베어 무는 운디네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힐끔힐끔. 앨리스의 얼굴을 살폈다.

맛있는 공물도 줬겠다.

만약 앨리스가 등짝을 때리려고 한다면 운디네가 저를 지켜주겠지.

그런 생각이 짙게 깔린 행동에 앨리스는 허허롭게 웃었다.

“하하. 정말 깜찍한 친구라니까.”

“저기… 앨리스 언니? 이 악물면 턱에 안 좋을 텐데.”

“후우. 후.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라네즈 오빠랑 아르닐 오빠 같아서 재밌는걸.”

“네?”

“화, 황자님들이요?”

엘레인의 말에 앨리스와 베일리는 심히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어…. 내가 혹시 말을 잘못 꺼냈나?

그냥 둘의 케미가 좋고 투닥거리는 맛이 있어서 그런 건데.

앨리스와 베일리는 엘레인의 말을 퍽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흐음. 다음부턴 언행에 더욱 조심해야겠네요.”

“음음. 황궁에서 ‘환장하는 콜라보 형제’는 한 팀으로 충분하지.”

심각하게 뇌까리는 앨리스는 물론이고.

약간의 경외감을 담은 베일리의 말에 엘레인은 벙쪘다.

뭐야.

라네즈랑 아르닐 너희. 황궁에서 대체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한 거야?

환장하는 콜라보 형제라니.

뭐, 둘이 싸우는 걸 보면 조금 환장할 것 같긴 하다만….

어쨌든 저런 이명이 붙었다는 것을 그 둘은 알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알면 이명 붙인 사람 찾아내서 무슨 사달을 낼지도…?’

실로 그럴듯한 생각에 엘레인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머릿속을 비웠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기를.

“그나저나. 지금 신성제국으로 다시 간다고 하면 아빠가 반대하겠지?”

“네? 신성제국엔 또 왜요?”

베일리가 깜짝 놀라 묻자 엘레인은 슬그머니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을 긁적였다.

“카르넬 말이야. 아직 다 나으려면 멀었는데 병문안은 가줘야지.”

“세상에나. 직접 간병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병문안을 또 가신다고요?”

“으응.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뭐, 그것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엘레인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카르넬이 어느 정도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바로 그와 함께 데이트를 하러 갈 거라는 이야기를 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이렇듯 엘레인이 붉게 물든 뺨을 감추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앨리스와 베일리는 서로를 향해 묘한 시선을 보내었다.

뭐랄까.

황녀님께서 워낙 착하시니, 저런 말을 하시는 건 이해가 가지만.

황녀님이 우리에게 무언갈 숨기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베일리가 무어라 질문하려던 그때.

휘이잉—!

문득 바람이 세게 일며 세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껏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엘로?”

“오랜만입니다, 황녀님. 약속대로 다시 찾아왔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이엘로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엘프 마을 초대장을 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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