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0화 (369/417)

370화

이엘로의 등장에 깜짝 놀란 엘레인은 우선 제 앞으로 내밀어진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이거… 엘프 왕이 직접 보낸 편지네요?”

“예. 맞습니다.”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엘레인은 침음을 흘렸다.

이렇게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낸 것도 그렇고.

이 초대장을 쓴 사람이 무려 엘프 왕이라니.

이번에야말로 엘레인을 엘프 마을에 데려가겠다는 그들의 강력한 집념이 느껴지는 것 같다.

“우와! 그럼 황녀님, 엘프 마을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응? 뭐, 그렇지…?”

“대박! 미남 미녀들의 천국에 갈 수 있다니. 정말이지 너무 부러워요!”

아하. 베일리가 부러운 건 그런 부분인 건가.

엘레인은 솔직하게 제 욕망을 드러내는 베일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언니도 갈래?”

“네? 저,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 저쪽에서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하지.”

엘레인은 그리 말하며 이엘로를 바라보았다.

폐쇄적인 엘프들의 성향을 고려해서 미리 허락을 구하기 위함이다.

이렇듯 엘레인의 배려에 감동한 이엘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능합니다.”

“와! 신난다!”

얼마나 기쁜지.

베일리는 아이처럼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앨리스 언니? 왜 그래?”

“저… 괜찮다면 저도….”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뺨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언니도 같이 가야지. 그렇죠?”

“예. 인원이 다섯 명만 넘어가지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이엘로의 대답에 앨리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긴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엘프 마을에 가는 건 특별한 경험이겠지.

동화책에서도 종종 엘프의 마을을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으로 표현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미남미녀를 떠올리며 좋아하는 베일리가 특이한 거지 보통 사람들은 앨리스처럼 엘프 마을 자체에 환상이 있을 것이다.

엘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엘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굳이 다섯 명인 거예요?”

“아…. 그건 저희 마을의 위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엘로는 죄송스런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그간 엘레인의 맹활약으로 인해, 아무리 엘프들의 인간 혐오가 옅어졌다고 해도.

엘프 마을을 남에게 노출시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 인원을 다섯 명으로 잡았는데.

그 이상은 아무리 이엘로라고 해도 늘리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니 부디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고개 숙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우르르 몰려가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어디 외출할 때면 호위 기사만 데리고 다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다섯 명이면 앨리스 언니랑 베일리 언니. 그리고 캐시 언니랑 카론을 데려가면 딱이네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로군요.”

이엘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엘프 마을의 영웅이다 보니,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세계수의 향기가 나는 엘레인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게 그녀의 마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캐시 언니는 아직도 휴가 중이야?”

“예. 아무래도 장기 휴가이다 보니.”

“으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우리 넷이 가야겠네.”

엘레인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쩝 다셨다.

엘프 사절단이 온 이후 이상하게 얼굴이 안 좋아 보이던 캐시는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가게 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휴식을 취하면서 훌훌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예? 그러셔도 되는 건가요?”

“네. 어차피 할 일도 다 끝나서 앞으론 쭉 휴식할 일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최소한의 준비라도 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는지요? 우리 엘프들의 축제는 최소 5일 동안 진행하는지라 갈아입을 옷 등이 필요할 겁니다.”

“네? 5일이나요? 그러면 바로 가선 안 되죠!”

“맞아요! 얼른 준비합시다!”

앨리스와 베일리는 곧바로 엘레인의 팔을 한쪽씩 잡았다.

마치 연행당하는 범죄자처럼.

두 팔을 결박당한 엘레인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꼈다.

“그, 그냥 대충 챙기면 되지 않아?”

“절대 안 돼요! 생각해 보니까 이 축제의 주인공은 바로 황녀님인데, 거기서 가장 돋보이셔야죠!”

“베일리 말이 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갑시다.”

간만에 엘레인을 꾸밀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마치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그들의 눈빛을 슬그머니 피한 엘레인은 간절한 눈으로 이엘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이엘로의 모습에 엘레인은 알아차렸다.

여기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

“후. 이제 출발하죠.”

한동안 앨리스와 베일리의 손에 이리저리 굴려지던 엘레인은 잔뜩 지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엘로는 엘레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상에…. 정말이지 잘 어울리시는군요!”

“그렇죠? 원래는 드레스를 입히고 싶었는데 숲에선 조금이라도 편한 옷을 입는 게 좋다고 한사코 거절하시지 뭐예요.”

베일리는 아쉬운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크림색 카라 블라우스에 허리부터 종아리까지 길게 떨어지는 소라색 치마.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옷이었으나 여기서 더 아름답게 꾸밀 자신이 있는 베일리의 눈에는 여전히 아쉬워 보였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해.”

“히잉…. 이건 국제적 손실이라구요….”

“언니. 자꾸 그러면 나, 언니 두고 갈지도 모른다?”

“헙!”

엘레인이 일부러 분위기를 잡고 말하자 베일리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그제야 조용해진 환경에 엘레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진즉 이렇게 할 걸 그랬네.

“으음. 그런데 우리 이동은 어떻게 하는 거죠?”

그때 앨리스가 가장 중요한 문제점을 콕 집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엘로는 사프란처럼 나뭇잎 배를 타고 온 것도 아닌데.

설마 여기까지 달려온 걸까?

엘레인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니, 이엘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황녀님께서 편히 오실 수 있게 저희 엘프 왕께서 힘을 쓰기로 하셨거든요.”

“힘이요?”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엘로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이엘로의 품에서 나뭇잎 하나가 쑥 튀어나오더니 환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텔레포트?”

“후후. 맞습니다. 왕께서 정령의 잎에 마법을 담아주셨거든요.”

이엘로의 설명에 엘레인은 감탄했다.

마법 스크롤 이외에도 마법을 담을 수가 있다니. 생각보다 엘프 왕은 다재다능한 것 같았다.

“자. 그럼 지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이엘로의 말을 끝으로.

나뭇잎에서 새어 나온 빛이 일행을 모두 감쌌다.

그리고 잠시 뒤.

솨아아—.

다시 눈을 떴을 때에 그들은 풀내음이 가득한 숲 한가운데에 도착해 있었다.

“와아. 엘프들이 사는 숲이라서 그런가? 뭔가 신비로운 기분이 들어요.”

일행 중 가장 들뜬 얼굴을 한 베일리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리고 베일리가 그런 기분을 느낀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황녀님. 이 느낌은….”

“응. 맞아.”

카론의 말에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인간들마저도 신비로운 분위기가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로.

지금 그들 주변에는 자연계 정령들이 쫙 깔려 있었다.

-인간? 인간이야!

-어? 근데 왜 어머니의 냄새가 나는 거지?

-이상하다? 어머니가 낳은 자식인가?

-아닌데? 어머니는 나무라서 인간을 낳을 수 없는데?

-그럼 뭐지? 저 인간은 뭐야?

엘레인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정령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정령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각각 두툼한 나뭇가지 위에 앉아 녹색 눈을 반짝이는 정령들.

각각 나무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저들은 아마 나무의 정령, 드루이드인 것으로 보이는데.

‘어머니라면 세계수를 말하는 건가?’

엘레인은 그럴듯한 가정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무의 정령이라서 세계 최고의 나무인 세계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계수의 자식으로 착각한 건 아마 내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 때문이겠지.

엘프가 말하는 그 따스한 기운 말이다.

‘엘리아스를 만나면 내게 왜 그런 향기가 나는 건지 물어봐야겠네.’

예전엔 사는 게 바빠서라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나름 물어볼 곳도 있다.

물의 정령왕 정도면 제 몸에서 나는 향기가 뭔지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을까?

“자. 이쪽입니다.”

-아. 간다.

-아쉽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엘프들은 이 숲에 인간이 오는 걸 싫어하잖아.

-근데 저 인간들. 엘프랑 같이 왔는데?

-?

-?

이엘로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던 엘레인은 뇌정지가 온 듯한 드루이드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뭐, 축제는 5일 동안 진행된다고 했으니 운이 좋으면 저 아이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엘레인은 굳이 그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괜히 그 사실을 알렸다간 저기에 모여 있는 자연계 정령들을 모두 상대해줘야 할지도 모르니까.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는 엘프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발걸음을 빨리할 때다.

“이 앞으로는 제 뒤를 정확히 따라오셔야 합니다. 제가 하는 행동도 꼭 하셔야 하고요.”

그때 이엘로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뒤를 정확히 따라와야 한다.

그 말이 가지는 의미는 생각보다 컸기 때문에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수복했나 보네요.”

“맞습니다. 제가 가는 길에서 두세 걸음 벗어나면 곧바로 튕겨 나가거나 환각에 걸리게 될 테니 잘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어렵지 않죠. 대신 좀 천천히 가주실래요? 베일리 언니랑 앨리스 언니는 숲이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경이 맨 뒤에서 언니들을 좀 봐줘.”

“물론입니다.”

“맡겨주십시오.”

엘레인의 요청에 이엘로와 카론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베일리와 앨리스는 크게 감동을 하면서도 ‘그 정도로 길이 어려운가?’ 싶은 얼굴로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그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왼쪽으로 쭈욱 갔다가 어느 나무를 맞닥뜨리기 전 오른쪽으로 턴.

갑자기 오른쪽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다가 특정 나무뿌리를 꼭 밟고 지나가는 등.

일반 사람들이라면 절대 알 수 없는 독특한 길들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 원래 이렇게 길이 어려운 건가요?”

“아니요. 원래는 엘프 이외의 존재가 들어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도록 범위 결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 결계를 파훼 당해서…. 특정한 길을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결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아예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일종의 입장 조건인 셈인데, 이런 식으로 결계를 꼬아놓으면 파훼하기가 더 어렵거든요.”

“그런….”

베일리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유가 있다고 하니 불평불만을 하는 데에도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엘로는 그런 그녀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다 도착했으니 힘내세요.”

“으엑! 그래놓고 이제 겨우 절반만 온 건 아니죠?”

“아뇨. 이제 이 나무에 들이박기만 하면 됩니다.”

“네?”

이엘로의 말에 베일리는 물론이고 앨리스와 카론까지 놀란 얼굴을 했다.

그에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이엘로는 조용히 웃으며 나무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자자. 놀라는 건 나중에 하고 얼른 가자.”

엘레인이 뒤따라 커다란 나무줄기 쪽으로 돌진하자 그녀 역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기가 막힌 상황에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앨리스가 주먹을 꼭 쥐며 달려갔다.

“꺄앗!”

그리고 역시 사라진 앨리스.

“뭐, 뭐야. 나만 남겨두고 어딜 간 거야!”

베일리는 안절부절못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보다 못한 카론이 그녀의 곁으로 슥 다가갔다.

“저도 있습니다만….”

“엄마얏!”

소스라치게 놀란 베일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카론인 것을 확인하곤 머쓱하게 웃었다.

“아. 경도 있었죠?”

“예. 그보다 얼른 따라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진짜 저기로 들어가자고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셨잖습니까. 그러니 얼른 들어가지요.”

“어어?”

카론은 멍하니 서 있는 베일리의 어깨를 단단히 잡고 그대로 앞으로 밀었다.

아무리 힘이 강한 베일리라고 해도 훈련된 기사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는지라 그녀는 속절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자, 잠깐. 부딪힌드아!”

후욱—.

양손으로 얼굴을 가로막은 채 꽥! 소리를 지른 베일리는 갑자기 달라진 공기를 느끼곤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 베일리는 입을 콱 틀어막았다.

“와아아아아!”

“영웅께서 도착하셨다!”

“환영해요, 영웅님!”

수많은 엘프들이 마중 나와 있는 아름다운 엘프 마을.

그리고 그곳에 먼저 도착한 엘레인은 머쓱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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