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솨아아—.
밤바람에 나뭇가지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깊게 침잠해 있던 정신이 현실로 끌어올려졌다.
엘레인은 멍한 정신을 다잡으며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여전히 까끌한 나무줄기에 올라가 있는 제 손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범람하는 기억을 읽어낸 순간.
엘레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억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그도 그럴 게. 이렇게 반가운걸.’
어째서 엘프들이 내게 세계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세계수는 곧 정령 여왕이다.
정령 여왕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엘레인은 많은 힘을 잃어 격이 하향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정령 여왕의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계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조금 충격적이긴 하네. 내가 전생에 정령 여왕이었다니.’
엘레인은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모든 아귀가 맞춰지는 듯했다.
비정상적으로 회복 속도가 빠른 몸이며.
사기적인 특징을 지닌 피 같은 것 말이다.
어째서 회귀하고 나서야 정령 친화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느냐고 한다면, 그건 세계수의 힘에 영향을 받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이제 막 회복을 끝마치고 새로이 인간으로 환생했을 때에는 아직 영혼이 많이 불안정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아무리 격이 낮아졌다고 해도 이전에 정령 여왕이었던 영혼은 인간의 몸에 적응하기 위해 제힘을 봉인하다시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덧없이 나약한 인간의 몸이 쉽사리 무너지고 말 테니까.
그리하여 30여 년의 적응 기간을 끝내고 용병 엘레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했는데.
그 상황에서 세계수가 파괴당하기 직전, 모든 인과율을 비틀어 시간을 되돌렸다.
하지만 제 모든 힘과 격을 쏟아부어 세계수를 직접 만든 장본인은 그 힘에 휩쓸리지 않았다.
세계수는 곧 정령 여왕의 분신과 다름없으니까.
인과를 비트는 엄청난 힘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지난 30년간의 경험과 기억을 고이 간직한 엘레인은 네 살배기 그때의 그 몸으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왜 하필이면 네 살배기부터 시작이었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엘레인이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사건의 전말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엘레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엘프 왕이랑 같이 있었지?’
엘레인은 엘프 왕.
그러니까 리벨루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솔직히 조금이 아니라 좀 많이 충격적이긴 한데 딱히 과거의 일에 연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엘레인은 정령 여왕이 아니라, 인간 엘레인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엘레인은 전혀 다른 쪽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속이 조금 울렁거리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네. 다행이죠. 그런데….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나요?”
엘레인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그는 처음부터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세계수에 손을 얹은 것 또한 그가 그리하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엘레인이 수상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자 리벨루스는 도리어 싱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숲의 정령을 다루는 건 엘레인 님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죠. 근데 그게 왜…. 아, 혹시?”
숲의 정령은 나무의 정령의 상위 호환이다.
그렇다는 뜻은….
“예. 저는 나무의 기억을 아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역시!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맞췄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그 말은 내 기억을 저쪽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인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엘레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내 기억을 훔쳐보는 것은 솔직히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하. 너무 싫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아무리 나무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세계수처럼 높은 격을 지닌 존재의 기억은 쉽사리 읽을 수 없으니까요. 제가 알고 있는 건 대략적인 것들. 그러니까 엘레인 님께서 과거 정령 여왕이셨다는 것과 정령 여왕께서 세계수를 직접 만들어냈다는 것 정도뿐입니다.”
“아, 그런 거였어요?”
리벨루스의 말에 엘레인은 그제야 안심한 듯 뺨을 긁적였다.
뭐, 덕분에 전생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기억 좀 훔쳐봤다고 그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해가 풀리신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그럼 모든 용건을 끝마쳤으니 슬슬 돌아가시겠습니까?”
“저…. 지금 정령문을 여는 건 어렵겠죠?”
엘레인은 세계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지금.
세계수로 다시 정령문을 열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는 엘레인이 모르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렇듯 엘레인의 희망에 가득 찬 물음에 리벨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종의 제약이 걸려 있어서 다시 정령문을 열기 위해서는 최소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으음. 아쉽네요.”
역시 별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
엘레인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분명 조금 전에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긴 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물의 정령왕은 이미 엘레인이 정령 여왕의 환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첫 만남 때부터 말이다.
‘그러니까 세계수를 찾아가라고 얘기한 거겠지.’
회귀 전에는 힘도 약하고 특별한 정령석과 접촉한 적도 없어서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찍이 특별한 정령석과 접촉해 물의 정령왕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덕분에 그녀 역시 나의 존재를 일찍이 알아냈다.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는지….
하여튼 자의는 아니지만,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 건 많이 미안했다.
세계수가 보여준 기억에 따르면 그때 이후로도 계속 내 영혼을 찾아다닌 것 같았는데.
물론 다른 정령왕들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도 오늘만 기회는 아니니까.’
엘레인은 지금 상황에 미련을 버리고 정령왕들과의 만남을 깔끔하게 뒤로 미루기로 했다.
뭐. 그러기 위해선 엘프 왕의 허락을 받긴 해야 하지만 말이다.
“다음에 또 찾아와도 되나요?”
“엘레인 님의 방문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리벨루스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리벨루스의 내적 친밀감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잘 알기에.
엘레인은 흔쾌히 그의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누었다.
***
엘레인과 일행은 엘프 마을에서 5일간 신나게 축제를 즐겼다.
엘프들 모두가 친절한 데다가 은근히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지루하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대신 곤란한 일은 몇 번 있었는데.
엘프들의 사진 요청이 그랬고 리벨루스의 깜짝 요청이 그러했다.
‘사진 같이 찍는 건 그렇다 쳐도. 갑자기 엘프 마을에 정착하는 게 어떻냐는 말을 꺼낸 건 좀 그랬지.’
하필이면 둘만 있을 때가 아니라 공개적인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냈기에.
엘레인은 당시 같은 공간에 모여 있던 엘프들에게서 엄청난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 뒤로는 뭐. 완전히 아비규환이었지.’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서 영웅님을 엘프 마을에 묶어두고 싶어 하는 엘프들이 주를 이루었고.
덕분에 하나하나 단호하게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에휴. 그래도 무사히 빠져나와서 다행인가.”
엘레인은 한동안 혹사시키느라 지친 몸을 푹신한 침대 위에 뉘었다.
돌아가는 길.
치맛자락을 붙잡는 엘프들을 억지로 떼어놓고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이별을 한 뒤.
엘레인은 무사히 황궁에 귀환한 상태다. 진은 다 빠졌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축제의 기억을 떠올린 엘레인은 팔로 눈을 가린 채 실실 웃었다.
“황녀님. 음료수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아.”
한참 여운을 느끼던 와중. 엘레인은 갑자기 훅 느껴지는 청량한 숲의 향기를 맡으며 팔을 내렸다.
그러자 뾰족한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사프란이 눈에 보였다.
“잠깐! 사프란 씨는 가만히 계세요. 그런 건 저희가 하면 되는 일이라구요.”
“맞아요. 아무리 사프란 씨라고 해도 저희들이 할 일을 탐내시는 건 용납할 수 없답니다.”
그때 베일리와 앨리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름 ‘손님’으로 온 그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두 사람은 엘프 마을에서 꽤나 친해진 사프란에게 살짝 경계심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의 위치를 탐내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어쨌거나 사프란 씨는 손님으로 온 거니까요. 황녀님을 돌보는 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
사프란은 슬쩍 앨리스와 베일리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으음. 엘프들과의 볼일이 모든 끝난 마당에 사프란이 왜 황궁에 있느냐?
그에 대한 답은 모두 리벨루스의 수작질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리벨루스…. 이 엘프가. 아무리 명분거리가 없어도 그렇지. 유학이 뭐냐, 유학이?’
엘레인은 생글생글 웃는 리벨루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참고로 엘프 마을을 떠나기 직전 리벨루스는 엘레인의 손에 사프란의 손을 꼭 쥐면서 이렇게 말했다.
‘엘프 종족의 대표로 사프란 양을 베네딕트 제국에 유학을 보내려고 합니다. 인간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선 인간 사회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법. 그러니 염치없지만, 이 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 엘레인은 허허롭게 웃었다.
솔직히 여기서 엘레인이 할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그들 나름의 노력을 하겠다는데.
거기서 초를 칠 수는 없지 않은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엘프의 유학행(?)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기에 엘레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고 그의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뒤에 ‘혹시 마음이 바뀌면 사프란과 함께 돌아오셔도….’ 따위의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좀 더 환한 얼굴로 헤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짠!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왔어요.”
“아, 고마워.”
마침 베일리가 얼음이 동동 띄워진 오렌지 주스를 대령했다.
간이 의자에 앉은 사프란에게도 시원한 포도 주스를 건네준 베일리는 흡족한 얼굴로 자기 자리에 돌아갔다.
약간 그런 건가.
내가 할 일을 제대로 해냈다는 뿌듯함?
자꾸 사프란에게 시선을 주는 건 내 일을 빼앗아가지 말라는 경고이려나.
‘하여튼 이상한 데서 발끈한다니까.’
엘레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원샷했다.
“유학이라고 해서 따로 아카데미에 다닐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황녀님만 괜찮으시다면… 황궁에 머물면서 사람들이 사는 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천천히 도시를 둘러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물가라든가 예절 정도는 아셔야 도시를 돌아보는 데에 도움이 되니까 조만간 괜찮은 선생님을 붙여드릴게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그럼 오늘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방으로 돌아가서 쉬실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레인을 따라 포도 주스를 원샷한 사프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속으로는 엘레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지금 그녀는 상당히 피로해 보였다.
유학 첫날부터 영웅을 피곤하게 만드는 불청객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프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조용히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후. 드디어 진짜 휴식이다.”
엘레인은 다시 침대 위로 벌러덩 드러누우며 기지개를 쭉 켰다.
깜찍한 행동에 베일리와 앨리스가 푸훗. 웃는 소리를 들으며.
엘레인은 문득 떠오른 얼굴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캐시 언니는 아직도 휴가 중이야?”
“으음. 한 달 휴가를 냈으니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죠.”
“그래? …역시 캐시 언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엘프 마을에서 신나게 놀다 오고 나니 캐시의 부재가 더욱 아쉬웠다.
테이블 위에 늘여놓은 사진들을 힐끔 바라본 엘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자, 베일리가 양손을 버둥거리며 답했다.
“그래도 캐시는 캐시 나름대로 즐거운 휴가를 보내고 있을 거예요.”
“그럴까?”
“네! 분명 아주 신나게 놀고 있을걸요?”
“그렇다면 다행인데….”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리 말한 엘레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긴. 기회는 또 있을 테니까.
지금은 캐시가 즐겁게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도록 해야지.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엘레인은 싱긋 웃으며 빈 컵을 베일리에게 건넸다.
“이번엔 냉차 한 잔 부탁해도 될까?”
“물론이죠!”
엘레인의 얼굴에서 그늘이 가시자 베일리와 앨리스의 얼굴에도 미소가 맴돌았다.
이처럼 모두가 캐시의 복귀를 기다리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 누구보다 행복한 휴가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캐시는 정작 어두침침한 숲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
캐시는 새파란 하늘을 모두 가린 나뭇가지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우울하게 뇌까렸다.
“역시 황녀님께 돌아갈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