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캐시는 정처 없이 황궁 주위를 맴돌았다.
해가 지고 달이 떠도.
황궁 가까이에 있는 숲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득 걸음을 멈춘 캐시는 옅은 웅덩이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뾰족한 귀.
그녀는 그것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캐시. 그녀는 엘프와 인간 사이에 태어난 이단이었다.
어렸을 적에 캐시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엘프였던 어머니의 목에 걸린 물건의 정체도.
그리고 이단이 엘프들에게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도.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과거. 캐시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인간과 엘프 사이의 갈등이 극에 치달았을 때였다.
엘프들은 은밀하게 제 동료를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는 인간에게 매우 분노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매우 교활했다. 그들은 동료를 내놓으라고 분노하는 엘프들에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시치미를 떼었고.
엘프들이 치밀어 오르는 혐오를 참지 못하고 공격을 하게 되면 ‘정당방위’라는 말을 내세우며 도리어 그들을 물량으로 밀어붙인 뒤, 크게 다쳐서 도망치지 못한 엘프들을 전리품으로서 획득했다.
참고로 캐시의 어머니는 그 전리품 중 하나였다.
한 귀족에게 노예로 팔려 간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생명을 잉태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기를 보며 항상 이렇게 말했다.
-너와 나는 이단이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없단다.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무 어렸던 캐시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죽음이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그래도 엘프의 피가 흐른다고.
바로 앞에서 생명이 사그라지는 느낌은 생경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었을 때 당시 캐시의 나이는 고작 두 살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던 아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그녀가 항상 해왔던 말 역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은 훌쩍 커버린 캐시에게 항상 저주처럼 따라 붙어왔다.
“나 같은 이단이 황녀님과 함께 있으면 방해가 되겠지.”
자신이 함께 있다면 황녀님의 위신을 떨어트릴지도 모른다.
더러운 피가 섞인 주제에 찬란하게 빛나는 황녀님의 곁에 서다니.
엘프들에게 몰매를 맞아도 싸다.
끔찍했던 과거의 경험을 청산하고 서서히 인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엘프와 여전히 괴로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자신.
나아가는 자를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은 슬슬 과거의 잔재로서 퇴장해야 할 때인 것이다.
“떠나야겠지….”
캐시는 멍하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지금에 와서 엘프족에게 받아들여질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무서워서 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녀님 이야기라면 말이 달라진다.
황녀님께선 이미 엘프족들과 만나버렸다.
엘프족이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캐시는 지금껏 하프 엘프인 것을 숨겨왔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와서 내 정체를 드러낸다?
캐시는 그동안 황녀님을 기만한, 괘씸한 하프 엘프가 되는 것보다 그냥 이대로 도망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엘프들이라면 그녀가 하프 엘프인 것을 바로 눈치챌 테니까.
처음부터 황녀님의 곁에 없던 존재가 되어버리면 되는 것이다.
“괜찮아.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어두컴컴한 뒷골목에 숨어 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냥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어디 한 군데 고장 난 것처럼 눈에서 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부스럭—.
“아….”
“…!?”
캐시는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 드러난 익숙한 얼굴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
엘프 마을에 다녀온 뒤.
카론은 그날 하루 엘레인으로부터 강제 휴식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우직하고 성실한 카론은 좀이 쑤셔서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훈련하다 들키면 혼나겠지.”
황궁에 눈은 셀 수 없이 많다.
만약 후미진 곳에 몰래 찾아가 훈련이라도 했다가는 곧바로 엘레인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좀이 쑤셔도 황녀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으니.
그는 간단하게 황궁 주변에 있는 숲에서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음?”
그렇게 산 중턱쯤에 올랐을까.
그는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
카론은 보고야 말았다.
희미하게 달빛이 비치는 숲 한가운데에서.
눈물을 주룩 흘리고 있는 캐시를 말이다.
“캐시 양? 이 늦은 시간에 숲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아, 그, 그게….”
하필이면 황녀님의 충직한 호위 기사. 카론과 딱 마주친 캐시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달 뜬 밤에 고사리 따러 왔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캐시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여전히 뺨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카론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런 늦은 시간에 혼자 숲에 있는 건 위험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카론은 캐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드워프 도시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그녀가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강인한 육체는 마음과 별개다.
캐시에게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카론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녀에게 권했다.
하지만 캐시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다.
‘내게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그냥 지나치면 되는 일이다.
물론 캐시는 그 간단한 것을 하지 못해서 과거, 카론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으나….
그는 그 정령검을 얻는 데에 도움을 준 사람이 캐시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민도 잠시.
결국, 캐시는 그의 친절을 거절했다.
아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님 곁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그와 달리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사무쳐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자니 카론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아무리 황궁 근처에 있는 숲이라지만, 들짐승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제가 밤눈이 좀 좋은 편이라서 그러는 것이니 함께 황궁으로 같이 갑시다.”
캐시는 물러서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카론에게서 굳은 의지를 느꼈다.
동시에 그녀는 알아버렸다.
이 사람.
절대 포기하지 않겠구나.
“아, 아뇨. 황궁에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예? 어째서요?”
“…아직 휴가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캐시는 머뭇거리며 변명을 이어나갔다.
휴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 그도 곧 포기할 테지.
하지만 카론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중한 낯으로 그녀를 깊이 응시했다.
“그렇다면 저와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술… 말입니까?”
“예. 저 또한 하루 휴가를 받았는데.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는 아쉬워서 말입니다. 혼자 쓸쓸히 자작하는 것보다는 역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마시는 편이 더 즐겁지 않겠습니까?”
카론의 말에 캐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지금 권하고 있다.
고민이 있다면 내가 들어주겠다고.
혼자서 마음 끙끙 앓는 것보다는 동료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고.
캐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 마음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나는 황녀님의 곁을 떠나는 게 이다지도 싫은 거구나.’
눈앞의 그처럼.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구나.
캐시는 꾹 다물었던 입술을 떼고 천천히 카론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홀린 듯이 그의 손바닥 위로 떨리는 제 손을 겹쳤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어쩐지.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다.
***
카론은 캐시를 이끌고 수도에서 가장 깔끔하고 정돈된 분위기의 바를 찾았다.
마음이 소란스러운 캐시를 배려해 남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잡은 그는 노마스주와 맛 좋은 안주를 시킨 뒤 한동안 침묵했다.
막상 그녀를 데려오긴 했지만,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떠한 말로 위로를 해줘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노마스주를 파는 거군요.”
그때 떠나가는 종업원을 가만히 살펴보던 캐시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그에 카론은 이때다 싶어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워낙 맛있는 맥주여서 이제는 수도 내에 노마스주를 취급하지 않는 가게는 없다시피 합니다.”
“그렇군요….”
캐시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생각해보니 노마스족이나 드워프들은 황녀님께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인간들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았던 노마스족들은 꿀릴 것 없다는 듯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고.
직접 농사지은 보리로 노마스주를 빚어 인간들의 입맛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또한, 뛰어난 건축 기술로 플로스 영지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기도 했지.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들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숨어 사는 자신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엘프만큼 인간을 혐오했던 드워프들은 스스로 인간 사회 속에서 고립되어있다시피 했었지만, 황녀님을 만나고 난 이후 180도 달라졌다.
드워프들은 적극적으로 베네딕트 제국과 물건을 거래하기 시작했고.
황녀님께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는 인쇄기와 유리 온실을 꼽을 수 있겠지.
하지만 저는 어떠한가?
항상 황녀님 곁에 붙어 다니긴 했으나 노마스족이나 드워프들처럼 큰 도움이 된 적은 없다.
황녀님을 기만한 주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주제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차 있던 캐시의 기분이 다시금 끝을 모르고 가라앉기 시작했다.
“캐시 양…?”
한편 카론은 노마스주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울적해진 캐시의 상태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실 캐시 양은 노마스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노마스주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기분이 가라앉은 걸 보면 그런 것 같은데….
카론은 죄책감에 테이블 위로 머리를 쿵! 박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아냈다.
그녀의 기호성을 미리 알아내지 못한 건 엄연히 그의 실수였다.
그녀의 기분을 북돋아 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더욱 울적하게 만들다니.
몇 번이고 사죄해도 모자랄 일이다.
“혹시 노마스주가 싫으신 거라면 다른 것으로 시킬까요?”
“네? 아, 아니요. 노마스주가 싫은 건 아닙니다. 아직 먹어본 적도 없고.”
“그럼 왜…?”
“그게. 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아…. 그런 거였군요.”
카론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입을 딱 다물었다.
카론은 괜히 또 이상한 말을 해서 캐시의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랬고.
캐시는 자신을 돕기 위해 온 사람 앞에서 우울한 티를 내었다는 생각에 염치가 없어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을까.
“주문하신 노마스주와 1번 안주 세트 나왔습니다!”
다행히 종업원이 주문한 것들을 늘여놓으며 바짝 긴장한 분위기를 확 풀어주었다.
카론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캐시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단, 마셔보겠습니까? 분명 입맛에 맞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캐시는 제 몫의 맥주잔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꿀꺽꿀꺽. 맥주를 넘기는데….
“크으! …헛.”
“하하. 역시 입맛에 딱 맞으시지요?”
“예….”
시원한 목 넘김에, 저도 모르게 민망한 소리를 낸 캐시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카론은 그런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주며 안주 그릇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맥주만 마시면 빨리 취할 수 있으니 안주와 함께 드시길 권장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캐시는 화려한 1번 세트 안주 그릇을 내려다보며 볶은 캐슈넛 하나를 먹어보았다.
그리고 폭발하는 고소함에 두 눈을 크게 키운 그녀는 냠냠. 열심히 안줏거리를 입안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야.’
카론은 햄스터처럼 열심히 견과류를 섭취하는 캐시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기분이 안 좋을 때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황녀님의 지론에 따라 해보길 참 잘했다.
지금만큼은 그녀를 괴롭히는 기억을 잠시라도 잊기를 바라면서.
이후 카론은 슬슬 바닥을 보이는 캐시의 맥주잔을 바라보며 싱긋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한 잔 더 할까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