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노마스주를 마시고 난 후부터는 둘 사이에 떠돌던 어색한 분위기가 완전히 증발되었다.
캐시는 즐거이 노마스주로 목을 축였고.
카론은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기분 좋은 대작을 이어나가던 와중.
카론은 문득 종업원을 불러 세워 귓속말을 나누었다.
그리고 잠시 뒤.
카론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던 종업원이 테이블 위로 새로운 술잔을 서빙했다.
“이건 무엇입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한 가지 술만 마시기엔 좀 아쉬워서 말입니다. 카시스 소다라는 건데, 여기서 노마스주 만큼이나 인기가 많은 칵테일이니 한번 마셔보시지요.”
카시스 소다는 카시스 리큐르를 베이스로, 탄산수와 레몬즙을 첨가한 술이다.
나름 달짝지근한 데다가 맛이 복잡하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폭넓게 즐길 수 있는 술인데.
톡톡 튀는 매력의 노마스주를 마음에 들어하는 캐시라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터였다.
“상당히 신기한 색이로군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캐시는 눈앞의 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얼음을 채운 잔에는 검붉은 빛을 띠는 액체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 위로 층층이 옅어지는 것이 그녀에게 나름 신선하게 다가왔다.
“맛도 좋을 겁니다. 아, 혹시 단 것은 싫어하십니까?”
“아니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입맛에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거기 있는 막대로 휘휘 저어서 드시면 됩니다.”
그리 말한 카론은 손으로 무언가 휘젓는 시늉을 하며 싱긋 웃었다.
친절한 그의 설명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 캐시는 카론이 시키는 대로 내용물을 적당히 섞은 뒤, 이슬이 맺힌 잔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꿀꺽.
“음!?”
칵테일을 한 모금 맛본 캐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정말 맛있군요.”
“하하.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카론의 대답에 캐시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카시스 소다라는 칵테일을 연신 들이켰다.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나면서도 스파이시한 맛이 나는 노마스주와는 또 다른 칵테일 맛은 캐시를 단번에 매료시켰다.
“이 맛. 이 달짝지근한 맛은 블루베리로군요.”
“놀랍군요.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카시스 리큐르는 황녀님께서 직접 재배하신 로열 블루베리를 사용해 만든 겁니다.”
“!”
캐시는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황녀님이 직접 재배하신 로열 블루베리에서 그 ‘황녀님’이라는 단어 말이다.
“저…. 제가 또 무슨 실수라도…?”
한편 카론은 다시금 기분이 다운된 듯한 캐시를 보고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조금 전에 내가 한 말 중에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던 것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걱정하는 모습에 캐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카론은 괜히 목이 타서 제 몫으로 시킨 김렛을 원샷했다.
송곳같이 날카롭게 찌르는 맛과 함께 상쾌한 라임 향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목마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무슨 일로 그런 건지 물어봐야 하는 걸까?
아니야.
괜히 물어봤다가 기분이 더욱 다운되면 안 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카론은 문득 3황자님께서 어렸을 때 저보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당시 그는 카론에게 눈치가 없는 편이라고 지적했었는데.
솔직히 그의 말을 부정하진 못하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벌써 두 번이나 캐시 양의 안색을 어둡게 만든 전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괜히 이상한 말을 덧붙여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카론 경.”
“예?”
“괜찮으시다면 상담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저라도 괜찮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최고의 답변을 해주진 못해도 최선의 답변을 해줄 순 있다.
그렇게 여긴 카론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자 캐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미소는 3초도 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금 자취를 감추었다.
“이건, 황녀님과 저의 이야기입니다.”
아.
카론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아주 무거운 주제가 될 거라고.
그리고 캐시의 핏줄에 대한 비밀과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모두 들은 카론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저는 황녀님을 기만한 겁니다. 이런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분의 곁을 떠나는 게 맞습니다.”
“그게 무슨…. 솔직히 저는 지금 상황에서 꼭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황녀님께서 당신의 종족이 무엇인지 따로 물으시던가요? 그렇게 해서 당신은 자신의 종족이 무엇인지 속이기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그것 보십시오. 당신은 황녀님께 그 어떠한 거짓도 말하지 않았잖습니까.”
카론은 조금 화난 얼굴로 그녀를 타일렀다.
황녀님에게 캐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녀 혼자서 그런 결론을 내리고 끙끙 앓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아니, 너무 안타까웠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습니까. 황녀님께서 직접 실망을 내비치신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래도 정 고민이 되신다면 황녀님께 직접 그 사실을 공유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결정은 그 뒤에 내려도 늦지 않으니까요.”
생각보다 따끔한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캐시는 잘 알았다.
이 모든 건 그가 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또 위하는 말임을.
그의 눈에 담긴 것이 저를 향한 걱정임을 잘 알기에.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그…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만….”
카론은 그리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일단 제 생각을 말하긴 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돌렸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 마십시오. 경의 말대로 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하아.”
굳건한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에, 카론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캐시는 그런 그를 보며 설핏 웃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일단 자리를 파해야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지요. 그럼 저희…. 내일 다시 보는 겁니까?”
“예.”
캐시는 확신에 가득 찬 어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엉거주춤.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카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환한 미소에.
카론은 어째서인지 조금 넋이 나가버렸다.
***
다음 날.
엘레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맑은 하늘을 확인하곤 턱을 매만졌다.
“흐음. 오늘은 사프란이랑 같이 밖에서 차라도 마실까?”
“사프란 씨와 함께요?”
“응. 선생님 이야기도 좀 해야 하니까. 일단 리스트를 뽑긴 했는데, 기왕이면 사프란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고르는 편이 더 좋잖아?”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그럼 바로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응. 매번 우리가 마시는 곳으로, 알지? 준비하는 동안 나는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사프란을 좀 불러줄래?”
“그럼요. 물론이죠.”
엘레인의 요청에 앨리스는 그러겠노라 이야기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베일리의 목덜미를 콱 잡아챘다.
“또야? 사진은 나중에 실컷 보도록 하고. 지금은 얼른 일하러 가야지.”
“아, 쏘리쏘리. 근데 우리 뭐하러 가는 거야?”
“티타임 준비!”
앨리스는 그렇게 외치며 엘레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얼타고 있던 베일리 역시, 허둥지둥 엘레인을 향해 인사를 한 뒤 앨리스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베일리 언니도 참. 그날 찍었던 사진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혼자 남은 엘레인은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 난 후에는 언제나처럼 복도 밖에 서 있는 카론을 찾았다.
“카론 경. 우리 산책하러 가자.”
“…….”
“경?”
“헛.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에이. 뭘 또 그런 걸로 죄송해하고 그래. 자자. 사과는 됐으니까 우리 얼른 밖으로 나가자.”
엘레인은 얼른 가자고 손짓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에 잠시 가출해 있던 정신을 되찾은 카론은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예쁘다. 장미꽃이 벌써 활짝 폈네.”
황궁 정원을 찾은 엘레인은 벌써 개화한 장미들을 구경하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 선 카론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캐시 양은 언제 오는 거지?’
오늘 아침부터 계속 그 생각뿐이었던 카론은 주변에 다가오는 기척이 없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하지만 날이 밝으면 당장 황녀님을 찾아올 것처럼 보였던 것과 다르게.
그녀는 해가 중천이 된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마음이 변하신 건 아니겠지.’
카론은 불안했다.
혹여나 캐시의 마음이 바뀌어, 그녀가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까 봐.
황녀님의 안전을 걱정할 때와는 또 다른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불안정하게 두들겼다.
“경? 혹시 어디 아파?”
“예? 아, 아닙니다.”
“…그래? 하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것 같은데?”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복도에 있을 때부터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더니.
지금은 얼굴이 창백한 것이. 정말 어디 한 군데 아픈 사람 같았다.
엘레인은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카론을 빤히 바라보더니 손뼉을 짝하고 쳤다.
“알겠다. 경, 화장실이 급했구나?”
“예?”
“그런 거라면 미리 말했어야지. 얼른 다녀와. 내 안전은 걱정하지 말고.”
“아니, 저는….”
카론은 바로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나무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캐시만 발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배려에 감사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카론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풀숲을 향해 달려갔다.
한편 엘레인은 황궁이 아닌, 풀숲으로 뛰어가는 카론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런. 숲에서 해결해야 할 정도로 많이 급했구나.”
엘레인은 딱한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존엄성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덤이었다.
이렇듯. 엘레인이 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동안.
엘레인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 카론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캐시와 대면했다.
“카론 경…?”
“캐시 양. 약속대로 오셨군요.”
카론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바짝 숙였다.
혹여나 저 멀리 계신 황녀님께서 제 너른 등을 볼까 봐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캐시는 갑자기 다가온 그의 얼굴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뺨에 닿아오는 뜨거운 숨이 이렇게 간지러울 일인가.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낯간지러운 상황에 캐시는 괜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 하지만 황녀님의 앞에 설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습니다.”
캐시는 ‘참 바보 같죠.’라고 말하며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지금 당장 눈앞에 직면한 상황을 다시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우울해진 것이다.
그러나 카론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용기를 내신 겁니다.”
“하지만 정작 황녀님의 앞에 나서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같이 가드리겠습니다. 누군가가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날 테니까요.”
“경께서요?”
“예. 용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제 얼굴을 보십시오. 그리고 지난 밤, 저희가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는 겁니다. 그때의 결심을 떠올린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캐시는 멍하니 카론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굳게 믿고 밀어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가슴 뛰는 일일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께서 곁에 없었다면 저는 어찌 됐을까 싶습니다.”
“그 말씀은…?”
“저. 황녀님께 가보겠습니다.”
캐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불안감으로 뛰던 심장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뛰는 것을 느끼며.
비장한 얼굴을 한 두 사람은 저 멀리.
꽃구경을 하고 있는 엘레인을 향해 출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