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8화 (377/417)

378화

황제의 허락을 받고 집무실 밖으로 나온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찌저찌 황제를 설득하는 데에 기인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리고 카르넬은 그런 엘레인을 지긋이 응시하며 참으로 예쁘게도 웃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행복해지는 그런 미소였으나, 엘레인의 입장에선 복장이 터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카르넬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아직 몸도 덜 나았으면서 이 먼 곳까지.”

“당연히 네가 보고 싶어서 왔지. 약속했잖아. 침상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면 나와 함께 첫 데이트를 하러 간다고.”

“그건…!”

엘레인은 무어라 대꾸하려던 입을 다물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집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상태라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곳에 둘밖에 없음을 인지한 엘레인은 그제야 안심한 듯 긴장을 풀곤 카르넬을 바라보았다.

“그건 신성제국의 호수에서 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여기는 베네딕트 제국이고.”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어. 게다가 데이트 장소는 아까 네가 말했던 것처럼 베네딕트 제국에서 하면 되잖아?”

“!”

엘레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카르넬은 조금 전 엘레인이 황제에게 했던 변명.

그러니까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면 베네딕트 제국을 구경시켜주기로 했다는 말을 콕 집어내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말을 했던 엘레인은 제가 지은 죄를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힐끗힐끗. 미안함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자, 카르넬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내게 알려줄 거지?”

“으응…. 근데 여기서 말하는 건 좀 그렇고. 내 방에 가서 얘기해줄게.”

엘레인은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시녀들을 보고 카르넬의 왼쪽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혹시 몰라서 당기는지도 모를 정도로 살살 잡아끌었는데도, 카르넬은 엘레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뒤따라갔다.

“어머나.”

앞쪽에서 다가오던 시녀들이 그런 엘레인과 카르넬의 모습을 보곤 저마다 입을 가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베네딕트 제국의 명실상부 아이돌 황녀님과 신성제국에서도 황녀님과 비슷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미소 천사 황태자가 함께 걸어가고 있으니. 그 자체로 그림이 되었다.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선남선녀라니.

마치 신께서 점지해주신 천생연분처럼 너무나도 완벽한 모습에 다들 가던 길도 멈추고 넋을 빼놓았다.

카르넬은 그런 이들을 쭈욱 둘러보더니 엘레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들. 생각보다 주목받고 있는 모양이야.”

“깜짝이야. 우리가 아니라 네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거겠지.”

“그거 칭찬이지?”

엘레인은 카르넬의 입김이 닿은 귀를 문지르다 말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얘가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대?

원래는 좀 더 선을 지키고 예의를 차리는 느낌이었는데.

연인이 되고 나서는 그런 게 싹 사라진 느낌이다.

뭐, 그건 엘레인에게 은혜로운 일이니 그렇다 쳐도.

“그래. 칭찬 맞으니까 저리 좀 떨어져. 그러다 오해하면 어쩌려고.”

솔직히 그 누구보다 꽁냥거릴 자신이 있었던 엘레인이었지만….

실상은 이런 쪽으로 면역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벌게진 얼굴로 훠이훠이. 손을 털어 내며 그의 얼굴을 떨어내려 하자, 카르넬의 고개가 모로 기울여졌다.

“우리 사이에 오해할 게 뭐가 있을까…. 이거 혹시 집무실에서 했던 말의 연장선이야?”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마침 방 앞에 도착한 참이다.

벌컥 문을 연 엘레인은 이불 정리를 끝마치고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베일리를 내보낸 뒤 굳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카르넬을 푹신한 소파에 앉힌 다음. 숨을 크게 내쉬었다.

“우선 미안해. 내 마음대로 그런 말을 해서.”

털썩.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엘레인은 먼저 사과부터 했다.

카르넬은 우울하게 가라앉은 엘레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떼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올곧은 시선이 마주쳐온다.

나를 향한 신뢰도로 가득한.

어쩐지 간질간질한 그 시선에 잠시 머뭇거리던 엘레인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아빠…. 내 안전에 워낙 극성이신 건 너도 알지?”

“그럼. 아주 잘 알지. 유명한 일화가 몇 개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로는….”

“잠깐! 굳이 일일이 읊어주지 않아도 되거든?”

엘레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카르넬을 말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의 입에서 불면 날아갈까.

이 나이 먹도록 어화둥둥 아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는 않았다.

황제 눈에 엘레인은 영원한 네 살배기 아이일지도 모르겠으나….

바깥에서 엘레인은 엄연한 성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연인의 입에서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니?

으으!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으음. 그래서 네 안전에 극성인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그게…. 아무래도 내가 너랑 같이 다니는 걸 꺼려 하시는 것 같아. 결혼할 거 아니면 너랑 만나는 걸 자제하라고 하시더라고.”

“결혼.”

엘레인의 말을 들은 카르넬은 나지막이 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저 입으로 굴렸을 뿐인데 너무나도 달콤한 단어.

여운을 느끼듯 잠시 눈을 감은 그는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곤란하게 됐네.”

“그렇지. 곤란하지.”

“으응. 난 너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넌 아니었나 보구나.”

“어?”

순간 뇌정지가 온 엘레인은 그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진심이라는 듯. 처연한 그의 얼굴에 엘레인이 받은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뭐? 너 진심이야?”

“알잖아, 엘레인. 난 이런 걸로 거짓을 말하지 않아.”

“아, 아니. 그치만 우리 이제 막 알아가는 단계고. 결혼까진 아직 너무 먼일이지 않을까…?”

“그랬지. 너는 이제 시작이었지.”

카르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가던 엘레인은 마치 세상을 잃은 듯. 우울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카르넬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은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좋아했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크게 뜨인 눈이 당혹감을 가득 담은 채 이리저리 굴러갔다.

‘그러고 보니 카르넬이 날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따로 들어 본 적이 없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나를 좋아하게 된 걸까?

대체 나의 어떤 면모를 보고서?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엘레인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넌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야?”

“정확히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7년이 넘은 것만은 확실해.”

“뭐? 7년이나?”

쑥스럽게 웃으면서 하는 말에 엘레인은 경악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7년이 넘도록 짝사랑을 해왔다니.

아득한 시간에 잠시 할 말을 잊자, 카르넬이 양쪽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줄은 몰랐어. 어느 순간부터 계속 너에게 눈이 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엔 지금처럼 네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와버렸지.”

“뭐야 그게….”

엘레인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확 붉혔다.

날 것 그대로의 고백은 무방비한 마음에 훌쩍 날아 들어와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따뜻한 물에 천천히 잠기는 것처럼.

달콤한 그의 말이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오래도록 키워온 마음이야.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너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잖아?”

“그야 당연하지.”

조심스레 묻는 질문에 엘레인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넬의 말이 옳았다.

비록 오랫동안 연모해온 카르넬의 마음이 더욱 깊을지언정 그 결은 다르지 않았다.

즉, 엘레인의 마음 또한 카르넬만큼 끝을 모를 정도로 깊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네. 그리고… 으음. 네 말대로 한동안 우리 둘 사이는 비밀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어? 괜찮아? 계속 비밀 연애해도.”

엘레인이 깜짝 놀라 묻자 카르넬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나 혼자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니 될 일이잖아. 그러니까 그동안 네가 나와 한평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내가 열심히 노력할게. 떳떳하게 우리 사이를 알릴 수 있도록 말이야.”

“카르넬….”

엘레인은 고개를 들어 카르넬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토록이나 따스한 배려라니.

말을 잊지 못할 감동에 마음 한구석이 크게 동하고 있던 그때.

문득 밖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더니 굳게 닫힌 문이 벌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엘레인!”

“아.”

엘레인과 카르넬은 갑자기 난입한 불청객을 둥그렇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지. 왜 안 나타나나 했지.’

엘레인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황제의 허락을 어찌저찌 받아 냈지만, 아직 많은 장애물이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쌍둥이 황자들이고.

카르넬의 방문 소식을 접한 쌍둥이 황자들이 뒷목을 잡고 찾아오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야! 너 뭔데 여기까지 쫓아와?”

“당장 엘레인한테서 떨어져.”

라네즈와 아르닐이 차례대로 말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래도 차마 엘레인 때문에 다친 사람을 연행하듯 끌어내지는 못하겠는지.

어깨를 잡으려던 라네즈의 손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두 분 모두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태평하게 안부나 묻고 있을 때냐? 아직 몸도 덜 나은 놈이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설마… 저를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무, 뭣?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카르넬이 감동받은 듯 아래로 떨어진 속눈썹을 가녀리게 떨자 라네즈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긴 우리 카르넬 얼굴이 엄청나긴 하지.

그 라네즈마저도 순간 주춤하게 만든 카르넬의 저력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이번엔 아르닐이 앞으로 나섰다.

“고작 그런 거에 휘둘리다니. 형도 많이 죽었네.”

“아, 아니거든? 그냥 어이가 없어서 그런 거거든?”

“하여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저리 좀 비켜봐.”

아르닐은 라네즈의 어깨를 뒤로 밀더니 그 자리를 제가 차지했다.

그리고는 선뜩한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봐, 황태자. 너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황태자라니요. 섭섭합니다. 그래도 나름 전우인데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내가 왜 네놈의 이름 따위를 불러야 하지? 게다가 난 전우애 따윈 키우지 않아.”

아르닐은 새침하게 그의 말을 거절했다.

그러나 카르넬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전우가 아니라 친우로서 말을 놓도록 하지요. 참고로 제가 한 살 많으니 이름을 부르는 게 쑥스러우시다면 친근하게 형님이라 불러도 됩니다.”

“무, 무슨. 너 내 말을 어디로 알아들은 거야? 난 너랑 친한 척 부르는 것 자체가 싫다니까? 게다가 혀, 형님이라니. 너 설마 팔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거 아니야?”

아르닐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양팔을 털어내며 성질을 냈다.

옆에서 라네즈의 한심한 시선이 날아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작 한 살 차이 가지고 형님이라니.

저게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곧 죽어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으음. 네 오빠들은 전부 낯을 많이 가리나 보네.”

“뭐, 그런 편이긴 하지?”

게다가 저렇게 한가롭게 엘레인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뻔뻔한 그의 행동에 라네즈와 아르닐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장난스런 웃음을 거두었다.

‘흠. 이쯤에서 슬슬 진정시켜줘야겠네.’

그래도 생각보다 두 황자들이 카르넬의 말에 잘 휘둘려서 다행이다.

엘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꽤나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오빠들. 카르넬은 나와 약속을 지키러 온 거야. 아빠도 인정한 귀한 손님이니까 괜히 애먼 애 괴롭히거나 하면 가만 안 둬.”

“뭐? 하지만 엘레인…. 저 녀석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을 줄 알고?”

“적어도 오빠들처럼 누굴 괴롭히려고 온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만약 내 눈에 카르넬을 힘들게 하는 모습이 보이면….”

꿀꺽.

음산하게 목소리를 깔며 두 사람을 응시하자, 라네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그렇게 라네즈와 아르닐의 눈을 한 번씩 마주친 엘레인은 무거운 분위기를 휙 거두며 말했다.

“뭐, 상상은 알아서 맡길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라네즈와 아르닐의 얼굴이 완벽한 울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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