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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화 (378/417)

379화

결국, 쌍둥이 황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엘레인의 방에서 쫓겨났다.

밖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렇게까지 확고하게 경고를 해 놓았으니 대놓고 카르넬을 괴롭히지는 못할 것이다.

“자. 그럼 바로 출발해 볼까?”

“지금 바로?”

엘레인의 박력에 속으로 감탄하고 있던 카르넬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를 의문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엘레인이 원한다면 상관없긴 하지만 조금 급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제국은 넓으니까. 아, 혹시 가고 싶은 곳이 따로 있는 거야?”

“흐음. 글쎄. 일단은 가까운 곳부터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있는 수도 말이야.”

“하긴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까. 무리한 운신은 몸에 부담이 가겠네.”

카르넬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제 몸이 불편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엘레인을 덜 고생시키고 싶어서 그러한 방향으로 잡은 것이지만 말이다.

“좋아. 그럼 편한 옷으로 좀 갈아입을 테니까 잠깐 나가 있어.”

“아?”

카르넬은 어어? 하는 사이에 밖으로 내쫓겼다.

덕분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카론과 눈이 딱 마주쳤지만, 그는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행히 주변에 황자들은 없군.

만약 아직 복도에 죽치고 있었더라면 마침 방에서 내쫓긴 카르넬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뭐, 꼭 행동으로 괴롭히지는 못하더라도 적나라하게 적의를 불태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으음. 지금부터 엘레인과 함께 수도를 구경하러 갈 건데 자네도 따라가는 건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멀뚱히 서 있기엔 뭐해서 슬쩍 궁금한 것을 물어보니.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카론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엘레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 슬쩍 빠져 달라고 해 봤자 귓등으로 듣지도 않겠지.

오히려 화를 내며 더욱 달라붙어 올 사람이다.

“그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그대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군.”

카르넬은 고개를 돌려, 뒤늦게 합류한 제랄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서 따라다녔던 그는 뜬금없는 주군의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러면서 옆의 카론을 진득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쩐지 즐거움이 엿보이는 듯했다.

반면 카론은 갑자기 저를 보며 호승심을 내뿜는 제랄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 근육을 풀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황녀님을 지키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지난번. 봄 축제 때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렴. 엘레인의 호위를 잘 부탁하지.”

“…….”

지난번 신성제국 축제 때 엘레인을 놓쳤던 적이 있는 카론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번만큼은 황녀님의 호위에 실수가 없을 것이라 다짐하며.

카론은 두 명의 불청객과 함께 한동안 불편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기다렸던 엘레인이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준비 다 끝났어. 이건 카르넬 네 몫.”

간편한 원피스로 갈아입은 뒤 겉에 모자가 달린 로브를 뒤집어쓴 엘레인은 마찬가지로 카르넬에게 동일한 로브 한 벌을 건네었다.

카르넬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든 후 빠르게 착복했다.

그리고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제 몸에 걸친 로브와 엘레인의 로브를 번갈아 보았다.

“흠. 이런 걸 보고 커플룩이라고 했던가?”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야. 아무것도.”

카르넬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서늘한 눈을 번뜩이고 있는 카론 때문이라도.

조금 전 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을 순 없음이다.

***

준비를 마친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수도 광장을 찾았다.

신성제국과 또 다른 활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카르넬은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곤 작게 감탄했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베네딕트 제국은 정말 좋은 나라인 것 같아.”

“칭찬 고마워. 이게 다 우리 아빠가 정치를 잘해서 그런 거지 뭐.”

엘레인은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그녀의 말에도 동의하지만, 카르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너희 아버지뿐만이 아니지. 저들이 지금처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건 네 덕분이기도 해.”

“엥? 나 말이야?”

엘레인은 당혹스런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그에 단호히 고개를 끄덕인 카르넬은 지금껏 엘레인이 이루었던 업적들 중 굵직한 것들 위주로 나열하기 시작했다.

“우선 네가 의원들을 양지로 이끈 덕분에 베네딕트 제국은 의료 강국이 되었지. 전염병에 걸리는 일과 감기로 죽는 사람이 대폭 줄어들었어. 그리고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식량 문제를 네가 해결했잖아?”

“유리 온실을 말하는 거구나?”

“그래. 덕분에 매년 겨울마다 식량이 부족해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크게 줄었어. 온실 특성상 일정한 양의 식량이 꾸준히 나오니 시장도 크게 안정됐고. 덕분에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면서 식료품 가격에 장난질을 하는 사람들도 사라졌지.”

어디 그뿐인가?

엘레인이 인쇄기를 만들어 낸 덕분에 평민들의 교육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나라의 국력을 결정하는 인구수를 대폭 늘린 것에 그치지 않고 제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들이 대거 등장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교육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으음. 맞는 말이긴 한데….”

엘레인은 괜스레 뺨을 긁적거렸다.

사실 회귀 전 지식을 토대로 일궈낸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엘레인 딴에는 크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제가 한 일들이 모여서 제국민들의 행복도에 일조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우리들이 이렇게 풍요롭게 살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야. 그러니 좀 더 자랑스러워해도 돼.”

“크흠. 뭔가 좀 부끄럽네.”

이런 류의 칭찬은 가족들에게도 자주 듣는 것이지만, 대상이 카르넬이라서 그런지 느낌이 확 달랐다.

어쩐지 쑥스러워서 수줍게 웃던 엘레인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여기서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얼른 둘러보자. 이러다 해 지겠네.”

아직 해는 중천에 떠 있었지만, 엘레인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대로 가만히 서서 쑥스러움에 불타버릴 바엔.

카르넬을 이끌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편이 더 나았다.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황녀님께 너무 붙지 마십시오.”

그때 카론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따라붙으며 경고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카르넬은 내심 억울해졌다.

알콩달콩 서로 팔짱을 낀 것도 아니고.

엘레인이 그의 로브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경은 좀 더 떨어지는 편이 좋지 않나? 그렇게 가까이 붙어서 다니면 사람들이 우리들을 귀한 집 자제로 착각할 텐데.”

“…나름 신경 써서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눈을 부라리면서? 경 눈에는 겁을 먹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나 보군.”

카론은 눈썹을 크게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말마따나 수군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 좀 봐. 저 사람 카론 경이랑 닮지 않았어?”

“황녀님의 직속 호위 기사? 그러고 보니 그분이랑 분위기 같은 게 좀 닮은 것 같기도….”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다행히 그의 인상이 무서워서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심인 건 아니었다.

갑옷이 아니라 평민들이 입을 법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를 단숨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엘레인을 따라 자주 신문에 노출된 카론의 얼굴을 기억하고 긴가민가해 하고 있었다.

엘레인이 굳이 로브를 입은 보람이 없게 말이다.

“이런. 아무래도 다른 의미로 좀 떨어져서 다녀야 할 것 같군.”

“…….”

카론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빙그레 웃는 황태자의 모습에 이마 위로 핏대가 솟았지만, 그의 말엔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황녀님의 암행이 들통 날 터.

황녀님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기에 그는 턱이 부서질 것처럼 힘을 주며 고개를 숙였다.

“2미터 정도면 됩니까?”

“10미터.”

“…….”

“설마 그 정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자신이 없다거나.”

카론은 섬뜩하게 벼려진 눈으로 카르넬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다.

황태자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음을.

그걸 알면서도 친히 속아줄 마음은 전혀 없기에 그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자기만의 타협점을 잡았다.

“5미터. 그 이상은 저도 불가합니다.”

“딱 좋군. 그럼 그렇게 결정되었으니 제랄 경 자네도 그렇게 하도록.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카론은 그러면서 제 옆으로 한 발자국 더 달라붙는 제랄을 한 차례 노려본 뒤 다시금 황태자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저렇게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왠지 모르게 더욱 짜증이 나는 카론이었다.

이렇듯 타들어 가는 카론의 속을 모르는 엘레인은 빙긋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카르넬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굳이 카론을 떨어트렸어?”

“음. 아까 한 말처럼 사람들 시선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자꾸 우리 사이에 끼어들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할 수 없잖아.”

“하기사….”

카르넬의 설명에 대충 납득한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이 더운 날 시커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카론보다 더 많은 시선을 끌고 있었지만.

엘레인은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럼 슬슬 관광하러 가 볼까?”

“잘 부탁해.”

“응. 나만 믿어!”

자신만만한 외침에, 카르넬은 즐거이 웃으며 엘레인의 뒤를 따랐다.

방해꾼을 멀리 떨군 것도 모자라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제랄에게 철통 방어를 맡겨놓았으니 한동안 쾌적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겠지.

하지만 이렇듯 완벽한 계략을 짜낸 카르넬조차도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으니….

“다음은 저기로 갈까?”

“아! 저건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상으로….”

“이야. 아직도 남아 있었네. 내가 어렸을 때도 있던 가게인데…….”

카르넬은 엘레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앞서 황제 앞에서 했던 약속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기라도 한 것일까?

엘레인은 여행 안내사 역할에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저, 엘레인.”

“응?”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카르넬은 엘레인의 어깨를 잡았다.

동시에 뒤에서 카론이 무어라 소리쳤으나 그의 시선은 엘레인에게 집중되었다.

카르넬은 뒤를 돌아 저를 바라보는 맑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멋쩍은 얼굴로 질문했다.

“우리 말이야. 여기서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어? 맞는데?”

아. 맞구나.

지금까지 우린 데이트를 한 거였어.

카르넬은 엘레인의 어깨를 짚은 손에서 힘이 쭉 풀리는 것을 느끼며 빙그레 웃었다.

영혼이 탈곡될 것 같았지만, 그냥 그렇게 웃기만 했다.

함부로 입을 벌렸다가는 내심 기대에 부풀었던 속마음이 술술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음. 이런 말 하기 좀 미안한데. 우리 뭔가…. 단순히 투어하는 것 같아.”

“헉. 진짜? 어, 그러니까 내가 데이트해 본 적이 없어서…. 데이트는 어떻게 하는 거야?”

“아?”

엘레인의 물음에 카르넬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생각해 보니 그 또한 데이트를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랐다.

엘레인을 위해 노오오력을 하기로 한 그였지만,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글쎄. 나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끄응. 어려운 문제네. 보통 연인 사이에선 뭘 하지?”

엘레인과 카르넬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모두 연애 초보였기 때문에 생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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