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엘레인과 카르넬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봤다.
어떻게 해야 데이트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아, 물론 진짜 소문이 나는 건 곤란하지만.
어쨌든 첫 데이트는 완벽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나갔다.
“우선은 손을 잡고 걸어보는 건 어때?”
“그냥 손만 잡고 걷기만 해서는 데이트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역시 너무 심심한가…. 아! 그럼 어깨동무하는 건?”
“그건 연인이 아니라 친구들끼리 하는 거 아닐까?”
“끄응….”
“흐으음.”
엘레인과 카르넬의 미간 골이 더욱 깊어진다.
뭘 알아야 시도를 하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라서 그런지 그럴듯한 방법조차 제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던 중.
문득 카르넬이 두 눈을 번뜩였다.
“으음. 생각해 보니 굳이 힘들게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엥? 포기하려고?”
“아니. 바로 앞에 인생 선배들이 계시는데 힘들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인생… 선배?”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생 선배라니.
그런 사람들이 여기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바로 저 사람들이야.”
카르넬은 그런 엘레인의 의문에 화답하듯 광장 중앙 분수대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엔….
“커플? 설마 저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배우자는 거야?”
“아무래도 그 방법이 가장 빠르지 않을까?”
엘레인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분수대 앞에 앉아 꽁냥거리고 있는 한 커플을 바라보았다.
다른 연인들이 하는 걸 보고 배우자니.
솔직히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뭐….
나름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기도?
“어쨌든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선배들이니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게다가 다른 연인들이 꽤 많이 보이니, 어느 정도 비교하면서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
“확실히 그럴듯하네. 그럼 우선, 음…. 팔짱부터 끼면 되나…?”
말꼬리를 흐린 엘레인은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분수대 앞 커플은 서로 팔짱을 낀 채 단단히 밀착해 있었다.
그러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데.
지금부터 저걸 카르넬과 할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크흠. 그러면 될 것 같은데….”
그리고 부끄러운 것은 카르넬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멀쩡한 왼쪽 팔을 슥 내밀었다.
“그, 그럼 잠시 실례.”
엘레인은 우물쭈물거리면서도 로브 밖으로 나온 그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팔뚝에 감탄할 새도 없이.
뒤쪽에서 돌연 들소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당장 떨어지십시오!”
“카론!?”
어마어마한 박력에 엘레인은 화들짝 놀라 카르넬에게서 떨어졌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마나를 사용하기라도 했는지 카론은 자신의 어깨에 자기 몸보다 두 배는 더 큰 제랄 경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는데.”
“네놈! 역시 나를 방해하는 거였나!”
어쩐지 자꾸 앞길을 막고 쓰잘데기없는 말로 현혹시키려 들더라니!
카론이 분노한 얼굴로 노려보자, 제랄이 멋쩍게 웃으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도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마나를 두른 카론의 몸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저쪽도 영, 정상은 아니었다.
“카론 경. 갑자기 왜 그렇게 흥분하는 거야?”
“저자가 황…. 아가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댔잖습니까.”
흥분해서 소리치려던 카론은 주위 시선을 의식하여 호칭을 바꾸었다.
뭐, 그렇게 신경 써주는 건 고맙긴 한데….
“팔은 내 쪽에서 잡은 건데.”
“감히 아가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역시 저자는 불경한 자입니다!”
“아니, 카르넬은 가만히 있었고 내 쪽에서 먼저 잡았다니까?”
“굳이 그를 감싸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자가 팔을 들어 아가씨에게 부축을 강요하는 꼴을 모두 보았으니까요.”
뭐? 어떻게 하면 진지하게 연애 좀 해 보려는 장면이 시시껄렁한 수작질로 바뀌는 거지?
황당하다.
실로 당혹스러워서 엘레인은 최근 들어 자주 만지는 이마를 짚으며 ‘아이고 두야.’를 시전했다.
“음.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끄응.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아?”
“글쎄.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카르넬은 평소의 냉철한 모습을 잃은 카론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도 엘레인과 속닥거리는 자신을 보며 움찔하고 있는 걸 보니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는 것이다.
‘이렇듯 찌르면 찌르는 족족 격렬하게 반응하면 놀리는 재미가 생기는데.’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꾸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으면 곤란하다.
카르넬은 싸늘한 시선으로 직시하고 있는 카론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황녀님?”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휙 돌아보니.
캐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캐시? 여기엔 무슨 일이야? 사프란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아…. 아무래도 교육하기 전에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은 그 준비를 위해 교육을 미뤄 두었습니다.”
캐시는 그리 말하며 손에 들고 있는 교재를 보여주었다.
제목이… 쉽게 배우는 대륙어?
아무래도 사프란은 대륙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지언정, 쓰는 건 잘 못 하는 모양이다.
“캐, 캐시 양. 안녕하십니까?”
“카론 경이로군요. 오늘도 수고하십니다.”
그때 카론이 얼굴을 붉히며 어리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갑자기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맹하게 구는 그의 모습에 카르넬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왜 갑자기 목각인형으로 변했지?”
“으음. 그건 아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걸걸?”
엘레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카르넬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저 까칠한 호위 기사가 부끄러움을 느끼다니.
그 말은 즉, 저 캐시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내 예상이지만 아마도? 그것도 쌍방인 것 같아.”
그리 답한 엘레인은 어쩐지 흐뭇해 보였다.
처음 새로운 커플의 탄생을 직감했을 때에는 흐린 눈으로 봤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현재 내 옆에 내 님이 떡하니 계시니까.
한마디로 남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씀!
“그런데 쌍방 통행인 것 치고는 꽤 어색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두 사람 모두 과묵한 편이니까. 이것도 내 예상이지만, 서로 좋아하는 것도 모를걸?”
“설마 자기 마음도?”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지.”
엘레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캐시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황… 아가씨. 이자와 함께 다니시는 겁니까?”
“아, 으응. 이 근방을 구경시켜주고 있었어.”
“그렇군요. 그럼 저도 함께해도 됩니까?”
“어? 캐시 언니도?”
엘레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캐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르넬이 있는 방향을 진득하게 노려보며 말하기를.
“예. 사프란 양과 함께하기 전에 사전 답사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혹시… 실례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엘레인은 힐끔 카르넬을 바라보며 눈짓으로 물었다.
‘괜찮겠어?’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에 카르넬은 피식 웃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카르넬은 저 캐시라는 여인이 보통 여인이 아님을 알고 있다.
만약 여기서 거절하면 저 여인의 경계심은 더욱 올라가겠지.
호위 기사 카론도 그렇고 평범하지 않은 하녀 캐시도 그렇고.
아마 저들 눈에 자신은 파렴치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임이 분명하기에.
여기서 쓸데없이 적의를 늘릴 이유는 없다.
“다행이다. 카르넬이 괜찮대.”
“호의에 감사합니다.”
캐시는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도 서늘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허락해준 건 허락해준 것이고.
이전부터 갖고 있던 불신은 별개인 건가.
뭐, 고작 이런 호의로 그녀의 적의를 모두 벗겨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조금씩 호감을 쌓아서 인정받으면 될 테지.
카르넬은 자연스럽게 엘레인의 뒤쪽.
그러니까 카론의 옆자리에 선 캐시를 바라보며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 잠깐. 이렇게 되면 방해꾼이 두 명으로 늘어나 버리는 건가?’
카르넬은 웃는 낯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째서인지 제 무덤을 제 손으로 판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럼 다시 출발해 보도록 할까?”
물론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엘레인은 즐거이 웃으며 앞장섰다.
흐음. 엘레인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카르넬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엘레인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이미 카론의 방해로 망조가 깃든 첫 데이트.
방해꾼이 한 명 더 추가된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아. 잠깐 기다려 볼래?”
카르넬은 앞장서는 엘레인을 불러 세우고 친절하게 흘러내린 모자를 제대로 씌워주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카르넬이 엘레인과 가깝게 접촉하자마자 카론과 캐시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놈이 또…!”
“크읏….”
카론과 캐시가 차례대로 말을 내뱉으며 분기탱천해 했다.
물론 그 살벌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카르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망조가 깃들었다고 해도 카르넬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으니까 말이다.
설령 저들의 분노를 산다고 해도 그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티끌은 나중에 모아도 되니까.
지금은 엘레인과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 됐어.”
“응. 고마워.”
엘레인이 빙그레 웃자 카론과 캐시의 몸이 움찔거렸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황녀님의 모습에 대놓고 화를 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카론은 답답한 속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 황녀님께 저자가 수작질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군요.”
“경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예? 설마 캐시 양도?”
카론과 캐시의 시선이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맞부딪혔다.
그리고 그들은 둘 사이에서 어떠한 동질감을 느꼈다.
“동료가 생긴 것 같아 기쁩니다.”
“저 또한. 그런데 경은 저자를 어째서 경계하는 것입니까?”
“저놈은 황녀님을 속인 전적이 있습니다. 이중 신분으로 황녀님을 속였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 속내 또한 음흉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역시 그랬군요. 어림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저 역시 얼굴을 숨긴 평민과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언가 다른 속내를 가지고 접근한 것이라 여겼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군요.”
물론 당시 카르넬은 엘레인에 대해 잘 모를 때이기도 하고.
그때의 카르넬은 엘레인이 신성제국에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될지 계산하며 타산적으로 접근하긴 했다.
지금의 카르넬에겐 퍽 억울한 오해이긴 하지만, 하여튼 카론과 캐시가 경계하는 것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감히 황녀님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아무도 모르게 쓱싹했을 텐데….”
카론이 으르렁거리자 캐시가 한술 더 떠서 살기를 내뿜었다.
뭐, 두 사람이 카르넬을 더욱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듯.
스스럼없는 접촉이 가장 컸다.
“…그런 의미로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동맹을 맺는 것이.”
“경과 함께요?”
“예. 지켜본바, 저자는 상당한 강적입니다. 얼굴에 아주 철판을 깔았더군요. 저 파렴치한을 확실하게 떨어트리기 위해서라면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황녀님을 지킬 수만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결연한 얼굴의 캐시와 카론은 엘레인의 옆에서 희희낙락하는 것을 보며 서로 손을 맞잡았다.
황녀님의 곁에서 파렴치한 황태자를 떨구기 위한 동맹.
일명, 그 이름도 살벌한 ‘카르넬 퇴치 동맹’이 지금 이 자리에서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