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3화 (382/417)

383화

“정말 혼자 들어도 괜찮아? 으으. 하필이면 아공간 주머니가 다 차버려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엘레인은 난감한 듯 뺨을 긁적였다.

워낙 들고 다니는 물건이 많아서 그런지 10평 집 한 채 정도 크기의 아공간 주머니가 벌써 꽉 차버렸다.

그 탓에 종이 가방 다섯 개 정도는 직접 들고 가야 했는데 카르넬이 그걸 혼자 들겠다고 나섰다.

“이 정도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들 수 있어.”

“그치만 넌 환자인데….”

“왼손은 멀쩡하니까. 게다가 이거.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카르넬은 빙그레 웃으며 왼손에 쥔 종이 가방을 좌우로 흔들었다.

무겁지 않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가볍게 딸랑거리는 종이 가방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엘레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절반 정도는 나한테 줘도 되는데. 누굴 닮아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

“하하. 딱히 누굴 닮은 건 아닌데. 이럴 땐 그냥 내가 잘난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어휴. 진짜 능글맞아졌다니까.”

엘레인과 카르넬은 시시덕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캐시와 카론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엘레인의 얼굴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카론 경. 경이 보기엔 조금 전 황태자가 했던 말이 사실인 것 같습니까?”

“황녀님을 향한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까?”

캐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때 캐시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표정을 읽는 것에 도가 튼 제 눈이.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판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글쎄요. 솔직히 믿고 싶진 않지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카론은 카르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또한 카르넬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매몰차게 그를 대할 수 없게 됐다.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러는 편이 좋겠죠.”

한숨과 함께 뱉어진 카론의 말에 캐시는 꽉 쥐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황태자의 말이 진짜라면 적어도 황녀님께서 상처받으실 일은 없을 테니까.

심사숙고 끝에 그리 결정한 그들은 환하게 웃고 있는 엘레인의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

“그럼 나중에 다시 보자.”

“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황궁에 도착하고 난 후.

카론에게 캐시의 에스코트를 맡긴 엘레인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원래라면 캐시와 카론 모두 극구 사양하며 어떻게든 황녀님의 곁을 지켰겠지만, 지금은 카르넬을 믿어보기로 마음먹은 상태다.

보는 이가 많은 황궁에서 황녀님에게 헛짓거리를 할 리는 없을 테니….

카론과 캐시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애써 움직여 숙소로 이동했다.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그래.”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엘레인은 활짝 웃는 낯으로 카르넬을 돌아보았다.

“있잖아, 카르넬. 두 사람 확실하게 이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내가 보기엔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단계에 접어든 것 같던데?”

“그치?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네가 작전을 짜주지 않았으면 오늘처럼 큰 걸음을 내딛지 못했을 거야.”

“뭘. 네가 옆에서 많이 도와준 덕분이지.”

카르넬은 싱긋 웃으며 엘레인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왼손에 달린 종이 가방을 확인하곤. 혀를 쯧 하고 찼다.

“근데 말이야. 나 오늘 일로 되게 중요한 걸 깨달았어.”

“중요한 거?”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거둔 카르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데이트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니.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오늘 데이트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실패할 것 같단 말이지.”

엘레인은 뚱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오늘 카론만 보아도 초반에 카르넬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카론과 캐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더 이상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과연 다음에도 괜찮을지가 의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으음. 일단 아빠부터 공략해 봐야 하지 않을까? 아빠가 괜찮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른 말 못 할 거 아니야.”

“확실히….”

엘레인의 말에 카르넬은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황제의 권위가 최상인 이곳에선 황제의 말이 곧 법일 터.

아무리 제게 불만이 많다고 해도 황제만 어떻게 잘 구워삶으면 다른 이들도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할 터다.

“그럼 곧바로 실행해 볼까?”

“그래. 우선 계획을 제대로 짜 보고 난 뒤에….”

엘레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카르넬은 모퉁이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카르넬?”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모퉁이 쪽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익숙한 얼굴이 스르륵 나타났다.

“안녕, 엘레인.”

“오, 오르칼 오빠?”

깜짝 놀란 엘레인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설마 조금 전에 했던 말 다 들은 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오르칼을 바라보고 있자니 진땀이 절로 흐른다.

조금 전 황제를 공략하니 마니 이야기를 했었던 만큼.

엘레인은 떨리는 동공을 애써 다잡으려 노력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잔뜩 긴장하며 그의 입술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그때.

싱글벙글 웃고 있는 오르칼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쇼핑하고 왔나 보네. 데이트는 즐거웠어?”

“허억! 그, 그걸 어떻게!”

엘레인은 이번에야말로 놀란 티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외출도 아니고 ‘데이트’를 하고 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니.

‘설마 카르넬과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엘레인은 당혹스런 얼굴로 오르칼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엘레인.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건 없단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이제 보니 싱긋. 미소를 짓고 있는 오르칼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달까.

그래서 더 무서운 암흑가 보스다운 진면목에 엘레인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것보다 이제 어쩌려는 걸까?

엘레인이 알고 있는 오르칼이라면 카르넬과의 교제를 전면 반대할 것이다.

즉, 어떻게든 그를 설득해야 한다는 건데….

대체 어떻게 해야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난 너희 사이를 반대하는 쪽이 아니니까.”

“엥?”

뜬금없는 그의 선언에 엘레인과 카르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안심하라는 듯 손바닥까지 내비치는 그의 모습에 엘레인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게 정말이야?”

“그럼.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엘레인. 네 행복을 해칠 리가 없잖아?”

세상 무해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엘레인은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그러니까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다른 누군가의 행복 정도는 기꺼이 해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물론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진짜 소문대로의 사람이었다면 내가 반 죽여서라도 정신 개조를 했을 테지만….”

오르칼은 제 턱을 매만지며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그러면서 힐끗. 저를 쳐다보는 싸늘한 시선에 카르넬은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하하. 제가 멀쩡해서 정말 다행이로군요.”

“흐음. 참으로 아쉽게 됐어.”

아니, 잠깐. 이게 대체 무슨 대화야?

엘레인은 정신이 가출할 것 같은 대화 내용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독설을 날리는 오르칼도 어처구니없었고.

그 지독한 독설을 눈웃음으로 가볍게 날려버리는 카르넬의 모습도 심히 당혹스러웠다.

‘뭐… 어쨌든 지금은 좋아해야 하는 타이밍인 건가?’

비록 오르칼이 웃는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날리기는 해도 만약을 가정한 것일 뿐.

지금의 카르넬을 욕하는 건 아니었다. 카르넬도 그걸 알고 있으니 저리 태연자약하게 말을 주고받는 것일 테지.

‘오르칼이 같은 편이라서 진짜 다행이다.’

만약 그가 황제와 같은 포지션이었다면 결혼을 마음먹었을 때의 엘레인과 카르넬에게는 재앙 그 자체였을 것이다.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쌍둥이 황자들은 어느 정도 돌파구가 보이기라도 하지.

오르칼은 그 작은 틈조차도 보이지 않는 어마무시한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엘레인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

카르넬과의 눈싸움을 끝낸 오르칼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버지를 먼저 공략하겠다고?”

“역시 다 들었잖아!?”

보자마자 다른 말을 꺼내기에 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혹시나가 역시나.

엘레인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순진무구한 척 눈을 깜빡이는 오르칼을 허허로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맞아. 아무래도 아빠를 먼저 공략해야 나중에 편할 것 같았거든.”

이제 엘레인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오르칼은 카르넬과의 사이를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니.

황제를 먼저 공략하려고 작당하고 있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르칼이 지적하는 건 완전히 다른 부분이었다.

“아니. 그 방법은 추천하지 않아.”

“으응? 어째서?”

“아버지의 고집은 상상 이상일 거야. 그러니 너희들이 정말로 주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할머님을 먼저 네 편으로 만드는 편이 좋아.”

“…그렇군요. 황태후 전하를 시작으로 2황자와 3황자를 차례대로 우리 편으로 만들면 나중에 황제를 설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겠군요.”

카르넬은 오르칼의 계획을 바로 알아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능력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오르칼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군.”

“그런 말을 많이 듣는 편입니다.”

“그 머리로 우리 엘레인을 힘들게만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하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 머리는 엘레인을 지키는 데에 사용할 생각입니다.”

“흐음.”

짧은 순간 엄청난 공수를 나눈 오르칼과 카르넬은 한동안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옆에 있는 엘레인이 민망함에 헛기침을 할 때까지.

그렇게 시선을 나누고 있던 오르칼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엘레인을 돌아보았다.

“참고로 할머님께는 네 연인에 대해 왜곡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드렸으니 대하기가 더 쉬울 거야.”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최소한 잘못된 정보로 편견을 가질 일은 없는 거지.”

뜻밖의 소식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다니.

오르칼의 ‘내 동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엘레인 네 연인을 할머님께 소개해주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일 거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카르넬 너. 아직 할머니한테 인사하지 않았지?”

“으응.”

카르넬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엘레인은 황제의 집무실에 갔었다.

거기서 황제의 허락을 겨우 받아내고 난 후 바로 외출을 나갔으니 어쩌면 황태후가 많이 서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바로 가서 카르넬을 제대로 소개시켜줘야겠어. 카르넬. 너도 괜찮지?”

“물론이지. 오히려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스러운걸.”

엘레인을 만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어르신을 만나 뵐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제 실책을 깨달은 카르넬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자, 엘레인이 양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내가 그런 생각할 시간도 안 주고 바로 놀러 가자고 했었잖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얼른 이것만 방에 두고 가자.”

“엘레인….”

“쯧.”

오르칼은 눈앞에서 연약한 척하는 카르넬을 보며 혀를 찼다.

물론 엘레인이 시선을 돌렸을 때에는 언제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냐는 듯 방긋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할머님은 방에 계셔. 지금쯤 차를 마시고 계실 테니 이야기 꺼내기 좋을 거야.”

“오빠. 정말 고마워.”

“뭘. 이 이상 돕지 못해서 오히려 미안한걸. 그럼 행운을 빌게.”

“응!”

엘레인은 오르칼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뒤 몸을 돌렸다.

첫 번째 공략 대상은 황태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엘레인과 카르넬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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