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5화 (384/417)

385화

“…야! 넌 손이 없냐 발이 없냐?”

황제가 이마를 짚고 있던 그때.

결국, 참다못한 라네즈가 테이블을 쾅 치며 삿대질을 했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니지! 저 녀석. 한쪽 팔은 멀쩡하면서 네가 주는 음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었잖아. 나도 몇 번 못 해 본 걸…. 저 자식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먹고 있어!”

라네즈는 억울하다는 듯 두 눈을 글썽거렸다.

하지만 퍽 불쌍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엘레인의 눈은 짜게 식어버렸다.

그러니까 자기는 얼마 못 해 본 걸 생판 남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고 있으니까 분통이 터진다는 거잖아 지금.

라네즈의 심정을 파악한 엘레인은 허허롭게 웃었다.

저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하소연에 대체 무슨 답을 내놓아야 할까.

엘레인과 카르넬이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아르닐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라네즈 형 말이 맞아. 음식을 잘라주는 건 바로 옆에 있는 엘레인이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고 해도 음식을 받아먹는 건 말도 안 되지. 애도 아니고 말이야.”

참고로 황제와 황태후는 어렸을 적의 엘레인에게 자주 음식을 받아먹은 전적이 있었다.

그게 찔리는지 두 사람은 크흠 헛기침을 했지만, 딱히 그의 행동을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특히 황제는….

‘오히려 은근히 응원하는 것 같은데. 착각은… 당연히 아니겠군.’

흡족해하는 황제의 모습에 카르넬은 쓰게 웃었다.

덕분에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세 명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말이다.

“갈 길이 머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음부턴 주의하겠다고 했습니다.”

카르넬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그들이 싫어하는 행동을 해선 안 되었다.

물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엘레인이 직접 먹여주는 음식을 맛있게 받아먹지 않는 것 정도는 잠시나마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흥.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아?”

라네즈에 이어 아르닐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잔뜩 거들먹거렸다.

카르넬이 나름 순종적으로 나온 덕분인지 황제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 또한 약간이나마 풀렸다.

“흐음. 그럼 식사를 마저 하도록.”

“아. 잠시만요, 아버지.”

그때 아르닐이 한 손을 들며 카르넬을 찌릿 노려보았다.

뭐지. 설마 옆에 앉는 것도 짜증 난다고 말하려는 건가?

다른 곳에 앉는 건 싫은데….

카르넬은 입술을 앙다문 채 아르닐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주변에 있던 그릇들이 두둥실.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

“한 손으로는 못 잘라서 먹는다며? 엘레인에게 궂은 노동을 시킬 필요는 없으니 내가 해결해주지.”

아르닐은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산들바람 같은 것이 장내를 휩쓸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접시 위의 음식들이 잘게 썰리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접시 위의 음식만 잘라낼 수 있도록 세밀하게 마력을 컨트롤한 건가?”

“맞습니다. 이 정도면 엘레인을 귀찮게 하지 못하겠지요.”

“훌륭하다.”

칭찬에 인색한 황제가 오늘따라 후하게 군다.

카르넬의 수작질을 막을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칭찬까지 한 몸에 받은 아르닐은 어깨를 으쓱이며 콧대를 높였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카르넬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조각낸 것을 넘어서 아예 다져진 요리들을 빤히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체할 일은 없을 것 같군요.”

“…흥.”

딱히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말간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에 괜히 인상을 찌푸린 아르닐은 신경질적으로 방울토마토를 콱 찍었다.

“아 씨. 얼굴에 튀었잖아!”

“알아서 피했어야지.”

“저게 진짜.”

라네즈는 평소처럼 아르닐과 말싸움을 하려다 말고 카르넬이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도 공공의 적이 있는 상황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는 크흠. 목을 가다듬으며 제 접시를 아르닐에게 내밀었다.

“뭐. 어쩌라는 거야?”

“내 것도 좀 잘라주면 안 되냐?”

“…….”

아르닐은 양 볼을 수줍게 물들인 라네즈를 한 번.

그리고 두께 10cm는 되어 보이는 토마호크 스테이크를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손가락을 위로 휙 올렸다.

“쿠헉! 야! 너 미쳤냐!?”

“형이야말로 미쳤어? 내가 무슨 고기 써는 기계도 아니고. 그 정도는 형이 직접 잘라서 먹어! 자기의 일은 스스로! 오케이?”

“아니, 귀찮은 걸 어떡하라고!? 게다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면 되지, 고기를 얼굴에 갖다 박아버리는 건 무슨 예의냐!?”

“그럼 그 흉기 같은 고기 들고 동생 때리려는 건 예의 있는 거고?”

왈왈! 크르릉! 컹컹!

라네즈와 아르닐은 언제 점잔을 떨었냐는 듯 발끈하며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님이 있는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아들의 모습에 황제는….

“조—용!!!”

콰앙—!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양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엄청난 균열이 생겼다.

너덜너덜해진 식당 테이블과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 카르넬 외 황실 가족 일동.

딸꾹—.

강제로 찾아온 침묵 속에서 장내에는 라네즈의 딸꾹질 소리만 가득했다.

***

“에휴. 이게 무슨 난리인지.”

전쟁 같은 식사 시간을 끝낸 후.

황태후의 방에 다시 돌아온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제가 식탁을 깨부수고 난 뒤 그들은 조용히 음식을 흡입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워낙 분위기가 살벌한 데다가 라네즈의 딸꾹질 소리 이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터라.

숨 막히는 적막감 속에서 음식을 먹는 내내 체할 것 같았던 건 덤이다.

적어도 마지막에 쌍둥이 황자들이 먹을 걸 가지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나름 편안하게 밥을 먹고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진짜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다.

“속은 좀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혹시 체한 거 아니야?”

“음. 속이 답답한 것이 체한 게 맞는 것 같아.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따뜻한 차가 들어가서 그런지 아까보단 조금 나아졌어.”

“그러면 다행인데….”

카르넬은 걱정스런 얼굴로 엘레인의 손을 조몰락거렸다.

체했을 때 이렇게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사이를 지압해주면 체기가 조금 내려간다고 들은 게 있기 때문에.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엘레인의 손을 만져주었다.

“흠흠. 이제 그만하면 되었지 않느냐?”

“아. 그렇군요. 너무 오랫동안 지압하면 좋지 않으니….”

황태후의 말에 카르넬은 아쉬운 듯 눈을 내리깔며 얌전히 엘레인의 손을 내려놓았다.

한편. 따뜻한 차가 도움이 됐지만, 카르넬의 지압에도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엘레인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이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조금 남아 있던 체기도 싹 내려간 것 같아.”

“다행이다. 다음에 또 체한 것 같으면 나한테 말해. 그때도 내가 지압해줄게.”

“정말?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엘레인과 카르넬은 싱글벙글 웃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모습에 황태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후후. 내 허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이 할미 앞에서 꽁냥거리는 것이냐.”

“아, 아니에요. 그냥 고마워서 그런 거죠오….”

“그냥 보기 좋아서 심술을 부린 것인데 꽤 재밌는 반응이 돌아오는구나. 우리 아가가 이리도 부끄러워하다니. 저 아이가 그리도 마음에 드느냐?”

“헉. 할머니도 참. 왜 그런 질문을….”

엘레인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엘레인이 황태후의 짓궂은 질문을 회피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카르넬은 황태후의 마지막 말을 마음속으로 곱씹으며 양쪽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였다.

보는 황태후가 어이없어할 만큼 수줍게 웃으면서 말이다.

“어휴. 저 아이는 놀리는 맛이 없어 재미없구나.”

“역시 놀리는 거였어요!?”

“어이쿠. 진정하거라. 그런 것보다 내가 다시 너희들을 부른 이유부터 들어봐야 하지 않겠니?”

“아, 맞다.”

엘레인은 아차 하는 얼굴로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치고 황태후는 다시 두 사람을 제 방으로 불러들였는데….

혹시 아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일까?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자 황태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희들도 아까 보았지? 앞으로 너희 둘이 넘어서야 할 벽들을 말이다.”

“벽이요…?”

“그래. 아주 굳건하고도 단단한 벽이 세 개나 있지 않았느냐.”

아하. 엘레인은 그제야 황태후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황태후의 말을 모두 이해한 카르넬은 자세를 고쳐 앉고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와 2황자. 그리고 3황자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바로 보았다. 내가 굳이 너를 우리들의 식사 자리에 초대한 이유는 은인인 네게 알맞은 대접을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 아이들이 너를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황태후가 카르넬을 초대한 건 일종의 탐색을 하기 위함이었다.

세 사람이 카르넬을 싫어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아내고.

어떤 벽을 먼저 허물 수 있는지 가늠하기 위한 탐색전.

물론 좀 더 온건하게 황제와 쌍둥이 황자들에게 카르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물어보는 방법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들에게서 명확한 답을 알아내기 어려웠다.

차라리 식당에서 있었던 일처럼.

조금 과격하긴 하지만 직접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서 대면하면, 숨기는 것 없이 날 것 그대로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다.

그 아이들조차도 자각하지 못했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것들 역시 끄집어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군요. 그래서 일부러 황제 폐하를 자극한 것이군요.”

“뭐, 그런 셈이지. 그래서 네가 보기에는 그 녀석들이 너를 왜 싫어하는지 알겠더냐?”

“일단…. 황제 폐하의 눈을 보자마자 느낀 것은 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눈치가 빠르구나. 네 말대로 그 아이는 여러 가지 부분을 신경 쓰고 있다. 특히 성황이 엘레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노발대발했었지.”

“아….”

카르넬은 탄식했다.

정말이지 끝까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다.

성황 때문에 황제는 뿌리 깊은 불신을 얻었고. 덕분에 가장 단단한 벽을 생성해내고 말았다.

“그 외에도 너를 경계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아이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란다.”

“어? 그럼 그게 아니라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가야. 그건 그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다. 이미 깨어져 나간 신뢰의 문제이기도 하고. 실제로 성황은 엘레인 너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고 있거든.”

“그런….”

엘레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성황은 꽤 좋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제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카르넬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가?

하여튼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기에 엘레인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 아버지가 멋대로 오해해서 생긴 일이긴 하지만, 애초에 내 행실이 올발랐다면 그런 오해도 하지 않았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너만큼 행실이 바른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그건 그냥 겉보기에만 그리 보였을 뿐이야. 신성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쓴 가면일 뿐인데…. 어쨌든 그걸 알고 있던 아버지는 너를 만나는 것 또한 정치적인 이유라고 생각하고 계셔.”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엘레인은 고개를 푹 숙인 카르넬을 바라보며 무릎 위에 올라간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에 카르넬은 실망과 질책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게 아닌.

도리어 따스한 손길을 건네는 엘레인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화내지 않는 거야?”

“뭘? 설마 가면 썼다는 거?”

“으응….”

“너 설마 지금도 가면 썼니?”

“아니!?”

“그런데 왜 화를 내? 얘가 정말. 실없는 소리 하고 있어.”

“…….”

카르넬은 입을 꾹 다물었다.

늦든 빠르든 어차피 알게 될 일.

엘레인이 어떠한 시선을 보내더라도 감내하겠노라 각오하고 제 치부를 드러내었지만….

엘레인은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고맙게도 말이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새삼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어?”

“응. 그런가 봐.”

“뭣…. 장난으로 한 말인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치면 어떡해?”

엘레인은 화르륵 달아오른 얼굴로 카르넬의 왼팔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카르넬은 그마저도 좋은지 실실 웃었지만 말이다.

“…좋을 때구나.”

“네?”

“후후. 아무것도 아니다.”

황태후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뿌리 깊은 불신을 뽑아내는 건 어려울 거다. 그러니 먼저 다른 벽을 허물어야 할 텐데…. 아무리 봐도 그 두 아이는 네 소문보다 다른 쪽을 더 신경 쓰는 것 같단 말이지.”

“동감입니다.”

황태후의 말에 카르넬은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그가 보았을 때 라네즈와 아르닐은 소문이 진짜든 가짜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뭐랄까.

그런 소문보다는 조금 더 원초적인 이유.

그러니까 내 동생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으르렁대는 느낌이랄까?

“뭐가? 소문 말고 뭘 더 신경 쓴다는 건데?”

“너.”

“나?”

“응. 그 두 사람은 너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해서 나를 싫어하는 거야.”

“?”

카르넬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엘레인의 머리 위에는 무수한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그러니까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카르넬은 왜 싫어하는 건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어찌 됐든 간에 라네즈 오빠랑 아르닐 오빠를 먼저 공략하는 게 좋다는 말이잖아. 제 말이 맞죠?”

“그렇단다. 하지만 더글라스 그 아이에 비해 비교적 쉽다일 뿐이지, 그 아이들 또한 그리 쉬운 상대는 아닐 게다.”

“시련이 너무 막강하군요. 딱히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뭐. 지금부터 천천히 찾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황태후의 말에 엘레인과 카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두 사람을 확실하게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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