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6화 (385/417)

386화

황태후와 작전 회의를 끝마치고 난 다음 날.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두 번째 외출을 나서기로 했다.

라네즈와 아르닐을 공략할 마땅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서, 머리도 좀 식힐 겸.

카르넬과 함께 바깥 산책이라도 가려는 것이다.

‘혹시 알아? 좀 걷다 보면 뾰족한 수가 떠오를지.’

엘레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카르넬을 휙 돌아보았다.

“오늘은 어디부터 가 볼까?”

“으음. 어제는 광장 위주로 돌아봤으니까 오늘은 광장 외곽 쪽 위주로 돌아보는 건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이네.”

참고로 오늘은 카론을 떼어놓는 데에 성공했다.

제랄이 하도 카론과 대련을 하고 싶어 해서 엘레인이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그의 대련 상대를 도맡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발은 심했지만….

다른 기사를 데려간다는 말로 설득에 성공했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는 않을 거니까.’

엘레인은 그리 생각하며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는 기사 두 명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들은 황실 제2 기사 단원이었는데. 그들은 벌써부터 엘레인의 요구에 따라, 10미터 밖에서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 위험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근처에 다가오는 일은 없을 테지.

즉, 오늘만큼은 제대로 된 데이트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잠깐만…. 저기에 있는 저 사람. 네 둘째 오라버니 아니야?”

“엥? 어디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던 그때.

카르넬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곳엔 정말 라네즈가 활짝 웃는 낯으로 황궁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언갈 한아름 안고서 말이다.

“진짜네. 오늘이 그날이라서 외출하나 보다.”

“그날? 혹시 품에 안고 있는 빵 바구니와 관련 있는 거야?”

카르넬은 라네즈가 들고 있는 바구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란색 체크무늬 천으로 덮어 놓긴 했지만, 길쭉한 빵이 두어 개 정도 튀어나와 있어서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어쩌면 달콤한 과일을 졸인 잼이나 각종 신선한 재료들을 사이에 끼운 샌드위치가 가득 들어있을지도 몰랐다.

“맞아. 오늘은 베일리 언니 동생들한테 빵 배달을 가는 날이거든.”

“베일리? 네 직속 하녀 말이야?”

“응. 오늘은 언니가 쉬는 날이니까 확실해. 라네즈 오빠가 베일리 언니네 동생들이랑 엄청 친해서 거의 약속처럼 굳어졌어. 으음…. 한 8년 됐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한 번씩은 꼭 찾아갔다고 보면 돼.”

엘레인의 친절한 설명에 카르넬은 도리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한 제국의 황자가 하녀의 집에 직접 빵 배달을 하러 간다니?

아무리 그곳 아이들과 친하다고 해도 무려 8년이나 꾸준히 배달을 간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베일리라는 여인과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모를까….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야?”

“어? 아직은 아닐걸?”

“아직 아니라는 건 이미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구나.”

“글쎄…. 라네즈 오빠는 베일리 언니를 좋아하고 의지하는 것 같던데, 베일리 언니는 잘 모르겠어. 보면 확실히 호감은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한마디로 몇 년째 썸만 타고 있다는 말에 카르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거 어쩌면.

라네즈를 공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생각해 보니까 좀 답답하네. 언니가 호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대하면 될 텐데 이상하게 질질 끌고 있단 말이지. 설마 ‘나는 너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뭐, 이런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생각을 하겠어. 아직 고백할 용기가 없어서 그런 거겠지.”

“그런가….”

엘레인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긴. 차라리 용기가 부족해서 고백도 못 하고 끙끙 앓고 있다는 게 더 그럴듯하긴 했다.

그 불같은 라네즈가 남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좋아하는 사람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니까.

“그나저나 그 베일리라는 사람이 2황자한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해?”

“당연하지! 너도 둘이 붙어 있는 거 보면 알걸? 점심시간에도 매번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그렇고. 라네즈 오빠가 8년째 베일리 언니네 집에 찾아가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

“그것도 그러네. 호감이 없으면 부담스럽다고 쫓아내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더 답답하다는 거지. 어휴.”

엘레인은 그리 말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남들이 봤을 때 그들은 이미 사귀는 사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베일리의 호감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진 않았지만, 라네즈는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런데도 몇 년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고 있으니….

남들이 봤을 때 오죽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우리가 도와주는 게 어때?”

“우리들이? …카론 경이랑 캐시 언니 때처럼 둘을 이어주자고?”

“응. 황자들도 너와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우리 사이를 다시 생각해줄지도 모르잖아.”

“아하! 한마디로 공감 수치를 끌어올리자는 거구나?”

“바로 그거야.”

카르넬의 제안에 엘레인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듣고 보니 아주 괜찮은 공략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아르닐 오빠도 사프란한테 호감 있는 것 같던데. 거기도 똑같이 도와주면 되겠다!”

“이번 방법이 통한다면 그래도 되겠지. 문제는 2황자를 어떻게 도와주느냐는 건데….”

“흐음. 일단은 자연스러움이 생명이지 않을까?”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황궁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난 시간 동안 라네즈의 연애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대화 내용은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정확히는 지난 8년간 워낙 바빴던 탓에, 라네즈의 마음을 3년 전쯤에 간신히 눈치챈 것이지만….(빵 배달도 앨리스한테 들어서 알게 됐다)

하여튼 알고 나서도 가끔 속으로만 응원했지 둘 사이에 대해 깊이 관여한 적은 없기 때문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없었다.

“이거 문제네. 둘 사이에 무슨 이벤트가 있었는지를 알아야 그걸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이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모르는 걸 억지로 생각해낼 순 없으니까. 그리고 꼭 그것만 방법인 건 아니잖아?”

“뭔가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어차피 2황자가 그 하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우선 그 하녀가 무얼 좋아하는지부터 알아내고 그걸 위주로 공략해 보는 건 어때?”

“베일리 언니가 좋아하는 거라….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어. 베일리 언니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

“사진?”

카르넬은 슬쩍 미간을 좁히며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 하녀. 볼 때마다 목에 사진기를 걸고 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응! 최근에는 엘프 마을에서 찍은 엘프 사진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더라고.”

“뭐? …그 말은 설마. 엘프가 이상형이라는 거야?”

“어? 그, 그렇게 되는 건가?”

엘레인과 카르넬은 당혹스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핫!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린 엘레인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뭐,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냥 잘생겨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면 더 문제 아닌가. 잘생긴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아.”

카르넬의 말에 엘레인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일리 있는 말에 대꾸할 말이 사라진 것이다.

“그,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 우리 라네즈 오빠도 얼굴은 엄청 잘생긴 편이잖아? 엘프 옆에 세워둬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고.”

“그야 그렇지만 엘프들은 대부분 근육이 별로 없지 않아? 어쩌면 취향이 그쪽일지도 몰라.”

“헉. 그러면 안 되는데.”

엘레인은 라네즈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은 기깔나게 잘생긴 데다가 워낙 움직이는 걸 좋아하고 검술 훈련을 열심히 해온 터라 몸이 아주 탄탄하다.

뭐랄까.

과하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게.

아주 적절하게 건강미가 넘치는 근육을 가졌달까?

가끔 기사들도 넋을 잃고 구경할 정도이니 검증된 근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베일리의 취향이 엘프처럼 여리여리한 느낌에 군살 없이 마른 근육이라면….

아무리 모두가 인정하는 완벽한 몸매를 가졌다고 해 봤자 베일리의 눈에 들어올 턱이 없다!

“이거 진짜 큰일인데….”

엘레인은 심각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위의 말대로 베일리의 이상형이 마른 근육에 여리여리한 느낌의 남성이라면 라네즈는 가능성이 없다.

물론 변화를 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열심히 가꾸었을 게 뻔한 근육을 지닌 라네즈한테 ‘오빠. 요즘 여자들은 마른 근육이 멋지다고 하더라. 고로 근육 좀 빼보는 건 어때?’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 가지고(기정사실인 것 같지만) 라네즈를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사진에 있던 엘프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

“글쎄. 일단 전부 마른 근육인 건 확실해.”

“얼굴은?”

“얼굴? 으음…. 대부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꼬리가 올라간 것 같던데. 아! 묘하게 라네즈 오빠랑 분위기가 닮은 것 같았어.”

“…….”

“…….”

“잠깐만. 이거 혹시 희망을 가져도 되는 부분인 거야?”

어쩌면. 베일리는 라네즈의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수도 있다!

희망 회로를 열심히 돌려본다면 ‘베일리는 라네즈의 얼굴이 좋아서 그를 닮은 엘프들의 사진만 골라서 보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네 말대로 아직 포기하기는 이른 것 같네. 몸매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2황자의 얼굴을 좋아하는 건 맞는 것 같으니까.”

“그럼그럼. 혹시 알아? 언니도 라네즈 오빠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고. 사실은 라네즈 오빠 같은 근육을 좋아하는 걸지도!”

“그래. 만약 그 말대로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네.”

“베일리 언니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니까 그걸 이용해서 라네즈 오빠를 어떻게 엮어보자는 거지?”

“완벽한 요약이야.”

카르넬이 씨익 웃으며 칭찬하자 엘레인의 입꼬리가 승천했다.

“우선 라네즈 오빠한테 사진기를 선물로 줘보라고 해 볼까? 얼마 전에 괜찮은 사진기를 사기는 했지만, 나중에 돈 모아서 다른 기능이 들어간 사진기도 사고 싶다고 했었거든.”

“괜찮은 생각이네. 그럼 사진기를 먼저 확인하러 가 볼까? 마침 백화점 앞이기도 하고.”

“어? 언제 여기까지 왔지?”

엘레인은 백화점을 발견하곤 뺨을 긁적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어제 들렀던 거리까지 오게 되었다.

뭐, 그의 말마따나 신형 사진기를 구경하기에 백화점만큼 좋은 곳은 또 없으니 한 번 더 방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했다.

“근데 오늘은 우리들을 알아보지 못하겠지?”

“왜? 부담스러웠어?”

“솔직히 좀 그랬지.”

엘레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모자를 더욱 깊숙이 끌어내렸다.

마지막에 보디가드들이 자리를 비워줘서 좀 낫긴 했지만, 어제처럼 우르르 몰려와 또 시선을 끌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은 우리 둘만 있으니까 알아보지 못할 거야.”

“그렇겠지?”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르넬의 말대로 오늘은 카론 경과 캐시가 없으니 로브를 쓰고 있는 두 사람을 알아볼 자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엘레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황녀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 뒤쪽으로 새까맣게 잘 빠진 마차가 스르륵 멈춰 섰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튀어나온 트렌디아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엘레인은 직감할 수 있었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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