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7화 (386/417)

387화

“어머나! 안 그래도 황녀님을 뵙고자 편지를 쓰고 오는 길인데. 마침 잘 만났어요!”

트렌디아는 반갑게 웃으며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더니 엘레인에게로 다가갔다.

그에 엘레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를요? 아, 아니. 그것보다 저인 줄은 대체 어떻게 아신 거예요?”

“딱 보면 알겠는걸요? 아무리 로브로 감추려 해도 제 눈을 속일 수는 없답니다.”

그리 말한 트렌디아는 후후 웃더니, 엘레인과 그 옆에 선 카르넬을 바라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지난번에는 그란디스 국왕과 데이트를 가느라 크게 신경 쓰지 못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제와 같이 커플 로브를 쓰고 거리를 거니는 두 남녀.

누가 봐도 그렇고 그런 사이임이 분명한 모습에 트렌디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방해꾼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쟁취하신 거군요…!’

트렌디아는 지난날 엘레인이 겪었던 고생을 모두 알고 있다.

엘레인에게 관심이 있는 영식이 접근할라치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철통 방어를 하던 세 황자들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란 듯이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장합니다, 황녀님!

“…?”

엘레인은 갑자기 무언가 감동을 받은 듯. 벅차오르는 얼굴로 코를 훌쩍이는 트렌디아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혹시 여름 감기에라도 걸린 건가?

그녀의 건강에 대해서 진지하게 걱정하고 있을 때.

여태 조용히 있던 카르넬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엘레인을 만나고자 하신 겁니까?”

“아차. 내 정신 좀 봐. 실은 황녀님께 부탁할 게 있거든요.”

“저한테요? 어떤 부탁인데 그러세요?”

“네. 황녀님의 직속 하녀 중에 베일리라는 사람이 있죠? 제가 그분에 대한 소문을 조금 들었는데…. 혹시 사진작가로서 의뢰를 맡아주실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아! 모델은 엘프로 하고 싶은데 그것도 가능할까요?”

트렌디아의 간곡한 요청에 엘레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진작가?

게다가 모델로 엘프를 쓰고 싶다니….

마침 조금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에서 몇 번씩 나왔던 단어여서 그런지.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건가요?”

“이번에 제가 직접 디자인한 정장이 있는데 그걸 사진으로 찍어서 광고하려고 해요.”

“정장이라면 저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이요?”

엘레인은 마차 앞에서부터 백화점 입구까지 죽 늘어선 보디가드들을 조심스레 가리켰다.

그 날카로운 눈썰미에 트렌디아는 두 눈에 이채를 띠며 감탄했다.

“네, 바로 맞히셨어요! 근데 저건 6개월 전에 만든 면이나 리넨으로 된 직물이고. 이번에는 신소재를 무려 두 가지나 사용해서 만든 거라서 느낌이 확 다를 거예요. 게다가 물에 젖은 걸 비틀어 짜내도 변형이 거의 안 되고요.”

트렌디아는 깨알 자랑을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근데 물에 젖은 걸 쥐어짜 내도 변함이 거의 없는 직물이라니.

그거 엄청난 거 아닌가?

“대단한 기능이네요. 그런데…. 굳이 엘프를 모델로 삼고 싶은 이유는 뭔가요?”

“으음. 그게 말이죠. 원래는 은근하게 야성미를 드러내는 쪽으로 컨셉을 잡고 만든 거라, 우리 자기를 모델로 하려고 했거든요. 왜, 그런 거 알죠? 튼튼한 가슴 근육. 그리고 터질 것 같은 와이셔츠! 거기서 나오는 거친 야성미!”

“아하하. 네.”

엘레인은 무척 흥분한 트렌디아를 보며 재빨리 동의했다.

트렌디아는 튼튼한 근육을 가진 야성적인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뭐, 그런 깨달음을 얻은 채 말이다.

그러자 콧숨을 내뿜으며 들썩거리던 트렌디아가 이번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그이의 몸은 커도 너무 크잖아요? 아무래도 그런 몸은 수트 핏이 잘 안 받아서 말이죠. 그에 반해 엘프들은 조금 말랐긴 하지만 기럭지도 좋고 얼굴도 아름다우니까 아주 좋은 그림이 될 거예요! 야성미를 포기하는 건 아쉽지만 말이죠.”

트렌디아의 열정적인 설명에 엘레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엘프만큼 아름답고 기럭지까지 시원시원하게 뻗은 사람은 구하기 힘들지.

그런데….

야성미를 드러내는 게 원래 목적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지 않나?

그란디스 국왕처럼 몸과 근육이 너무 크지도 않고.

심지어 엘프만큼 잘생긴 데다가 쭉 뻗은 기럭지까지 전부 챙긴 그런 사람 말이다.

“…카르넬. 혹시 너도 같은 생각해?”

“응. 나도 같은 생각이야.”

엘레인과 카르넬은 두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시선을 나누며 무언의 동의를 마친 엘레인은 트렌디아에게 역제안을 했다.

“있잖아요. 엘프 말고 우리 둘째 오빠를 모델로 삼는 건 어때요? 아까 말한 3박자를 모두 충족하는 건 물론이고 훨씬 더 파격적인 이슈가 될 거 같은데.”

예상치 못한 내용에 트렌디아는 떡하니 입을 벌렸다.

사실 그녀는 이번 광고에 가장 완벽하게 들어맞는 자가 2황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히 황족에게 광고 모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속으로만 묻어 두고 있었던 참이다.

그런데 이렇게 황녀님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주다니?

트렌디아는 당장이라도 만세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세상에! 저야 당연히 괜찮죠! 그런데… 2황자 저하께서 과연 허락하실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거절한다고 해도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요!”

“황녀님…!”

트렌디아가 감동한 얼굴로 엘레인의 손을 잡아 왔다.

어떻게든 설득해 본다는 엘레인의 호의에 감격한 거겠지.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은 엘레인은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호감 있는 남자와 함께 부대끼다 보면 마음도 점차 가까워지는 법.

이 정도로 완벽한 무대라면.

8년간 이어지던 라네즈의 짝사랑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이다!

***

꿀맛 같은 휴가를 지내고 난 다음 날 아침.

베일리는 바싹 구운 토스트를 입에 문 채 고심에 잠겼다.

“에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쉽단 말이지.”

한숨을 푹 내쉰 베일리는 테이블 위에 죽 늘어선 사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처음엔 이만큼 완벽한 사진을 찍어냈다는 것에서 엄청난 자부심을 느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비의 종족 엘프를.

제 손으로 직접.

그것도 이렇게 훌륭하게 찍어내지 않았는가?

얼마나 잘 찍혔는지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완벽 그 자체로 보이던 사진에도 약점은 있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아쉬운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베일리는 지난번 엘프 마을의 방문으로 한 단계 상승한 심미안을 번뜩이며 꿍얼거렸다.

“잘생기면 뭐 해? 죄다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는데!”

심지어 어딜 봐도 초록색 풀장식 또는 하얀색 천뿐이다.

중간중간 가죽으로 만든 벨트가 보이긴 했지만, 개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옷임은 변함이 없다.

그 때문일까?

아무리 얼굴이 재밌어도 금세 질리게 만든다.

아. 물론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은 무효다.

객관적으로 판단하려면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을 기준으로 말하는 게 맞지.

암. 그렇고말고.

“이 사람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으면 예쁠 것 같고. 또 저 사람은 검정 계열 코트를 입고 모자를 써주면 딱일 텐데. 하이구…. 아쉽구나, 아쉬워!”

단순 깔끔한 옷이 외모를 죽이는 경우는 또 처음 본다.

베일리는 연신 안타까운 숨을 내뱉으며 울상을 지었다.

옷이 좀 다양하다면 훨씬 더 보는 즐거움이 컸을 텐데.

완벽함을 사진 안에 담아내고 싶은 베일리로서는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가 생각하는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근육이 좀만 더 붙었으면 좋았을 텐데. 엘프들은 너무 말랐어!”

엘프들은 원래 근육이 잘 발달하지 않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녀가 찍은 사진 안의 엘프들은 모두 가녀렸다.

거기다가 펑퍼짐한 옷까지 입으니 정말로 옷 태가 나질 않았다.

뭐랄까.

보면 볼수록 자꾸만 크게 느껴지는 문제점 때문에 속이 상한달까?

엘프 마을을 다녀온 뒤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은 ‘장인 정신’은 그 조그마한 틈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끄응. 딱 2황자 저하처럼만 입으면 좋을 것 같은데.”

베일리는 여느 때처럼 쉬는 날에 찾아온 라네즈를 떠올리며 토스트를 우물우물 씹어 삼켰다.

라네즈도 그닥 화려한 옷을 즐겨 입는 편은 아니지만, 워낙 몸이 좋아서 그런 건지 아무거나 걸쳐도 태가 났다.

아마 그라면 이 펑퍼짐한 옷을 입어도 멋지게 소화해 낼지도…?

“헉! 불경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옷이 꽉 낀다며 불편해하는 라네즈를 떠올린 베일리는 기겁을 하며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는 어디 한 군데씩 라네즈를 닮은 사진을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테이블 위로 머리를 쾅! 내리찍었다.

“누나…? 갑자기 왜 그래?”

옆에서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토니가 미친 사람을 보듯 제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후다닥. 테이블 위에 늘여놓았던 사진을 주워 담기 시작하자, 경악 서린 토니의 얼굴에 한심하다는 시선이 추가됐다.

지난날. 2황자가 돌아가고 나서부터 방에 콕 들어박혀서 엘프 사진만 보던 걸 이미 목격한 바가 있는데.

이제 와서 숨기려 드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하아. 내 누나지만 참….’

토니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누나를 보니, 그 2황자가 불쌍해지려고 한다.

그는 알고 있을까?

제 누나가 잘생긴 엘프의 사진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음흉하게 웃고 다니는 것을?

‘…울지 않으면 다행인데.’

토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처음 라네즈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이었던가.

당시 누나가 황녀님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2황자에게 건네준 적이 있는데.

이후 2황자가 고맙다면서 감사의 인사차, 빵과 과일 바구니를 들고 다시 찾아왔었다.

어리숙하게 웃으며 살갑게 대하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더랬지.

물론 동생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하여튼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는데, 동생들이 라네즈가 챙겨온 빵을 허겁지겁 먹으며 자주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여기까지는 어린아이의 투정이라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문제는 2황자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줬다는 데에 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게도.

당시 동생들의 이야기를 들은 2황자는 이렇게 외쳤다.

‘좋았어. 앞으로 너희들의 빵은 내가 책임져준다!’

물론 연민이라든가 동정 같은 걸 느끼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순수하게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덕분에 누나와 나는 그의 말에 재빨리 반응하지 못했다.

그 결과. 2황자는 일주일에 한 번 빵을 가지고 찾아오겠다고.

동생들과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며 약속해버렸다.

오늘도 몰래 찾아온 주제에.

그런 장기적인 약속을 덜컥해버린 것이다!

뭐, 그 뒤로 누나가 안 찾아와도 된다고 말리고.

나 또한 옆에서 자꾸 짜증을 내도 2황자는 계속 찾아왔다.

얼마나 고집이 센지 그 질긴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나름 실력은 있는 모양인지 아직까지 빵 바구니와 함께 하는 밀회는 들키지 않았고 말이다.

어쨌든 그가 이렇게 찾아온 지 한 2년쯤 지났을 때였던가.

지독히도 추운 겨울날.

2황자는 그날도 빵 바구니를 들고 왔는데.

맨손으로 빵 바구니를 들고 온 게 측은했던 건지. 누나는 손수 뜬 목도리랑 장갑을 그에게 선물로 줬다.

심지어 직접 장갑을 끼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기까지 했을 때에 2황자의 얼굴은 아주 웃기게 변했다.

얼굴이랑 귀까지 완전히 새빨개져 가지고 김이 풀풀 나는 것이.

난 무슨 주전자에 물 데워놓은 건 줄 알았다.

물론 웃긴 거랑 별개로 토니는 매우 짜증이 났다.

동생들 중에 그나마 머리 큰 사람은 바로 나니까.

저게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쯤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정확히는 여태 좋아했던 마음을 그때서야 자각한 거겠지.

짜 증났지만, 그래도 차마 2황자를 괴롭힐 수는 없어서(상대가 황자인 것도 문제지만, 2년간 미운 정이 다 들어버렸다.) 당시 그는 틱틱거리기만 했었다.

물론 그조차도 바보 같은 2황자는 다 받아줬지만 말이다.

듣기로는 다혈질에 불같은 성질을 지녔다던데, 참 이상하지.

하여튼 토니는 라네즈의 사랑을 제일 가까운 데에서.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누나는 다른 남자 사진을 보면서 실실 웃고 있다니….

‘에휴. 저러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성격 이상한 남자가 좋다고 따라가면 어떡하지.’

2황자도 별로지만, 다른 남자가 우리 착한 누나 데려가는 건 진짜 죽어도 싫은데….

“왜.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뭐래. 내가 언제 쳐다봤다고?”

“어휴, 됐다. 난 출근이나 하련다.”

토니는 부산스레 이동하는 베일리를 눈으로 좇더니 그녀가 선 현관 앞으로 이동했다.

“밥은?”

“조금 전에 토스트 먹었어.”

“알았어. 조심해서 가.”

“응. 너도 출근 잘하고!”

토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동생들에게도 인사를 마친 베일리가 밖으로 나섰다.

토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베일리가 깨발랄하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근심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2황자가 분발하기를 빌어야 하나….”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낸 토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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