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화
시간이 흘러 대망의 촬영 당일.
트렌디아 백화점 앞에 도착한 라네즈는 눈앞에 마중 나온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너 혼자 있냐? 엘레인은?”
“엘레인은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늦게 출발한다고 했어.”
“뭐어?”
라네즈의 미간이 아까보다 더욱 강하게 찌푸려졌다.
엘레인이 올 때까지 저 녀석이랑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져서 표정이 절로 썩어들어갔다.
“젠장. 시작도 전에 이러기냐고.”
라네즈의 손이 로브에 살짝 닿았다가 허공에서 유영했다.
차마 모자를 벗으면서까지 머리카락을 헤집을 수는 없었는지 어설프게 허공을 휘젓더니 씩씩거리며 손을 내렸다.
“그래서. 우리 먼저 들어가 있으면 되는 거냐?”
“물론이지.”
“흐음. 근데 여기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이렇게 높은 건물이면 아래로 실리는 하중이 장난이 아닐 텐데.”
라네즈는 목을 위로 꺾어야 비로소 모두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높다란 황궁조차도 최대 5층이다.
그런데 여긴 무려 7층이나 되니 안정성 면에서 의심이 될 수밖에.
“기술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뭐, 상식적으로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 건물은 드워프의 기술력과 수인들의 능력이 합쳐진 작품이라 괜찮아.”
“드워프랑 수인들?”
“그래. 듣기로는 드워프들이 고강도 자재를 만들고, 수인 건축가들이 그 자재를 이용해서 건물을 쌓았다더라고. 정확히는 콘크리트라는 자재 안에 강철로 만든 철근을 심어서 건물의 하중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고 했지. 하여튼 아주 튼튼하니 그리 겁먹지 않아도 돼.”
“누, 누가 겁을 먹었다고 그래!?”
카르넬의 안심하라는 듯한 말에, 라네즈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버럭! 소리쳤다.
“그,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거든?”
“그래. 그런 거로 치자.”
“크윽. 건성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친절한 설명에 코딱지만큼 올라가려던 호감이 다시 뚝 떨어졌다.
라네즈는 화가 잔뜩 난 사자처럼 크르릉거리더니 이내 불퉁한 얼굴로 혀를 찼다.
괜히 치고받고 싸웠다가 엘레인의 귀에 들어가서 미움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일리는 저 중에 몇 층에 있는 건데?”
라네즈는 높다란 백화점 건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훑어보며 물었다.
베일리는 일찍이 백화점에 가서 사진 찍을 준비를 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저 중에 몇 층에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음…. 아마 꼭대기 층에 있겠지? 트렌디아 양이 스튜디오를 7층에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그래? 꼭대기 층이란 말이지?”
라네즈는 두 눈을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갑자기 다리 위주로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에 카르넬은 조금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는 거야?”
“뭐하긴. 저 높은 층까지 올라가려면 계단을 수백, 수천 개 정도는 올라야 하잖아. 올라가기 전에 미리 스트레칭 좀 해놔야 덜 힘들지.”
그리 말한 라네즈는 카르넬에게도 미리 스트레칭을 하라고 툭 내뱉듯이 권했다.
아무리 카르넬을 싫어하는 그라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흐음…. 말은 거칠게 해도 심성은 착하다더니. 확실히 미래의 처남은 속이 깊은 사람이로군.’
카르넬은 엘레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처음엔 그저 여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했는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뭐랄까.
지금까지도 쭉 그랬지만, 앞으로도 그가 계속 까칠하게 대한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을 것 같달까.
하여튼 미워할 수 없는 사내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저쪽에서 호의를 베풀었으니 이쪽도 얼른 진실을 알려줘야겠지.’
결정을 내린 카르넬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라네즈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뭐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알려주려고.”
“뭔 소리야? 왜 그럴 필요가 없는데? 계단 이외에 달리 이동할 방법이라도 있어?”
라네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동작을 멈추었다.
텔레포트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뭐, 마정석 가격이 만만치 않으니 확실히 트렌디아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도입할 수 없는 기술이긴 하지.
카르넬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층간 이동이 가능한 포탈이 있어. 그걸 타고 이동하면 돼.”
“헐. 세상 많이 좋아졌네. 그럼, 거기 앞에 항상 마법사가 상주하고 있는 거야?”
“아니. 층간 이동하는 데에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마정석으로 대체하고 있어.”
“그럼 그냥 거기 위에 손을 올리고 층수만 떠올리면 되는 거네?”
“그렇지. 그런데 지금부터 우리가 갈 곳은 입장 제한이 있어서 마법사의 힘이 필요해. 저기 저 사람들을 따라가면 가장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카르넬은 내심 라네즈와 평범하게 대화하고 있는 현 상황을 신기하게 느끼며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보디가드를 가리켰다.
그의 말에 따라 가까이 접근하는 보디가드를 확인한 라네즈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더니 카르넬을 힐끗거렸다.
“뭐, 체력도 아끼고 좋네.”
저 시선의 의미는 저를 걱정했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는 걸까?
하긴 카르넬은 겉모습으로만 봤을 때 유약한 이미지 그 자체였으니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게다가 그는 아직도 오른팔의 붕대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야. 빨랑 와. 쟤가 안내해준대.”
“그래.”
카르넬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라네즈의 뒤를 따랐다.
엘레인 외에 받는 걱정이 조금 낯설었지만.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여기가 앞으로 베일리와 일할 곳….”
꼭대기 층에 도착한 라네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주위를 살폈다.
그가 도착한 장소는 상당히 번잡했는데. 처음 보는 아티팩트와 온갖 소품들이 쫙 늘어져 있었다.
“어? 벌써 오셨어요?”
그때 저쪽 구석에서 조명을 확인하고 있던 베일리가 인기척을 느끼곤 고개를 쭉 내빼었다.
베일리는 일찍이 모자를 벗고 손을 흔드는 카르넬에게 반가운 얼굴로 인사하다가 그의 곁에 선 또 다른 남자를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분이 이번에 저와 함께 일하실 모델분인가요?”
“그래. 엘레인이 직접 고른 사람이야.”
카르넬은 그리 말하며 라네즈의 등을 톡 밀었다.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그저 가벼운 터치에 불과했지만.
멍하니 서 있던 라네즈는 엄청난 힘에 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몇 걸음이나 앞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사진사 일을 맡게 된 베일리라고 해요!”
“어, 응….”
라네즈는 머뭇거리며 로브 끝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당장 벗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어차피 사진을 찍게 되면서 알게 될 터였다.
라네즈는 잠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모자를 확 벗었다.
“어…? 2황자 저하?”
“아, 안녕.”
얼굴을 온전히 드러낸 라네즈는 수줍은 새색시처럼 양손을 공손히 배 위로 올린 뒤, 힐끔. 베일리의 눈치를 봤다.
그에 잠시 뇌정지가 온 것처럼 버벅거리던 베일리는 뒤늦게 상황을 이해하곤 빽 소리쳤다.
“자, 잠깐만. 2황자 저하가 왜 여기서 나와요!?”
“내가 여기 모델이니까…?”
“네에? 대체 언제부터. 아니, 황녀님이 이번에 고른 사람이랬죠?”
“그렇게 됐어.”
라네즈는 괜스레 뺨을 긁적이며 베일리의 시선을 피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베일리와 함께할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정작 이렇게 마주하니 당당하게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정당하게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카론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니까 말이다.
정작 카론은 모델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들은 바가 없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라네즈는 혼자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게 라네즈 혼자 땅굴을 파고 있을 때.
베일리는 엘레인이 말한 삼박자를 고루 갖춘 모델이 라네즈라는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와. 내가 왜 2황자 저하를 생각하지 못했지?’
황녀님은 이미 많은 힌트를 줬었다.
몸도 좋고 기럭지도 시원하게 뻗은 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긴 그런 사람.
솔직히 그런 사람이 주위에 널려 있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미남미녀들의 천국인 황궁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황제 폐하가 있고 카론 경도 있으니 말 다 한 셈이지.
그 외에도 여럿 있지만, 그 바쁘신 분들이 굳이 모델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에 대충 의식 저편으로 그들의 존재를 밀어두었다.
그런데 그런 높으신 분이 여기에 떡하니 나타났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존재가 말이다.
‘생각해 보면 2황자 저하도 저 삼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 중 하나지. 외모도 뛰어나고 기럭지도 길고. 심지어 어깨도 딱 벌어졌고….’
베일리는 힐끗힐끗. 로브 사이로 드러난 라네즈의 탄탄한 몸을 보며 뺨을 붉혔다.
지금껏 조금. 아니, 매우 특별한 동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라네즈가 처음으로 남자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흠흠.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2황자 저하만큼 이번 컨셉에 어울리는 모델은 없는 것 같아요.”
“…정말?”
“네! 2황자 저하라면 그 난해한 컨셉도 훌륭히 소화해 내실 거예요!”
베일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라네즈를 칭찬했다.
그 덕분에, 죄책감으로 주눅 들어 있던 그의 몸이 차츰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나 열심히 할게. 처음이라 모르는 게 많지만, 그래도 가르쳐주면 잘 해낼 자신 있어.”
“저도 이렇게 제대로 된 장소에서 주요 컨셉을 잡고 사진 찍는 건 처음이에요.”
“그럼 우리 둘 다 처음이니까 서로 조언해주면 되겠네.”
“그런 거죠!”
베일리는 활기차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여뻐 보이던지….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던 라네즈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서로 힘내 보자.”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2황자 저하.”
베일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라네즈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악수를 나누는데, 어째서인지 라네즈의 얼굴이 불만으로 일그러졌다.
“왜 2황자 저하야?”
“네? 그야… 우리 베네딕트 제국의 2황자 저하이시니까요?”
베일리는 뭐가 잘못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라네즈는 울상을 지으며 베일리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오늘부터 직장 동료가 됐으니까 우리 말 놓자.”
“네? 그건 좀.”
“안 돼…?”
글썽글썽.
동그랗게 뜬 라네즈의 눈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베일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우물쭈물.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그, 그럼 라네즈 님 정도로만.”
“그래!”
라네즈는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아주 해맑게 웃었다.
그제야 떨어지는 그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괜스레 온기가 남아 있는 손을 가슴께로 끌어당긴 베일리는 푸흡.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양쪽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호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르넬은 속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무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짝사랑을 해왔다고 하기에 뒤에서 최대한 도와주려고 했는데.
생각 외로 라네즈는 알아서 잘했다.
‘앞서 위기감을 심어줘서 그런 건가?’
엘레인이 말하기를. 어렸을 때 라네즈가 카론을 나름 호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서 구태여 그를 들먹였었는데. 결과적으로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어쩌면 나와 단둘이 남겨두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엘레인은 자기 자신이 옆에 붙어 있으면 저에게 신경을 쓰느라 베일리와 크게 진전이 없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카르넬과 단둘이 먼저 백화점으로 가서 둘이 좋은 분위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조금 도와 달라고 했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뭐, 꼭 그런 이유가 아니어도 엘레인은 특별 게스트를 데려와야 했기 때문에 먼저 출발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황녀님은 어디에 계세요?”
그때 베일리가 카르넬을 향해 질문했다.
라네즈도 엘레인의 부재가 신경 쓰이는지 뒤를 돌아보았고.
카르넬은 턱을 매만지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나 기다렸어?”
때마침 뒤쪽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던 엘레인의 목소리에 라네즈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려던 순간.
뒤이어 등장한 누군가를 보고 라네즈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너…? 네가 왜 여기에 있냐?”
“미친. 형이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데?”
경악으로 물든 라네즈의 물음에.
아르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