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3화 (392/417)

393화

그날 촬영은 매우 순조롭게 끝이 났다.

끝자락에 가서 아르닐이 이런저런 트집을 잡긴 했지만, 그건 정말 사소한 비하인드 스토리에 불과했다.

그날 가장 중요했던 건 라네즈와 베일리 간의 사이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며칠간 시간을 두고 지켜본 결과를 말해 보자면. 두 사람은 남부럽지 않게 알콩달콩한 사이가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점심시간마다 직접 만든 도시락을 가지고 라네즈를 찾아가는 베일리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엘레인의 방을 찾아와 베일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라네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으음. 그래서 쫓아냈다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 아래.

간결한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은 카르넬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에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에휴.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지. 나중에 가서는 불쌍한 강아지처럼 끙끙대는데, 어떻게 그걸 모르는 척할 수 있겠어?”

“푸흣. 두 사람. 많이 참고 있었나 보네.”

“응. 딱 봐도 그런 것 같아서 같이 놀다 오라고 쫓아내 버렸지.”

엘레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작은 이슬이 잔뜩 맺힌 컵을 집어 들었다.

뭐, 그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베일리는 황궁에서 일을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라네즈와 보낼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겠지.

그래서 엘레인은 대놓고 베일리에게 자유 시간을 주며 두 사람을 함께 내쫓았던 거고 말이다.

“고생 많았어.”

“에이. 고생이랄 것까지야.”

엘레인은 푸스스 웃으며 시원한 애플티를 원샷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 참. 이번에 베일리가 찍은 사진 말이야. 그거 때문에 지금 완전 난리가 난 모양이야.”

“그래?”

말끝을 올린 것과 다르게 카르넬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날 수많은 사진을 찍긴 했지만, 메인에 사용될 사진으로는 처음 찍었던 흑백 사진이 발탁되었다.

같은 남자인 그가 봐도 멋진 사진이었으니 다른 이들 눈에는 오죽할까 싶다.

뿐만 아니라 트렌디아는 사람들 눈에 확 띄도록 백화점 외벽에. 심지어 무려 가로 8m 세로 12m의 대형 사진을 건다고 했다.

즉, 난리가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미리 만들어놓은 정장도 사이즈별로 순식간에 완판됐고 지금은 예약까지 폭주하고 있다나 봐.”

“제국의 2황자와 엘프가 입은 정장을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 하물며 그렇게 멋진 사진을 보았다면 누구나 그 사진 속 주인공이 되고 싶을 거야.”

“그러게. 트렌디아가 왜 성공한 사업가인지 바로 알겠더라니까.”

엘레인의 순수한 감탄에 카르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성공한 사업가이지 않아? 트렌디아 양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에이. 그거랑 이거랑은 완전히 다르지. 분야부터가 다르잖아?”

“하긴. 트렌디아 양은 장사를 하는 거니까.”

같은 장사라고 해도 엘레인의 사업은 사람을 구하는 대업이었고.

트렌디아 같은 경우에는 말 그대로 상업 그 자체에 중점을 둔, 비즈니스적 상업가로서 활동해왔다.

물론 목적이 다르다고 해서 결과물까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사업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어줬으니까 말이다.

“하여튼 이걸로 라네즈 오빠는 안심해도 되겠네. 지금 당장만 해도 베일리 언니랑 함께하느라 우리 쪽엔 신경도 안 쓰고 있잖아?”

“혹여나 우리 사이를 말해도 크게 반대하지 못할 거야. 여차하면 소원권을 사용하면 되니까.”

뭐, 마음의 빚을 지워둔 상태이니 굳이 소원권까지 사용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럼 다음은 3황자와 엘프인가…. 그 뒤로 3황자는 뭐 하고 있어?”

“글쎄. 듣기로는 그날 이후 멍 때리는 일이 잦아졌다고 하던데…. 아! 한숨도 많이 늘어난 것 같대.”

엘레인의 말에 카르넬은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이건 정황상 그거인 것 같은데.”

“뭐? 혹시 상사병?”

“그래. 그거.”

그날 이후 멍 때리는 일이 많아지고 한숨도 많이 늘어났다는 건 결국 사프란의 생각으로 마음이 많이 복잡하다는 것을 뜻했다.

어쩌면 그의 눈앞에 사프란의 정장 입은 모습이 계속해서 아른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촬영장에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봤는데. 이건 무조건 쌍방이야. 서로 눈도 못 마주치는 걸 보면 이미 자기 마음을 자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아.”

“그럼 그냥 뒤에서 밀어주기만 하면 되겠네?”

“응. 어쩌면 라네즈 오빠 때보다 더 쉬울지도 몰라.”

엘레인은 확신에 가득 차서 말했다.

물론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앞서 사랑의 작대기 작전이 성공하기도 했고.

아르닐과 사프란은 이미 서로를 좋아하고 있으니 뒤에서 조금만 도와줘도 알아서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좋아. 그럼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 보자.”

“그래.”

카르넬과 짧은 회의를 끝마친 엘레인은 이번에도 커플 만들기 대작전이 통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일을 너무 쉽게 보았기 때문일까?

엘레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대충 상황을 설명해 보자면.

“아르닐 오빠! 저쪽에 사프란이 있던데 가서 인사라도 해 볼….”

쌔애앵—.

“…….”

반갑게 인사하며 사프란이 있는 쪽을 알려주면 빛처럼 빠르게 반대쪽으로 사라지는 아르닐.

“아, 사프란. 미안한데 아르닐한테 물건 하나만 배달해줄래요?”

“…3황자 저하께 말입니까?”

“네! 제가 지금 바빠서 오빠 방에 들를 시간이 없거든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와아. 감사해요! 이걸 전해주면 되는데…… 그걸 왜 실프에게 넘겨주죠?”

아르닐에게 보낼 핑계로 물건을 보내 달라고 했더니 실프에게 덜렁 맡겨버리는 사프란 등.

어떻게든 두 사람을 마주치게 하려고 수작을 걸면 대충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으으…. 완전 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쪽 커플이 더 어렵네.”

엘레인은 테이블 위에 철퍼덕 엎어지며 울상을 지었다.

한편 테이블 위에 눌린 엘레인의 뺨을 귀엽게 바라보던 카르넬은 침음을 흘리며 두 사람의 문제점을 짚어 냈다.

“3황자는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것 같네.”

“그러니까 말이야. 사프란은 이상하게 자꾸 선을 긋는 것 같고. 둘 다 자각은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서로 다가서질 못하는 것 같아.”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같은 극 자석도 아니고.

서로 밀어내기만 하는 모습에 엘레인은 답답함을 느꼈다.

“진짜 어떡하지?”

엘레인은 테이블 위에서 꾸물거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 모습을 여전히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카르넬은 엘레인의 고민을 들을 때부터 떠올린 방법을 꺼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속닥속닥.

엘레인은 카르넬이 작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요약하자면 당당하게 사기를 치자는 말이었지만….

엘레인은 그걸 또 좋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이야. 그거 괜찮은 방법인데?”

“그렇지?”

“응. 지금 당장 실행해 보자!”

정말이지.

금슬 좋은 부부사기단이 따로 없었다.

***

황궁 정원.

그곳 한구석에 대충 널브러진 아르닐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그는 최근 고민이 많았다.

바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가 연애 쪽으로는 영 숙맥이라는 것이다.

“하.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르닐은 새하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눈을 감으면 돌루스와의 결전 날.

사프란과 함께 코앞에서 시선을 나누었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데 최근에는 촬영장에서 그녀의 색다른 모습까지 봐 버린 터라 더욱 잠에 빠져들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가는데 자신이 사프란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면 그건 바보다.

최소한 그 정도는 아는 그였지만, 괜히 숙맥이라는 말을 꺼냈겠는가?

그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었고.

좋아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도 없다.

물론 애정을 느끼고 표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 건 아니다.

당장 그의 옆에는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있는데. 어찌 애정을 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건 연애의 감정이 아닌, 가족애다.

그가 지금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백은… 안 되겠지.’

아르닐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았다.

제 성격이 얼마나 나쁜지 말이다.

가족이니까 예민 대마왕인 그의 성격을 받아주는 것이지. 제3자가 굳이 그의 성격을 받아줄 이유는 없다.

그나마 황족의 피가 흐르니까 대놓고 티를 내지 못하는 거지. 아마 다들 자신을 피곤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프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터.

그녀에게 괜한 실수를 저지르고, 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아르닐이었기에.

그는 아예 고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이 위험한 마음을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기로 했다.

앞서 사프란과 만날 기회가 많았지만, 모조리 회피한 것 역시 그런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아….”

“아르닐 오빠!”

“헉. 에, 엘레인?”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던 아르닐은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요즘 들어서 만날 때마다 자꾸 사프란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지. 자동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나야 쉬고 있었지. 근데… 저놈은 또 왜 네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거야?”

아르닐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한동안 사프란을 피하느라 제대로 된 견제를 하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카르넬은 당당하게 엘레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촬영장에도 있었었지. 그건 엘레인과 했다던 약속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저래도 꿍꿍이가 없다고?’

잠깐 정체기에 머물러 있던 아르닐의 경계심이 단번에 10단계까지 훅 뛰었다.

눈을 마주치자 상큼하게 웃어오는데, 그게 또 능글맞아 보여서 기분이 팍 상했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때였다.

“저놈이라니. 형이라고 해야지.”

“뭐…?”

여상스런 얼굴로 하는 대꾸에 아르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저놈이 뭐라고 한 거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카르넬은 상체를 벌떡 일으킨 아르닐을 향해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했다.

“라네즈도 나한테 형이라고 하는데 동생인 너도 형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무슨…. 라네즈 형이 너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나와 가서 확인해봐도 좋아. 분명 반갑게 인사해줄 테니까.”

카르넬은 빙그레 웃으며 그리 말했다.

참고로 이미 여러 번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카르넬은 무척 당당했다.

“말도 안 돼.”

반면 아르닐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떡 벌렸다.

그 라네즈 형이 쉽사리 형님 대우를 해줬다니.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아르닐은 그의 말을 단순한 거짓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놈의 자신만만한 표정 때문이기도 했고.

가장 큰 이유는 엘레인이 옆에서 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아르닐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올렸다.

배신자 라네즈 형의 말은 나중에 자세히 들어 보도록 하고.

일단은 그들이 왜 이곳을 찾아왔는지부터 물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아. 실은 오빠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어. 오늘 밤에 쫑파티가 있을 예정이라서 오빠한테도 알려주려고.”

“쫑파티…?”

“응. 막 화려한 건 아니고. 이번에 사진 찍었던 멤버들끼리 모여서 같이 노는 거야. 오빠도 같이 갈 거지?”

엘레인의 물음에 아르닐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흠칫했다.

‘잠깐. 그날 사진 찍었던 멤버들이 모두 모인다고?’

그 말은 사프란도 온다는 거잖아?

“아 참! 사프란은 못 온대. 무슨 일이 있다고 했는데…. 너무 아쉬운 거 있지.”

“아….”

거절의 말을 꺼내려던 아르닐은 이어지는 엘레인의 말에 안도감일지 안타까움일지 모를 감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카르넬은 피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아르닐 너도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갈 수밖에.”

카르넬의 말에 아르닐의 인상이 사나워졌다.

친근하게 저를 부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쫑파티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말하다니.

참으로 괘씸한 놈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도 참석할 건데.”

“정말? 진짜로 가는 거지? 나중에 무르기 없기다!”

“어? 으응. 당연하지.”

카르넬 녀석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기대한 아르닐은 눈에 띄게 기뻐하는 엘레인을 보고 움찔거렸다.

표정 변화 없이 어깨를 으쓱이는 카르넬도 그렇고.

나 뭔가 말려든 것 같은데.

무엇에 말려든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저녁 여섯 시에 여기 적힌 장소로 나와. 알겠지? 나 기다린다!”

“그, 그래.”

아르닐은 재빨리 제 손에 쪽지를 쥐여주고 사라지는 엘레인과 카르넬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당한 기분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카르넬이 엘레인에게 달라붙지 못하도록 옆에서 감시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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