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7화 (396/417)

397화

바&카페.

2차 쫑파티 장소로 정한 곳은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적색 마탑에서 개발한 고음질 녹음기를 사용하는지 장내에는 클래식한 음악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고.

내부에는 엔틱한 조명이 주위를 은근하게 밝히고 있어서 묘하게 감성적인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과연 연인들이 자주 찾을 법한 포근한 분위기.

그곳에서 먼저 도착한 엘레인과 카르넬이 적당히 자리 잡고 앉아 있자, 잠시 후.

아르닐과 사프란이 운디네를 뒤따라 가게에 들어왔다.

“다행히 잘 찾아왔네.”

“그러게. 근데…. 둘이 왜 그러고 있어?”

엘레인은 사프란을 부축하고 있는 아르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엘레인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연덕스럽게 질문했다.

“오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작은 사고가 아닌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쪽 다리가 그 모양이야?”

“다리를 조금 삐었을 뿐이야. 내가 치료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으음. 아르닐 오빠가 치료했으면 안심이긴 하지만….”

엘레인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할 말을 골랐다.

보통 상황이라면 쫑파티고 뭐고 환자는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겠지만.

술을 마실 것도 아니고 아르닐의 치료약은 정말로 효과가 좋으니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사프란의 수고를 꺾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여기 편하게 앉아. 마실 건 조금 전에 주문했으니까 걱정 말고.”

다행히 아르닐이 원하는 꿀을 탄 레모네이드와 사프란이 원했던 보리차는 메뉴판에 있었다.

남의 영업장에서 따로 음료를 만들어 먹을 상황을 피한 엘레인은 맞은편에 앉은 아르닐과 사프란을 힐끔 바라보았다.

‘원래 목적은 술을 마시게 해서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불행히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아 했고 사프란은 환자라서 어차피 술을 마시면 안 되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플랜 B를 이행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굳이 작전을 실행하는 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미 두 사람은 긴밀한 접촉을 할 정도로 진척이 된 상황이니까 말이야.’

엘레인은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젠 몰래 밀어줄 것도 없이 그냥 내버려두기만 해도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앞서 둘만 남아 있을 때 잘만 진도를 빼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주 불행하게도.

그건 그들에게 너무 빠른 이야기였나 보다.

“저 두 사람. 왜 대화를 안 나누지…?”

“글쎄….”

작게 속삭인 엘레인과 카르넬은 심각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판인지.

시간이 지나도 두 사람은 꽁냥거리기는커녕, 이렇다 할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아니. 딱 한 번 나누기는 했지.’

문제는 그게.

-아, 20분 지났네. 이제 완치됐을걸.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흥. 은혜랄 것까지야.

……저걸 끝으로 대화가 완전히 단절됐다는 거지만.

엘레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천장 부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에 집중하자, 위층에서 라네즈랑 베일리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오오오! 성공이다!

-대단해요! 다음은 우리 저거 하러 갈까요?

-좋아! 내가 여기 있는 거 다 따줄게!

듣기만 해도 저쪽은 얼마나 재밌게 놀고 있는지 대충 감이 왔다.

이렇듯 저쪽은 저렇게 잘하는데 이쪽은 영 맥을 못 추니….

엘레인은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아마 저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으면 진짜 너무 숨 막혀서 기절했을지도.’

그만큼 테이블 위로 날아드는 대화가 없었다.

바텐더가 눈치 볼 정도면 말 다 한 셈.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엘레인은 꿍한 얼굴로 건너편에 앉은 이들을 살폈다.

저들이 마시고 있는 음료만 벌써 다섯 잔째다.

심지어 서로 시선을 마주치면 큰일 나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저들은 고집스럽게 반대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다 보는 사람이 다 어색할 정도로 서먹서먹한 분위기는 또 어떠한지.

아까 언제 친밀하게 붙어 있었냐는 듯.

둘 사이의 거리가 대략 구만리로 벌어져 있는 것 같다.

‘뭐지? 아깐 진짜 아픈 사람이라서 챙겨줬던 건가?’

이쯤 되니 엘레인은 제가 본 장면이 제 입맛대로 보였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20분 어쩌구 하면서 상처가 다 나은 걸 확인한 건 혹시 의원으로서 제가 치료한 환자에게 보이는 관심이 아니었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아니, 아니야. 내가 본 게 잘못됐을 리가 없어. 분명히 아까 분위기 좋았잖아?’

엘레인은 모퉁이 뒤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며 이마를 쿵 하고 때렸다.

옆에서 카르넬이 깜짝 놀라서 이마를 감싸왔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새도 없이 엘레인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네? 설마 내가 여기에 있어서 그런 건가? 실험 삼아서 확 떠봐?’

생각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가슴만 더 답답해지고 혼란스러움만 더해졌다.

오죽 답답했으면 엘레인은 슬금슬금 두 사람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대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시선이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일까?

찻물을 마시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사프란이 슬그머니 시선을 마주치며 조심스레 질문을 해왔다.

시선에 꿰뚫릴 것 같아서 한 말이었지만, 하필이면 그 한마디가 엘레인에게는 가뭄의 단비.

아니, 일생일대의 기회처럼 느껴졌다는 게 문제였다.

“있잖아, 사프란.”

“예.”

“우리 아르닐 오빠 어떻게 생각해?”

“예?”

사프란이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라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두 사람 간의 사이가 좁혀질 수 있도록 조용히 서포트해주는 등.

자연스럽게 도움을 주어야 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평생이 지나도 일상적인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다.

한마디로 이번 기회를 그냥 날리면 둘의 마음을 확인시킬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게 정답일지도 몰라.’

앞서 겪었던 무수한 실패들을 떠올린 엘레인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거리는 사프란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이번에는 아르닐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르닐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뭐, 뭐를?”

“뭐냐니. 당연히 사프란이지. 아까부터 둘이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각자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만약 괜찮으면 이참에 진지하게 만나보는 건 어때?”

엘레인의 제안에 아르닐과 사프란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어울린다’와 ‘괜찮으면 진지하게 만나 봐’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뜻을 알고 있는 것과 그것에 답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얗게 물들어가는 머릿속에 다들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자 엘레인이 재차 질문했다.

“그래서 어때? 아르닐 오빠. 오빠가 먼저 말해 봐.”

“나, 나?”

“응!”

엘레인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아르닐의 얼굴이 점차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톡 건드리면 터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조금 애처롭게 보일 법할 텐데도 엘레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하루 종일 이렇게 쳐다보고 있을 것처럼.

쓸데없이 강건한 기세에 딱 다물렸던 아르닐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나는….”

팽글팽글 돌아가는 그의 눈이 슬그머니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프란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드디어 아르닐의 입이 열리자, 엘레인이 기대를 가득 담아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토록 기다리던 아르닐의 답이 돌아왔다.

우우웅—.

“어?”

발밑을 환하게 물들이는 새하얀 빛무리.

그것은 곧 아르닐의 몸을 집어삼키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도망쳤다고?”

엘레인과 카르넬은 휑하니 비어버린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내릴 답이 무엇일까 기대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회피를 선택하다니!

그동안 그렇게 당해 놓고도 또 당한 엘레인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근데 그렇게 도망쳐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엘레인은 슬그머니 사프란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아니. 저기, 그게. 내가 이럴 줄 알고 그런 건 아니고…. 어, 그러니까.”

끼이익—.

엘레인이 채, 무어라 변명하기도 전.

사프란이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는 엘레인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황녀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프란은 단호하게 그리 말하고는 차갑게 돌아섰다.

상처 입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엘레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떡해. 너무 성급하게 굴었나 봐.”

이건 뭐. 둘을 이어주려다가 공개적으로 상대방에게 수치를 준 꼴이 되어버렸다.

대답을 회피하고 도망을 가버렸으니 사프란이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는 뻔했다.

물론 엘레인이라고 아르닐이 여기서 도망을 선택할 줄은 몰랐지만, 애초에 그런 것까지 모두 고려하고 행동했어야 했다.

“진정해. 그렇게 될 줄 알고 그랬던 건 아니잖아.”

“그렇지만…. 아,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 잠깐 여기에 있어.”

“뭐? 어디에 가려고?”

“잠깐 따라 나갔다 올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보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최소한 오해는 풀어줘야 했다.

아르닐이 대답하는 것조차 싫어서 도망친 게 아니라 그저 대답하기가 부끄러워서 도망친 거라고.

더는 손쓸 수 없을 상황까지 가기 전에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정정해줘야 했다.

“금방 다녀올게.”

엘레인은 걱정 가득한 카르넬을 안심시켜주며 재빨리 사프란의 뒤를 따라 나갔다.

다행히 그녀는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테라스 아래에 서서 휘영청 뜬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꽤 쓸쓸해 보여 잠시 주춤했지만.

엘레인은 이내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프란. 잠깐 내 이야기 좀 들어주면 안 될까?”

“황녀님….”

사프란은 고개를 돌려 엘레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쌀쌀맞지만, 아까보단 덜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 엘레인은 용기를 내었다.

“내가 미안해.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겠지만, 진심으로 사죄할게.”

“…….”

엘레인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고개부터 숙였다.

그에 잠시 당황한 낯을 띠던 사프란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합니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는데.”

“사프란….”

엘레인은 여전히 죄스러운 얼굴로 사프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사프란은 차갑게 굳은 표정을 풀고 씁쓸하게 웃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황녀님께서 왜 이런 행동을 하신 건지 모르는 건 아닙니다. 아마 제가 3황자 저하께 마음이 있을 거라 짐작하시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행동한 거겠죠. 3황자 저하께서 도망치신 것도 당혹스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으응…. 다행이다. 오해한 건 아니었구나.”

엘레인은 내심 안도하며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프란은 그런 엘레인을 달래듯 말을 이었다.

“황녀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사실 아까는…. 그냥 저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래서 화를 냈던 겁니다.”

“으응? 그게 무슨 뜻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엘레인이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사프란은 그런 그녀에게 따뜻하게 웃어주고는 조심스럽게 계속 끌어안고 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우선 황녀님의 예상대로 저는 3황자 저하를 사모하고 있는 게 맞습니다.”

“역시….”

“하지만 설령 3황자 저하께서 저를 좋아한다고 해도 저희 둘은 이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엘프고 3황자 저하는 인간이니까요.”

“뭐? 하프 엘프에 대해선 점점 관대해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것과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엘프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현저히 짧지요. 그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점을. 저는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

엘레인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먼저 나이가 들어갈 아르닐과 그런 그를 일찍 보내고 홀로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사프란의 입장.

과연 초월적인 사랑의 힘으로 그 문제까지 극복해낼 수 있을까?

사프란은 그 부분에 대한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뿐만 아닙니다. 저는 나중에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3황자 저하께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분 또한 제국에서 떠날 수 없는 신분이지 않습니까. 서로 고향을 포기할 수 없으니 어찌 당장의 마음을 중시하여 섣불리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사프란의 말에 엘레인은 할 말을 잃었다.

결국 마음은 있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안 되는 것들이 있으니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기껏 도와주려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프란은 엘레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발걸음을 돌렸다.

다 나았을 게 분명한 발목이 어째서인지 욱신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멍한 얼굴의 엘레인을 뒤로 하고.

그렇게 쓸쓸하게 휘영청 뜬 달빛 아래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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