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다음 날.
엘레인에게서 사프란의 이야기를 들은 카르넬은 침음을 흘렸다.
“설마 그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선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엘레인은 이마를 짚었다.
사프란을 그렇게 떠나보낸 이후.
계속해서 고민해 봤지만, 결국 그녀의 고민을 해결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산책이라도 하면서 머리를 식히면 좋은 수가 떠오를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네.”
“으음.”
카르넬은 피곤이 잔뜩 묻은 엘레인의 옆얼굴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사프란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엘레인의 안위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야에.
때마침 괜찮은 것이 잡혔다.
“잠깐. 우리 마실 것 좀 사갈까?”
“응? 나야 좋지.”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잘 됐다.
엘레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르넬을 따라 가판대 쪽으로 이동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자. 마셔 봐.”
“어? 벌써 주문 끝났어?”
“메뉴가 한 가지밖에 없었거든.”
“아하.”
엘레인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가 내미는 컵을 받아들었다.
아티팩트를 사용하기라도 했는지 컵은 매우 차가웠다.
정신을 번쩍 깨우는 감각에 작게나마 감탄한 엘레인은 슬그머니 컵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오, 뭐야. 새빨간 와인 색이네? 계피 향도 나는 것 같고…. 이게 무슨 음료야?”
“그건 뱅쇼라고 하는 건데 피로 회복에 아주 좋은 거야.”
“아하. 뱅쇼? 나 그거 어디서 들어봤어. 원래 따뜻하게 먹는 거라고 들었는데 시원하게도 먹는구나.”
엘레인은 계피 향이 물씬 풍기는 음료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한 모금 꿀꺽해 보았다.
그러자 적당히 신맛과 함께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혀를 확 감쌌다.
“맛은 수정과 비슷하네? 크으. 달달~ 허다.”
달콤하고 시원한 것을 먹어서일까?
어쩐지 피곤한 몸에 약간의 활력이 도는 듯했다.
잠시나마 모든 고민을 놓아버리게 만들 만큼 짜릿한 자극에 부르르 몸을 떨자. 옆에서 시원스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입맛에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으응. 너무 맛있어서 구수한 반응이 절로 튀어나오네.”
카르넬은 엘레인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동그란 머리를 살살 매만졌다.
귀여움에 절로 나온 행동이었지만, 정수리를 매만지던 그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왜 그래?”
“으음. 아무래도 햇볕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원한 게 들어가서 그런가? 딱히 덥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봐봐. 정수리가 이렇게나 뜨겁잖아?”
“핫뜨!”
엘레인의 비어 있는 손을 잡아 정수리 위에 올려준 카르넬은 거 보라는 듯 혀를 찼다.
“그렇지? 오죽하면 운디네가 네 어깨 위에 피신했겠어.”
-무우….
카르넬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엘레인의 어깨에 있던 운디네가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아직 힘을 비축하는 중이라서 그런지 외부 온도에 따라 운디네의 체온도 쉽게 변하곤 했다.
절절 끓어오르기 전에 엘레인의 어깨 위로 피신하긴 했지만, 망할 햇빛은 다각도로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별 소용이 없었다.
“헉. 운디네. 많이 힘들었어?”
-무뭉….
(증발해버릴 것 같아….)
“어, 어떡하지. 이러다가 운디네가 수증기가 되어버리겠어!”
“진정하고. 우선 저기로 가자.”
카르넬이 가리킨 방향에는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벤치가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응급 처치로 시원한 뱅쇼 안에 운디네를 넣은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그늘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와. 햇빛 하나 가렸을 뿐인데 엄청 시원해지네?”
“그렇지? 운디네는 괜찮아?”
-무우!
(완전 부활했다!)
뱅쇼 위에 둥둥 떠 있던 운디네가 엄지손가락을 척! 추켜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없는 부위를 만들어내서 엄지 척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니. 확실하게 기운을 차린 모양이다.
“다행이다. 우리 운디네가 수증기가 되어버리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러게. 아무래도 온도가 조금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쉬어야겠어.”
하긴….
안 그래도 슬슬 다리가 아프던 참이었다.
계속 걷는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엘레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이것 좀 들어줄래?”
“응? 뭐 하려고?”
엘레인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카르넬이 건네는 컵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카르넬이 대뜸 품을 뒤적거리더니 새하얀 손수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갑자기 웬 손수건?”
“여기에 뭐가 묻었을지 모르잖아. 자, 이제 앉아도 돼.”
“어….”
엘레인은 엉거주춤 다가가, 새하얀 손수건이 깔린 벤치 위에 앉았다.
뭐랄까….
나를 생각해주는 카르넬의 마음이 느껴져서 괜스레 뺨이 달아올랐다.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카르넬은 싱긋 웃으며 엘레인이 건네는 컵을 받았다.
찬 기운이 조금 빠졌지만, 내용물은 여전히 시원했다.
그렇게 음료를 한입에 털어 넣던 도중.
카르넬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두 인영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어? 설마 트렌디아랑 그란디스 국왕?”
엘레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두 사람 모두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란디스 국왕의 덩치와 키는 쉽게 가려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런 그와 딱 달라붙어서 팔짱을 낄 수 있는 사람은 베네딕트 제국에서 오로지 트렌디아뿐일 터.
“어머? 황녀님 아니세요?”
그때 엘레인을 발견한 트렌디아가 손을 흔들었다.
뭐야. 오늘은 로브가 아니라 인지 저해 아티팩트를 끼고 왔는데 어떻게 알아챈 거지?
엘레인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트렌디아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인지 저해 아티팩트를 끼고 오신 건가요?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답니다.”
“원래라면 모르고 지나치는 게 보통이죠. 어떻게 알아채신 거예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눈썰미가 좀 좋아서요. 이렇게 찬란한 금발과 아름다운 백발의 조합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인지 저해 아티팩트는 얼굴에만 한정되어 있다.
머리카락 색까지 인지하는 건 방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하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대륙에 몇 없으니 트렌디아는 자동적으로 아르닐과 신성제국에서 온 손님. 카르넬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후보의 옆에 찬란한 금발이 있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으리라.
“그런데 두 분은 데이트 중이신가요?”
“뭐, 그렇지.”
그란디스 국왕이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이런 데에서 엘레인과 마주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한 낯이었다.
“그러는 너희는? 옆에 3황자 맞지?”
“아, 저는 카르넬이라고 합니다. 저번에 백화점 앞에서 마주친 적이 있죠.”
“아아. 신성제국의 황태자인가? 황녀님이랑 친한 사이라고 듣긴 했는데 이 정도로 각별한 사이인 줄은 몰랐네.”
그란디스 국왕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카르넬의 등짝을 찰지게 때렸다.
따로 트렌디아에게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지만, 대번에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를 알아차린 것이다.
“녀석. 힘내라.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만, 사나이라면 기합으로 모두 이겨내라고.”
“기합… 말입니까?”
“그래. 특히 1황자랑 황제 녀석을 조심해. 그것들은 진짜 무시무시한 악마…. 아니지. 마왕 그 자체인 놈들이니까.”
황제에겐 힘으로.
1황자에겐 말빨로 크게 당한 적이 있던 국왕은 카르넬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경험이 진득하게 녹아있는 그의 조언에 카르넬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국왕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이미 오르칼의 허락은 받아냈다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아 참. 어제 회식은 잘 끝났나요?”
“아… 그럼요. 물론이죠.”
트렌디아가 손뼉을 짝 치며 하는 말에 엘레인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뭔가 석연찮은 반응에 잠시 고개를 기울이던 트렌디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자신만만하게 소개하긴 했지만, 혹여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거든요.”
“에이. 거기 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는데요. 아르닐 오빠가 처음엔 조금 미심쩍어하긴 했었지만, 나중에 고기 맛을 보고 난 뒤에는 엄청 좋아했어요.”
“생고기를 직접 구워 먹으라고 하면 다들 그런 반응을 보이곤 하죠. 후후. 3황자 저하께서 많이 당혹스러우셨겠어요.”
“네. 엄청요.”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에 트렌디아가 즐겁게 웃었다.
그녀는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닦으며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요. 쫑파티를 함께했었더라면 그 재밌는 광경을 생생하게 관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날 바빠서 참석 못 하신다고 하셨죠? 정장 예약이 엄청 많이 들어왔었나 봐요.”
“아. 제가 그날 참석하지 못한 건 정장 때문이 아니에요.”
“네? 그러면 무슨 일로…?”
엘레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최근에 그녀를 바쁘게 했을 만한 일은 누가 봐도 정장과 관련된 일일 텐데.
그것 때문에 불참한 게 아니었다고?
“사실 제가 새로운 일을 계획 중이거든요. 패션쇼라고, 제가 만든 옷을 모델들에게 입혀서 모두에게 보여주는 쇼를 열 예정이에요.”
“와아.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트렌디아 양이 만드는 옷들은 대부분 유행을 선도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올 거예요.”
“후훗. 그렇죠? 음…. 실은 좀 더 일을 진행시킨 후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떤 부탁이요?”
엘레인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묻자 트렌디아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외쳤다.
“사프란 씨와 2황자 저하 말이에요. 두 분을 런웨이에 세우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 기왕이면 3황자 저하도 같이요!”
“잠깐…. 아르닐 오빠를 모델로 삼는다고요?”
“네! 그 반짝거리는 얼굴을 가지고 고작 조명사로만 그치다니. 이건 국가적 손실이랍니다?”
국가적 손실이라니….
뭐, 그만큼 아르닐의 얼굴이 빼어나긴 했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다.
그도 그럴 게 어제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아마 둘이 함께 참여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전한다면, 둘 중 하나는 무조건 반대하지 않을까?
“으음…. 일단 라네즈 오빠는 가능해요. 베일리 언니만 곁에 있으면 만사 오케이거든요.”
“그거라면 걱정 없답니다. 어차피 이번 패션쇼에서도 사진사는 꼭 필요하거든요. 때문에 베일리 양에게는 미리 말해놨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사프란이랑 아르닐 오빠는 잘 모르겠어요.”
“네? 어째서요? 혹시 어딘가로 외출하신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닌데. 아마 부르더라도 둘 중 한 명만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씀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거로군요.”
과연 트렌디아라고 해야 할지.
단번에 정답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엘레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괜스레 주눅이 든 엘레인의 손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나요?”
“그건….”
“혹시 모르잖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엘레인이 대답을 망설이자 트렌디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
그리고 그 미소를 마주한 엘레인은 올곧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았다.
어쩌면.
그란디스 국왕과 사귀면서 온갖 역경을 겪었을 그녀라면 해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합리적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사실은….”
결정을 내린 엘레인은 사프란의 고민을 트렌디아와 공유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묵직한 침묵이 흐를 때쯤. 그란디스 국왕이 까슬한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흐음. 사프란 이 친구는 아주 이성적인 친구로군그래.”
“그런가요?”
“고럼.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통 의지로는 안 되거든. 엄청 힘들고 또 지치니까. 한마디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거지.”
“……잠깐만. 자기,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은 지금까지 나랑 만나는 걸 힘들고 지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야?”
“뭐? 아,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에….”
말 한번 잘못 공감했다가 제대로 역풍을 맞아버렸다.
매서운 눈빛으로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 국왕을 단번에 쭈굴거리게 만든 트렌디아는 잔뜩 흥분한 기세로 콧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듣자 하니까 답답해 죽겠네요. …황녀님!”
“응? 나…?”
“잘 들으세요. 그럴 때일수록 더 굳세게 나가야 한다구요!”
“그, 그래?”
갑자기 돌변한 트렌디아의 모습에 엘레인은 당혹스런 낯빛을 띠었다.
하지만 엘레인의 대답에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는지, 트렌디아는 제 가슴을 쿵쿵 내리치며 말했다.
“그럼요. 그런 상황에서는…. 아, 아니다. 그냥 제가 직접 이야기해 볼게요.”
트렌디아는 갑자기 아공간 주머니에서 도구를 꺼내더니 수표 쓰듯이 멋있게 편지를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성된 편지지를 엘레인에게 건네더니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 편지를 사프란 양에게 전달해주세요. 이후의 일은 제게 알아서 할게요!”
왜인지 모르게 절로 믿음이 가는.
무척 든든하고도 굳센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