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9화 (398/417)

399화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여기가 맞는데. 왜 아무도 없지?”

약속 장소에 도착한 사프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불 꺼진 방 안.

어두컴컴한 공간 내에 아무것도 없음을 감지한 사프란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은 약속 장소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아침 황녀님께서 주신 이 편지에는 지금 이 장소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으니 길을 잘못 들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설마 트렌디아 씨가 장소를 잘못 적은 건가?”

그게 아니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황녀님에게 들은 바로 트렌디아는 모든 것에 완벽을 기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이라도 이 장소를 벗어나서 트렌디아를 찾아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한 가지 의문이 생기자 사프란의 머릿속이 단숨에 복잡해졌다.

그렇게 편지를 꼭 붙든 채로 멀거니 서 있을 무렵.

뒤쪽에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

팟—.

하지만 사프란이 인기척의 주인공을 확인하기도 전.

뒤쪽에서 누군가가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꺼져 있던 불이 불시에 켜졌다.

“읏…?”

갑작스러운 빛에 사프란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원뿔 모양으로 오로지 한 공간만을 비추고 있는 새하얀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런웨이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그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트렌디아 씨…. 여기는?”

“후후. 이곳은 앞으로 화려한 패션쇼를 선보일 자리랍니다. 제가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은 모델들이 저 런웨이 위를 걷는 거죠.”

트렌디아는 빙그레 웃으며 새하얀 길을 가리켰다.

저걸 런웨이라고 하는구나.

그럼 양옆으로 나뉜 곳에 있는 저 좌석들은 관객들을 위한 자리인가?

사프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트렌디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이곳에 온 건 어디까지나 트렌디아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니까.

“절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사프란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었거든요. 제 첫 번째 패션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요.”

그렇군. 그래서 이런 곳에 나를 부른 거였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다.

안 그래도 ‘그 일’로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에서 이런 중대한 일을 맡는 건 여러모로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사프란이 거절하려고 입을 떼기도 전.

트렌디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모델은 런웨이를 걸으며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죠. 모든 스포라이트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이 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그렇군요.”

“하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화려해도 무대 뒤에서는 전쟁터가 따로 없답니다.”

“예? 전쟁터… 말입니까?”

“그럼요. 모두에게 완벽해 보이기 위해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신속하고 또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다시 완벽한 모습으로 탈바꿈해서 몇 번이고 더 무대 위에 서죠. 모델 수가 적어서 어쩔 수 없답니다.”

트렌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모델들과 함께 미리 발맞춰봤는데, 그땐 진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감정이 얼굴 위로 드러났는지.

사프란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모델 일은 생각보다 어렵군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그래서 더 멋진 것 같지 않나요?”

“?”

사프란의 의아한 시선이 꽂혀 들었다.

트렌디아는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새하얗게 빛나는 런웨이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 일을 준비하면서 무대 뒤의 모습이 제 인생과 비슷하다고 느껴졌어요.”

“트렌디아 씨의 인생이요?”

“네. 저도 어려운 사랑을 하고 있거든요. 그란디스 국왕 아시죠? 조만간 그이와 결혼할 예정이랍니다.”

“아!”

사프란도 그란디스 국왕이 누구인지 정도는 알았다.

앞서 베네딕트 제국에서 얻어낸 정보도 있고 캐시와 함께 역사 공부를 했었으니까.

“하지만 트렌디아 씨는….”

“네. 예상하셨다시피 저는 평민 출신이라서 반대가 많았어요.”

조심스러운 사프란의 시선에 트렌디아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이와 사귀고도 있고. 또 미래도 약속했지만, 지금도 저와 그이의 사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지금도 그들과 싸우고 계신 겁니까?”

“그럼요. 알아주는 이도, 도와주는 이도 거의 없는 힘든 싸움이지만. 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열심히 맞서 싸우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꼭… 모델들이 이 런웨이를 서기 위해서 겪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사프란은 반짝거리는 트렌디아의 두 눈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런웨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나요?”

“무엇을요?”

“왜 그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힘든 사랑을 하는 겁니까? 트렌디아 씨의 인생에는 사랑이 전부가 아닐 텐데.”

“아아. 그런 뜻이었군요.”

트렌디아는 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눈을 돌려 사프란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하기를.

“하지만 그 사랑은 제 평생에 단 한 번뿐이죠.”

“!”

“한 번밖에 없는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노력조차 해 보지 않고 버릴 수 있겠어요?”

“아….”

사프란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어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인지.

그게 아니면 최소한의 노력조차 해 보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한심함인지.

그런 원인 모를 착잡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겠죠. 불길에 달려드는 불나방 꼴이 될 수도 있다고.”

사프란 역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나 자신을 잃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환경을 포기하면서까지 이기적인 사랑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극심한 변화를 경계하고 무서워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평생을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난 후엔 과연 제가 생각했던 길만이 정답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나는 안전한 길만을 찾으면서 겁쟁이처럼 내빼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이대로 내 마음을 외면하기만 한다면.

결국, 그 끝에 선 나는 행복하게 웃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트렌디아 씨가 하는 말을 듣고 드는 생각이 있어요.”

“그게 뭔가요?”

“제가 만약…. 트렌디아 씨와 같은 힘든 길을 선택한다면 그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드디어 왔다!

이 질문만을 기다리며 빙 둘러왔던 트렌디아는 두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상담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죠. 그래서 정확히 어떤 문제들이 있죠?”

사프란은 어째 조금 기뻐 보이는 트렌디아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고 상담자의 목소리에 집중한 그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고민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터 제 의견을 말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좋아요. 그럼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죠.”

사프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트렌디아는 살짝 긴장한 듯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우선 첫 번째 문제. 엘프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꼭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요?”

“예? 하지만 저는 이곳에 잠시 유학을 온 겁니다. 계속 황궁에 신세를 질 수도 없는 노릇. 언젠가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황궁에 머무는 것이 부담되신다면 다른 곳에 주거지를 마련하면 되는 일이지요. 사프란 씨도 들어는 보았죠? 플로스 영지에 정착하고 있는 수인족들에 대해서.”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면 다행이네요. 플로스 영지는 이종족에 대한 차별이 없고 모두에게 평등하기로 아주 유명한 곳이랍니다. 게다가 베네딕트 제국은 엘프 마을과 동맹을 체결했으니 밖으로 나와 살아도 매우 안전하겠죠?”

“하지만 과연 그래도 될지는….”

“뭐가 문제죠? 밖으로 나와 산다고 해도 다른 엘프들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원할 때마다 마을에 들려서 친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아, 만약 마을에 남아 있고 싶으시다면 3황자 저하를 엘프 마을로 데려가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예? 3황자 저하를요?”

사프란이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무려 3황자를 황궁에서 빼내자니.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안 될 것도 없죠. 3황자 저하께서 황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승권도 포기한 마당에 어딜 가든 그 누구도 뭐라 할 순 없답니다. 음… 3황자 저하의 영지가 하나 있긴 하지만 그조차도 아랫사람들이 전부 관리하고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건 없답니다.”

사프란은 입을 떡 벌렸다.

듣고 있자니 그녀의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쉽게 논파해서 조금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그럼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도록 하죠. 두 번째 고민은 나이 문제였죠?”

“네. 맞습니다. 솔직히 이 문제로 그분과 시작하는 게 가장 두려웠습니다. 아무래도 3황자 저하께선 인간이시고 저는 엘프이니. 아무리 장수하셔도 제 인생의 1/5 정도만 함께할 수 있을 테죠.”

“게다가 사프란 씨는 나이를 먹어도 젊음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인간인 3황자 저하께선 그러지 못하겠죠.”

“그렇습니다….”

사프란은 우울하게 그렇노라 답했다.

솔직히 이 부분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트렌디아 역시 조금 길게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이다지도 짧다면.

그건 양측 모두 불행해지는 지름길이 되어버리니까.

“우선 이 문제에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답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요. 당장 베네딕트 제국의 황제 폐하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20대 중후반의 얼굴에서 멈췄다고 하던데.”

“아….”

사프란은 뒤늦게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에 피식 웃은 트렌디아는 사프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인간은 어느 임계점을 넘을 정도로 강해지면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지요. 실제로 어떤 소드 마스터는 280년을. 한 대마법사는 무려 300여 년의 시간 동안 살았다고 전해진답니다.”

“그 말씀은…?”

“후후. 3황자 저하께서도 대마법사의 자질이 있으시다죠? 여기에 정령수를 꾸준히 마시면서 몸에 쌓인 불순물을 정화시킨다면 건강을 유지하는 데에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방법이.”

내 고민이 이렇게나 부질없는 것이었나? 싶을 정도로 트렌디아의 입에서는 모든 고민을 타파할 해결책이 척척 나왔다.

덕분에 심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트렌디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하나뿐인 소중한 기회를 그냥 날리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트렌디아의 말이 맞았다.

좋아하는 감정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건 매우 비겁한 일이다.

평생 후회하고 살 바엔.

차라리 내 감정에 솔직해지고 조금 더 욕심을 부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저 결심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머! 잘 생각했어요!”

트렌디아는 사프란의 손을 꽉 맞잡으며 두 눈을 반짝였다.

“사랑은 나이를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고 종족을 뛰어넘는 법! 자아. 우리 함께 사랑을 쟁취해 봐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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