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2화 (401/417)

402화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황녀님의 방을 찾은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녀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응? 왜?”

“오늘따라 기분이 심란해 보여서요.”

앨리스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고 있는 엘레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어제 외출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에도 어째 살짝 넋이 나가 보였는데.

오늘은 그보다 더해 보였다.

“으음. 좋냐 안 좋냐를 따지면 사실 좋은 쪽이긴 하지.”

“어? 그런가요?”

앨리스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앗. 바로 머리를 빗겨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으응.”

엘레인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앨리스가 대기하고 있는 화장대 앞으로 가 앉았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던 앨리스는 빗살이 촘촘한 헤어 브러쉬를 잡고 엉킨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로 부스스했던 머리가 점차 차분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엘레인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얼굴을 닦아주던 상냥한 그의 손길과. 손바닥에 닿았던 부드러운 입술.

그리고 무심하게 드러났던 새하얀 쇄골 등….

“아니, 떠오르는 게 왜 이런 것뿐이냐고!”

“깜짝이야! 화, 황녀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난데없이 흑역사가 생각나서.”

“네? 흑역사요?”

대체 얼마나 끔찍한 흑역사기에 얼굴이 저렇게 빨개진 거지?

앨리스는 내심 궁금했지만, 괜히 물어봐서 황녀님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다시 빗질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던 그때.

힐끔힐끔. 거울 속의 앨리스를 쳐다보던 엘레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앨리스 언니. 언니는 요즘 리안 씨랑 어때?”

“리안이요? 그이랑은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죠?”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러니까 음…. 리안 씨랑 같이 있을 때면 무슨 생각이 들어?”

엘레인의 질문에 빗질하던 앨리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딱히 질문의 의도를 의심하는 건 아니고.

그냥 어땠을지 진지하게 생각하느라 손이 멈춘 것이다.

“흐음. 글쎄요. 정확히 이렇다고 명시할 순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사랑스럽다고….”

엘레인은 지난날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카르넬의 존재 자체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그 감정을 말이다.

엘레인은 슬금슬금 열이 오르는 뺨을 느끼며 재차 질문했다.

“보통 연인 사이엔 그렇게 보이는 게 정상이야?”

“당연하죠.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어찌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너무 당연한 것을 말하는 듯한 앨리스의 모습에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충분히 그럴듯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사람의 신체 일부를 자꾸 쳐다보게 되는 건? 그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야?”

“네? 신체 일부라는 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아, 아니야. 내가 실언했어. 방금 질문은 잊어줘.”

엘레인은 진땀을 빼며 의아함이 가득 담긴 앨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도 그럴 게, 쇄골이나 입술. 손등에 불거진 핏줄 같은 걸 어떻게 내 입으로 설명하나?

남사스럽게!

게다가 앨리스 정도의 눈치를 가진 사람에게 이런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건 그냥 ‘나 연애하고 있소!’하고 알리는 꼴밖에 안 된다.

그러니 이 질문은 완전 봉쇄! 절대 봉인이다!

“으음…. 알겠어요. 머리 정리는 이 정도로 끝낼까요?”

“그 정도면 충분해. 그보다 나 목이 마른데 마실 것 좀 가져와 줄래? 기왕이면 시원하고 달콤한 걸로 부탁할게.”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빙그레 웃어준 앨리스는 들고 있던 빗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어준 엘레인은 앨리스가 완전히 나가고 나서야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으으. 미쳤지 미쳤어. 어쩌자고 그런 질문을 한 거야?”

하마터면 카르넬과 사귀는 사이임을 들킬 뻔했다.

엘레인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애써 내리누른 채 창가 쪽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청명한 하늘이라도 보면 조금 진정이 될까 싶었지만, 그러기는 개뿔.

오히려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끄응…. 그냥 눈 딱 감고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나? 이래선 결국 내가 문제인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잖아.”

엘레인은 어젯밤부터 계속 제 머릿속을 장악한 장면들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 여파가 얼마나 대단한지….

강렬한 장면들을 겨우 흩어내며 기진맥진할 때쯤이면 나중에는 무심코 지나갔던 장면들.

그러니까 바람에 흩날리는 카르넬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미소 등이 생각이 나면서 지속적으로 엘레인의 얼굴을 뜨끈하게 만들었다.

“제발 그만 좀 생각하자. 진짜 중증 환자도 아니고 하루 종일 카르넬 생각만 하고 있는 게 말이 되냐고오….”

엘레인은 진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며 창틀에 턱을 괴었다.

이대로 무념무상 해야지.

정 안되면 노래라도 부르도록 하자.

그렇게 결심한 엘레인이 막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에 빙의하려던 순간.

“응?”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인영이 잡혔다.

꺄르르 웃으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는 저 두 사람은 분명히.

“라네즈랑 베일리네? 무슨 얘기를 하기에 저렇게 즐거워 보이는 거람.”

엘레인은 턱을 괸 채 저 멀리 보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로 꽁냥거리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새삼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보다 꽁냥거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는데.

이제는 괜한 흑심을 품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식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여야 할 판이다.

“좋을 때구나.”

엘레인은 작게 푸념하며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래쪽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에는 커다란 나무 주위에서 익숙한 정수리가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엘레인은 두 눈을 의심했다.

커다란 나무와 수풀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정황상 그 둘은 그것을 찐하게 나누고 있었다.

참고로 아르닐이 당하는 쪽인 것 같았다.

‘아니, 신성한 황궁에서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엘레인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엘프가 조금 과격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박력 넘치네. 공공장소에서 저런 것도 하고….’

엘레인은 흐린 눈으로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들이 있는 장소가 엘레인이 있는 곳 바로 아래쪽이어서 들려오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푸하! 너, 너어. 갑자기 왜 키, 키 그건 왜 하는 거야?”

“제 입술을 빤히 바라보기에 원하는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아니었습니까?”

“어? 아니, 맞기는 한데….”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들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란….

엘레인이 한숨을 삼키며 진지하게 두 귀까지 막을까 생각하고 있던 와중.

사프란이 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나누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누,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됐으니까 얼른 가자. 아까 저쪽에서 라네즈 형 목소리 들렸단 말이야.”

아르닐이 얼굴을 붉히며 그리 말하자 사프란이 그의 허리를 한 손에 잡아당겼다.

둘 다 키가 비슷해서 그런지 친한 친구끼리 부둥켜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엘레인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아까 사프란이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나누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엘레인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심지어 연애 초보인 아르닐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란다!

“그렇구나.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구나…. 내가 변태라서 그런 게 아니었어!”

감정에 솔직한 엘프가 공인하는 말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얼떨결이긴 하지만, 엘레인을 가장 괴롭혔던 문제가 깔끔하게 풀린 것이다.

“잠깐만. 그럼 다른 곳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겠네?”

엘레인은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으로 두 뺨을 감쌌다.

지금까지 끙끙 앓으며 고민하고 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카르넬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도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깊어질 줄은 몰랐어. 어느 순간부터 계속 너에게 눈이 갔고. 정신을 차렸을 때엔 지금처럼 네가 없으면 안 되는 상황까지 와버렸지.

-오래도록 키워온 마음이야.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너 또한 나와 같은 마음이잖아?

다시 떠올려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말에 엘레인이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마음의 깊이라…. 그럼 난 지금 카르넬과 비슷한 깊이까지 온 건가?”

엘레인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았다.

현재 엘레인은 한 시라도 그와 떨어져 있지 않고 싶고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며.

또 모든 행동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내 곁에 그가 없는 지금이 외로웠고. 앞으로의 미래에도 그가 없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엘레인은 새삼 깨달았다.

“그렇구나. 카르넬은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거구나.”

감정의 깊이가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이다지도 많은 것들이 바뀐다.

그제야 카르넬이 얼마나 참고 또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엘레인은 가슴께를 꾹 눌렀다.

“미안, 카르넬. 이제야 네 마음을 알겠어.”

엘레인은 붉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푸스스 웃고 말았다.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그리고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달칵.

“어머.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앨리스 언니.”

그때 앨리스가 마실 것을 가지고 복귀했다.

엘레인은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응.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거든.”

“후후. 그게 뭐였든 간에 다행이네요. 아깐 기운이 없어 보여서 걱정스러웠거든요.”

앨리스의 말에 엘레인은 멋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아까는 꽤 혼란스럽기도 했고.

머릿속이 복잡해서 심란한 마음이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다 해결되었으니까.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앨리스가 내미는 컵을 건네받았다.

“시원한 애플 티를 가져왔답니다. 꿀을 첨가해서 더욱 달콤할 거예요.”

“아, 고마워. 잘 마실게.”

잔을 건네받은 엘레인은 달콤한 향이 물씬 풍기는 내용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애플 티라….

카르넬도 이거 엄청 좋아하는데.

같이 마시면 더욱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현재 신성제국에 가 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었다.

‘몸 상태에 대해 보고도 해야 하고. 아무래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여러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라 이쯤에서 한번 복귀해야 한다고 했었지.’

이틀 뒤에 꼭 돌아온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벌써부터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린 엘레인은 이슬 맺힌 컵을 매만지며 말했다.

“아쉽다….”

“네? 혹시 입맛에 맞지 않으신가요?”

“아니야. 그냥 혼잣말.”

엘레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르넬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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