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3화 (402/417)

403화

엘레인이 큰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약속했던 날짜는 느리면서도 착실하게 찾아왔고.

그 어느 때보다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일어나 모든 준비를 마친 엘레인은 힐끔힐끔. 자꾸만 창문 밖을 살피었다.

“있잖아, 앨리스. 황녀님 누구 기다려?”

“오늘 신성제국 황태자님이 돌아오시는 날이잖아.”

“아하. 그래서 저러시는 거구나?”

베일리는 그제야 무슨 소리만 나면 자꾸 밖을 확인하는 황녀님의 행동을 이해했다.

나름 눈치가 있는 편인 베일리는 황녀님과 신성제국 황태자의 관계가 절대 일반적인 관계가 아님을 잘 알았다.

솔직히 그냥 둘이 잘 어울려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도 괜찮을 듯! 나는 이 커플 찬성이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에 가까웠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생각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 현실화되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참이다.

“뭐야, 그 뉘앙스는? 설마 너도 알고 있었어?”

“뭐가? 황녀님이랑 황태자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역시 알고 있었네?”

“훗.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베일리는 가슴을 활짝 펴며 잔뜩 거들먹거렸다.

물론 라네즈와 꽁냥거리면서 주위에 보이는 것이 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

오히려 라네즈와 연애하면서 보이는 게 더 많아졌달까?

하여튼 지난번 쫑파티에서 본 두 사람은 완벽한 커플 그 자체였다.

딱히 대놓고 꽁냥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숙련된 커플 같았었다.

왜, 고깃집 직원도 그 둘을 콕 집어서 커플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는 너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나야 황태자님이 여길 찾아오고 난 뒤부터지. 아무리 약속 때문이라지만 두 사람 같이 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잖아? 카론 경도 똑 떼어놓고.”

“카론 경은 제랄 경이랑 연애하기 바쁘던데….”

“응? 캐시가 아니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앨리스가 화들짝 놀랐다.

그에 베일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두 사람. 요즘 대련하느라 바쁘잖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최근에는 캐시도 같이 대련한다던데. 이러다 셋이 삼각 관계되는 건 아닌가 몰라.”

“에이. 그건 너무 갔지. 그런데 캐시는 사프란 씨를 케어하는 거 아니었어?”

“너 몰랐어? 사프란 씨는 요즘 3황자 저하랑 연애하느라 바쁘다던데?”

“뭐? 그게 정말이야?”

앨리스는 황당하다는 듯 베일리를 돌아보았다.

요즘 무슨 연애 열풍이 부는 것도 아니고.

사방이 커플이다.

몇 년째 풋풋한 연애를 해오고 있는 앨리스에겐 왠지 모를 위기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이러다가 새로 생긴 커플들이 먼저 결혼하는 건 아닌가 하는. 뭐, 그런 위기감.

“하여튼 둘이 잘 됐으면 좋겠네.”

“나는?”

“…그래, 너도.”

“헤헤.”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베일리가 헤죽 웃었다.

그렇게 서로 웃으며 다시 황녀님에게로 시선을 옮기던 그때였다.

“왔다!”

“어엇?”

진득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람처럼 달려가 문을 벌컥 열자, 복도에서 경비를 서며 캐시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던 카론이 화들짝 놀랐다.

“황녀님?”

“나잠깐요앞에갔다올게! 안 따라와도 돼!”

“자, 잠시만요! 그렇게 뛰다간 넘어져요!”

와다다. 말을 쏘아붙인 엘레인이 복도를 달리자, 뒤쪽에서 앨리스가 외쳤다.

그러나 엘레인은 그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미끄러지듯이 복도 위를 달렸다.

아니, 자세히 보니 진짜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운디네 더 빨리!”

-무웃!

오늘에서야 모든 힘을 되찾은 운디네가 힘차게 외치며 엘레인의 발밑에 힘을 주었다.

촤아악! 시원하게 물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튀어 오르며, 엘레인의 몸이 서핑을 하듯 복도 위를 빠르게 내달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1층에 도착한 엘레인은 정문을 벌컥 열고 그대로 눈앞의 남자에게 폭 안겼다.

“엘레인…?”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허공에 흩날리는 금색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카르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반가운 얼굴에.

그의 두 눈이 사르르 접혔다.

“이런. 내가 많이 기다리게 했나 보네.”

엘레인을 살짝 떼어낸 카르넬은 엘레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정리해주었다.

그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이던 엘레인은 문득 그의 오른손이 멀쩡하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붕대 풀었네?”

“응. 확인해 보니, 뼈가 잘 붙었다고 하더라고.”

엘레인에게서 손을 떼어낸 카르넬은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괜찮은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게 문제없이 움직이는 팔을 확인한 엘레인은 크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엘레인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부드럽게 웃는 낯으로 바라보고 있던 카르넬은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엘레인에게 내밀었다.

“짠. 이건 선물.”

“이건 뭐야?”

얼떨결에 봉투를 받아든 엘레인은 훅 끼쳐오는 달콤한 향기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단풍당 과자. 너 좋아했잖아. 예전에 먹었던 곳에서 사 온 거야.”

“아, 거기! 기억하고 있었구나.”

엘레인의 두 눈이 감동으로 물들었다. 10년도 다 되어가는 일일 텐데.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마음속이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고마워. 우리 같이 먹을까?”

“나야 좋지.”

엘레인은 방긋 웃으며 카르넬의 손을 맞잡았다.

먼저 닿아오는 손길에 놀란 카르넬을 이끌며.

친구라기보단 연인 사이에 가까운 두 사람을 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시종 시녀들을 그대로 지나쳤다.

***

황궁 정원으로 이동한 엘레인은 카르넬과 함께 티타임을 즐겼다.

티 테이블을 장식하는 메뉴는 당연하게도 시나몬 향이 가득한 애플 티와 옛 추억이 가득 담긴 단풍당 쿠키다.

엘레인은 달콤한 단풍당 쿠키를 먹으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와아. 이거 오랜만에 먹는데도 되게 맛있다. 맛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가게도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다음에 시간 되면 같이 가서 먹자.”

“나야 좋지. 근데 지금 수도 상황은 어때? 거의 다 재건했어?”

“큼직한 건물은 아직이지만, 어지간한 건물들은 전부 복구했다고 보면 돼. 덕분에 사람들도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어.”

“진짜? 잘됐다.”

엘레인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돌루스가 날뛴 이후 신성제국의 수도는 크게 파괴되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파괴된 수도에 비해 사상자가 많이 없다는 거지만, 그래도 신성제국에 널리 퍼져 있는 사제들을 모두 동원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다친 큰 사건이었다.

이틀간 카르넬이 신성제국에 잠시 복귀해야 했던 이유에는 이렇듯 혼란한 정세 때문인 탓이 컸을 터였다.

“그럼, 거기 가서 할 일들은 다 끝낸 거야?”

“일단 당장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해결하고 왔어. 나라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고. 한동안 본국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카르넬은 엘레인을 안심시키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왜인지 모르게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런 것보다 지금은 조금 전의 일이 걱정이야.”

“응? 뭐가?”

“아직 우리 사이가 알려지면 안 되는데. 조금 전에 우리가 했던 행동은 아무래도….”

카르넬은 엘레인과 재회했을 때를 떠올리며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엘레인은 카르넬을 만난 게 너무 기뻐서 그를 만나자마자 너른 가슴에 폭 안겼고.

카르넬 역시 엘레인이 너무 사랑스러웠던 나머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정리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제3자가 봤을 때 누가 봐도 핑크빛 분위기가 흐르는 그런 상황을 연출한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 그들은 서로 깍지 손까지 끼고 당당하게 그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었다.

아마 지금쯤 남겨진 사람들은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엘레인과 카르넬의 모습에 강렬한 의문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곧바로 황제의 귀에 들어가겠지.

“아깐 나도 미처 주위 시선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만약 오늘 일이 네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질 거야.”

카르넬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엘레인이 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노력한다고 했는데.

황제가 엘레인과 저의 사이를 알게 되면 그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 사이를 떼어 놓는 것으로 말이다.

“미안해. 내가 조금만 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성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아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 더 크지. 보자마자 너를 꼭 끌어안았으니까.”

“하지만….”

“그리고 그거 말인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

카르넬은 시무룩하게 떨구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전, 엘레인이 퍽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볼을 긁적이더니.

카르넬에게 미리 준비했던 자그마한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우리 사귄다고 해놓고서 제대로 된 커플링도 없었잖아.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직접 골라봤는데…. 마음에 들어?”

“아….”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린 상자 안에는 중앙에 작은 다이아가 박힌 은색 링이 들어가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반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카르넬은 천천히 손을 뻗어 상자를 건네받았다.

“고마워. 정말이지… 너무 마음에 들어.”

카르넬은 감격에 가득 찬 얼굴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소중하게 받아들인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자, 엘레인이 씨익 웃으며 그의 한쪽 손을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엘레인?”

“가만히 모셔두고만 있으면 커플링이 아니지. 내가 끼워줄게.”

엘레인은 상자 안에 있는 은색 반지를 꺼내더니 그대로 카르넬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손가락 사이를 감싸는 차가운 감촉.

카르넬은 꿈이 아니라는 듯 강렬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반지에서 시선을 떼고 제 손을 부드럽게 쥐고 있는 엘레인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너도 꼈구나.”

“당연하지. 커플링이라고 했잖아.”

엘레인은 똑같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들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짓던 카르넬은 애틋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커플링을 끼고 다녀도 되는 걸까? 안 그래도 주위 사람들에게 의심을 산 상황에서 같은 반지를 끼고 다녔다가는….”

“카르넬. 내가 이 커플링을 왜 준 것 같아?”

“?”

그러고 보니 엘레인은 왜 갑자기 커플링을 준 거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린 황제에게 들킬 것 같다며 걱정스런 말을 나누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카르넬은 잠시 움직임을 멈추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 점차 경악이 가득 들어찼다.

“너 설마….”

“카르넬. 나 너랑 평생 함께하기로 마음 정했어. 아니, 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카르넬은 벙쪘다.

이거 혹시 꿈인가? 하는 얼굴로 손등으로 입을 가로막는데, 엘레인이 그의 손을 가져와서 꽉 맞잡았다.

“그러니까 아직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나와 평생 함께해줄래?”

달콤했다.

너무 달콤해서 심장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프러포즈에 카르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리고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그가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바라건대….”

엘레인의 손을 역으로 끌어당긴 카르넬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기사가 서약을 맺듯 경건하면서도 고결한 몸짓.

이후 엘레인의 손등에 입술을 묻은 그는 그 어떤 때보다 더욱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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