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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화 (403/417)

404화

“오늘따라 날씨가 좋군.”

베네딕트 제국의 황제.

더글라스 베네딕트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감상평을 내뱉었다.

솔직히 더글라스는 살면서 태평하게 날씨에 대한 감상평을 남긴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서 굳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은 신성제국에서 온 불청객이 본국으로 돌아간 지 무려 3일째나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흠. 불청객이 없어서 그런지 일도 더 잘 풀리는 것 같군.”

“하긴 그동안 신성제국의 황태자를 신경 쓰느라 일에 제대로 집중하시지 못했지요.”

제국의 이리. 외무대신 아놀드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주군은 황녀님에 관한 일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 깐깐한 소믈리에가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온갖 소문을 끌고 다니는 카르넬의 접근이 전혀 달갑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 녀석이 별 해괴한 약속을 빌미로 엘레인의 옆에 딱 달라붙어 다니는데 어찌 일이 손에 잡힐까.

“그래도 이제라도 본국으로 돌아갔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으음. 그대의 말이 맞다.”

황제는 아놀드의 말에 깊이 동의했다.

사실 이대로 계속 엘레인의 옆에 붙어 다니면 어쩌나 많이 걱정하긴 했다.

베네딕트 제국이 조금 넓은 것도 아니고.

제국을 구경시켜준다는 약속이 만약 ‘제국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둘러보는 데만 해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르니까 말이다.

‘다행히 그런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군.’

놈이 엘레인의 친구 행세를 계속하는 동안은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계속 황궁에 눌러앉는 것만 아니면 경계 단계를 조금 낮춰도 될 것이다.

엘레인이라고 매일 신성제국에 놀러 가는 것도 아니니.

예전처럼 일 때문에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만나는 것쯤이야 충분히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가 무섭게 정보대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눈썹을 한 차례 들썩이고는 그에게 들어오라 명했다.

“무슨 일이지?”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지금 막 돌아왔다고 합니다!”

“…뭐라고?”

뿌득.

황제는 살벌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펜촉을 부러트렸다.

엘레인과의 약속을 끝내고 신성제국으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는데.

왜 또 우리 제국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이유는? 다시 돌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그게. 아직 약속이 끝난 게 아니랍니다. 돌아볼 곳은 아직 많고. 황녀님과도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신성제국에는 왜 돌아갔었던 거지?”

“황태자로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더 머물 수 있다고….”

빠직.

이번엔 펜대가 완전히 부러졌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이건 뭐.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천년만년 황궁에 눌러살 것 같은 느낌에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한번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군.”

황제는 허리가 끊긴 펜대를 손에서 털어내고는 스산하게 눈을 빛냈다.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이번에 제대로 파헤쳐 봐야 할 것 같다.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그때 이야기를 나눠보면 되겠지.

‘차라리 더러운 속내를 드러내 준다면 고맙겠군.’

놈을 내쫓을 명분이 생기는 것이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황제는 대신들을 내보내고 점심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살풍경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

엘레인은 오늘따라 식당 내 분위기가 무척 좋다고 느꼈다.

황태후는 카르넬에게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며 흥미로운 얼굴을 했고.

라네즈와 아르닐은 서로 속닥거리며 연인을 기쁘게 할 방법 따위를 주제로 토론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엘레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거참. 폭탄 터트리기 좋은 분위기로구나.

“모두 모여 있었군.”

그때 문이 열리며 황제가 등장했다.

그는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면면들을 쭉 둘러보더니 그 사이에 낀 불청객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한동안 안 보이던 얼굴이 있는데.”

“이틀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본국에 다녀왔습니다. 미리 문안 인사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딱히 죄송해할 것도 없다. 갈 때도 조용히 사라진 사람이 이제 와서 문안 인사에 목을 매는 것도 웃기는군.”

황제의 얼굴은 북풍한설보다 더욱 차가웠다.

덕분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평소 카르넬에게 대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요리를 내오도록.”

가장 상석에 가 앉은 황제는 트레이를 들고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요리사들에게 턱짓했다.

그에 요리사들은 후다닥 다가와 요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혹여나 불똥이 튈까 아주 신속하게 움직여준 덕분에 먹음직스런 요리는 금세 테이블 위를 꽉 채웠다.

“들지.”

요리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무거운 중저음 목소리가 상석에서 떨어졌다.

황제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카르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놈 저거.

뻔뻔하게 엘레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저놈을 떼어놓기 위해서 그는 여러 가지 질문을 준비해왔다.

허를 찌르는 그런 질문들을 폭풍처럼 쏟아낸다면 아무리 카르넬이라고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겠지.

‘네놈의 민낯을 벗겨내주지.’

황제는 썩소를 지으며 카르넬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막 첫 번째 질문을 하려던 순간.

엘레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 모두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덕분에 타이밍을 놓친 황제는 살짝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선수를 빼앗겼군.’

하지만 괜찮다.

우리 딸이 하는 말을 듣는 것 또한 중요하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인의 얼굴이 환해지며 발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 카르넬이랑 결혼할 생각이에요.”

“푸후우웁!”

엘레인의 폭탄 발언에 마침 물을 마시고 있던 라네즈가 내용물을 뿜어냈다.

테이블 위에 작은 무지개가 아름답게 피어났지만, 그것에 감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살짝 놀란 듯한 황태후와 경악에 가득 찬 쌍둥이 황자들이 입을 떡 벌린 채 엘레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장 큰 반응을 보여야 할 황제는 어째서인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것으로 그쳤다.

“뭐라고?”

아. 반응이 작은 게 아니었다.

황제는 그저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제가 잘못 들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여기고 싶었거나.

어쨌든 엘레인은 현실 부정을 하는 황제를 위해서 재차 말해주었다.

“카르넬이랑 결혼할 거예요. 저희 서로 사랑하는 사이거든요.”

“결혼? 사라앙?”

황제는 수줍게 웃는 두 사람을 보고 순간 눈이 뒤집힐 뻔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엘레인은 진심으로 저 놈팡이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애초에 너희 둘. 친구 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귄 지 꽤 됐어요. 친구 사이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도 왕왕 있잖아요. 저희가 그런 케이스였어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매를 단단히 굳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다.

황태자 옆에 딱 달라붙어서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를 올려다보는 딸아이의 모습만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현실 부정을 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 말은 저놈과 계속 밀회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나랑 상의도 없이?”

황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결혼에 관심 없다고 했던 딸아이가 사실은 제일 경계해야 할 놈과 사귀고 있었다고 하니 아버지 된 입장에선 세상이 무너지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 충격적인 상황에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을 무렵.

오르칼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엘레인이 어린애도 아니고 성인인데. 일일이 허락받을 나이는 지났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황제의 눈썹이 크게 튀어 올랐다.

속을 살살 긁는 건 오르칼의 특기이긴 했지만, 오늘 그는 제 아들의 말을 웃으며 넘어갈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다음으로 분노해야 할 오르칼이 전혀 충격받지 않은 듯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설마 알고 있었나?”

“예.”

“근데 왜 안 말렸지?”

“굳이 말릴 이유가 있습니까? 엘레인이 좋아해서 사귀는 건데. 오빠로서 뒤에서 응원하며 행복을 빌어줘야지요.”

허!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황제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가 반으로 접혔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데에서 착한 오라버니 역할을 가져가려고 하다니.

어버지 된 입장으로서는 오르칼의 대응법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뿌드득. 이를 간 황제는 이번엔 황태후를 홱! 돌아보았다.

“어머니도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다. 확실히 알고 있던 건 아니야.”

황태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짐작이라도 미리 공유해줬으면 어디 덧나나. 하는 생각이 치솟았지만, 황제는 다음 먹잇감을 찾아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새파랗게 빛나는 안광을 마주한 쌍둥이 황자들은 흠칫. 몸을 떨며 하소연했다.

“우리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렇군. 그럼 너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뭘요?”

“당연히 엘레인의 결혼을 반대하는 입장 말이다. 설마 그대로 용인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글쎄요. 오르칼 형 말대로 엘레인 인생은 엘레인이 알아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뭐?”

예상치 못한 라네즈의 답에 황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르칼도 그렇고 라네즈도 그렇고.

이놈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싶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라네즈의 모습에 인상을 와락 찌푸린 황제는 설마 하는 얼굴로 아르닐을 노려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으렇죠? 엘레인이 좋다는데 반대하는 건 좀….”

아르닐은 우물쭈물거리며 그리 말했다.

이로써 황태후와 오르칼. 라네즈와 아르닐의 입장이 확실해졌다.

모두 엘레인의 결혼을 찬성하는 쪽으로 말이다.

‘흐흠. 열심히 도와준 보람이 있네.’

호랑이같이 무서운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저를 도와주는 쌍둥이 황자의 모습에 엘레인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에 반해 황제는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살짝 몸을 비틀거렸다.

“이 무슨….”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들 엘레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어찌 신성제국 황태자와의 결혼을 찬성하는 거지?

현재의 더글라스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른 가족이 모두 찬성한다고 해도 나는 절대 허락 못 한다.”

“네?”

황제의 단호한 말에 엘레인은 당황했다.

다수결이면 황제도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계산 미스였다.

황제는 오히려 더욱 고집스럽게 입술을 앙다문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카르넬을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죽일 수 있었으면 이미 열댓 번은 죽였을 정도!

“엘레인 너는 지금 속고 있는 거다. 저 녀석은 너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고 접근한 거란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카르넬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 내 말이 맞다. 너는 놈에게 속고 있어.”

엘레인이 상처받을까 봐 여태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놈이 대체 어떤 식으로 엘레인을 속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딸아이의 눈을 뜨게 만들어야 했다!

“그건 오해예요. 저희 둘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고요. 그러니까 아빠도 다른 가족들처럼 그냥 내 행복을 빌어주면 안 되나요?”

엘레인은 그리 호소하며 카르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뭐라고 좀 말해 봐.

엘레인의 신호에 카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굳게 결심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엘레인의 말이 맞습니다. 장인어른. 저는 진심으로 엘레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뭐?”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황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개를 들어 놈을 보니,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이 참으로 곧다.

누가 봐도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모습.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재앙을 당겨오는 불씨가 되어버렸다.

두두두두—.

“뭐, 뭐야?”

짤랑짤랑—.

갑자기 땅이 울리는가 싶더니 식탁 천장에 붙어있는 샹들리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에 당황한 모두의 시선이 황제에게로 향했다.

무형의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황제.

현 사태를 일으킨 범인은 바로 더글라스 베네딕트였다!

덜거덕덜거덕—.

쨍그랑!

황제의 기운에 땅이 요동치며 식탁 위에 있던 접시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당황한 엘레인과 카르넬 그리고 황가 식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뒤로 물러나자.

결국, 화를 참지 못한 황제가 주먹을 쾅! 내리치며 식탁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누가 네 장인이야!”

“미친. 아버지 꼭지 돌았나 봐!”

뒤가 없는 황제의 격파 쇼에 라네즈가 꽥!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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