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6화 (405/417)

406화

모두가 떠난 방안.

혼자 남은 황제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거칠게 닦았다.

“…엘레인.”

그는 엘레인이 떠난 빈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솔직히 말해서… 좀 많이 당혹스러웠다.

원래 그가 아는 엘레인이라면 최소한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리고 조금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레인은 지체 없이 신성제국의 황태자를 선택했다.

그를 절대 신봉하는 것처럼.

일말의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말이다.

“…설마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황제는 불현듯 말도 안 되는 그런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엘레인이 말했던 게 진실이라면?

“그럴 리가 없지.”

낮게 읊조린 황제는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쓰러지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정말로 목뼈를 부러트려 죽일 기세로 손을 내뻗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신성제국의 황태자를 구하기 위해 불쑥 끼어들었던 엘레인을.

그리고 그런 엘레인을 보고 심장이 철렁한 듯 경악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 카르넬까지….

“하.”

이마를 짚은 황제는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그는 아직도 제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찝찝할 바에야 차라리 제대로 조사하고 알아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놈을 떼어낼 수 있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 수도 있으니.

그때에 가선 엘레인도 순순히 포기하겠지.

“정보대신 밖에 있나.”

“예. 부르셨습니까.”

황제의 부름에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정보대신이 조용히 들어왔다.

병실에 누워있어도 여전히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자.

황제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신성제국 황태자에 관한 정보를 내게 모조리 전달한 게 맞나?”

“송구스럽게도 100퍼센트 전달했다고 확신할 순 없습니다. 당시, 신성제국 황궁에 첩자를 심으려던 때에 세계수 납치 사건과 고대의 정령 사건이 발생해서 해당 계획을 무산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군. 그럼 이번엔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모조리 알아 와라.”

“알겠습니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정보대신은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황제는 핏물이 묻은 손을 콱 움켜쥐며 스산하게 눈을 빛냈다.

만약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평생 딸아이에게 원망을 받는 한이 있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카르넬 두르게프를 떼어 놓겠다 다짐하면서.

***

며칠 뒤.

“어때? 오늘은 대화해 봤어?”

“아니. 오늘도 문전박대당하고 오는 길이야.”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번에 그렇게 떠난 이후 황제는 병문안도 못 오게 하며 대화를 거부했다.

엘레인도 그때 그렇게 나간 게 신경 쓰여서 매일 같이 병문안을 가 봤지만.

황제는 그때마다 매번 침묵하며 굳게 닫힌 문을 절대 열어주지 않았다.

“큰일인데…. 역시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지금 설득하려고 해 봤자 네 아버지의 화만 돋울 뿐이니까.”

“글쎄. 그러면 더 안 보려고 할걸? 내가 보기엔 병상에 누워 계신 지금이 아빠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나중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저번처럼 같은 꼴이 날 수도 있으니까. 설마 잊은 건 아니지? 너 그때 진짜 죽을 뻔했다고.”

“으음….”

식당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린 카르넬은 눈썹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때 느꼈던 것은 완벽한 적의와 끔찍한 살의.

만약 거기서 엘레인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때마침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카르넬은 정말로 이 세상과 하직했을 수도 있다.

그나마 소드 마스터의 공격에 반응하여 죽을힘을 다해 옆으로 몸을 비틀어도 목에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리라.

“곤란하게 됐네. 아예 대화를 거부하시니. 설득할 기회조차 주기 싫다는 뜻일까.”

“정황상 그렇긴 한데. 이렇게 계속 회피만 한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어쨌든 한집에 사는 식구고 결국에는 나랑 얼굴을 마주칠 텐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어쩌면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지만 벌써 나흘이 지났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일종의 시위야. 내가 너랑 헤어진다고 하면 바로 문을 활짝 열어줄걸?”

“크흠….”

왠지 진짜 그럴 것 같아서 카르넬은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괜히 뺨을 긁적이며 허허롭게 웃고 있자니.

엘레인이 문득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잠깐. 나한테 좋은 계책이 있는데.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좋은 계책이라는 게 뭔데?”

“어쨌든 다시 대화를 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거잖아. 아빠가 저렇게 시위를 하면 우리도 똑같이 시위를 해보자는 거지.”

“설마 문 앞에서 농성을 벌이자는 거야?”

“아니. 그렇게 하면 확실히 문을 열고 나올 것 같긴 한데 왠지 뒷목을 또 잡을 것 같아서. 그냥 과하지 않게. 하지만 의도는 확실하게 아빠 방 아래쪽에서 우리끼리 작은 파티를 하는 게 어떨까 싶어.”

“아? 설마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자기 발로 나오게 만드는 작전인 거야?”

“바로 그거야!”

엘레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방 바로 아래쪽에서 떠드는 목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그리고 그걸 듣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지!

“특히 아빠는 소드 마스터이니만큼 청력도 발달해 있으니까 억지로 귀를 막아도 소리가 다 들릴 거야.”

“그렇구나. 그렇게 계속 신경을 쓰이게 만들면 결국에는 짜증이 나서라도 창문을 벌컥 열고 나와 주겠네.”

“바로 그걸 노리는 거지.”

엘레인과 카르넬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거라면 확실히 가능성이 있다.

그걸 확신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작전 개시다!

***

뙤약볕이 내리쬐는 대낮.

황제의 방 아래쪽에 없던 테이블이 생겼다.

“세상에. 이게 무엇입니까?”

“날씨도 좋고 해서 다 같이 티파티나 즐기려고요. 여기 풍경 좋지 않아요?”

“흐음. 확실히 티파티를 즐기기 좋은 곳이긴 한데….”

사프란의 질문에 엘레인이 웃으며 답하자, 아르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 아버지 방이 있는 곳 아니야? 이런 데에서 티파티를 해도 되는 거야? 그것도 저 녀석을 데리고.”

아르닐의 손끝이 멀뚱멀뚱 서 있는 카르넬에게로 향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카르넬이 어색하게 웃자. 엘레인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차피 아빠는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걸. 아빠가 직접 내려와서 가라고 하면 그땐 다시 생각해 보려고.”

아버지의 묵언수행.

그리고 직접 내려오면… 이라는 언급.

고작 단 두 마디였지만, 아르닐은 엘레인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아? 그런 거였어? 그럼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

“그냥 신나게 티파티를 즐기면 돼. 다른 사람들이 질투가 날 정도로.”

“오케이. 접수했어. 형도 들었지?”

“우움? 뭐라고?”

단맛을 빼고 담백한 맛이 일품인 당근 케이크를 입안 가득 넣고 있던 라네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미 진심으로 티파티를 즐기고 있는 그를 확인한 아르닐은 대충 손을 내저었다.

“그냥 맛있게 먹으라고.”

라네즈는 친절한 아르닐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라네즈 님! 여기 홍차요!”

“우우. 고마우어…!”

“헤헤. 뭘 이런 걸 가지고….”

“푸후악! 아 뜨거!”

“꺄악!”

뜨거운 홍차에 혓바닥을 데인 라네즈가 입안 가득한 이물질을 시원하게 뿜어냈고.

그걸 정면으로 맞은 베일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아주 난리가 나버린 상황에 아르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아오른 이물질을 마법으로 태워버렸고.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운디네의 힘으로 베일리를 깨끗하게 해주었다.

“헤헤. 감사해요.”

“에휴. 그러게 조심 좀 하지. 라네즈 오빤 괜찮아?”

바닥에 쓰러진 라네즈는 천천히 팔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영혼이 탈곡된 표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살아있음을 확인한 엘레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후후. 아주 난장판인 것이. 보기만 해도 즐겁구나. 죄다 커플이어서 이 할미만 외로운 걸 빼면 참 좋아.”

“아앗. 할머니….”

“후훗. 농담인 거 알지?”

황태후는 우아하게 웃으며 티파티 현장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런 얼굴로 찬물을 건네주는 베일리와 그걸 원샷하는 라네즈.

쯔쯧 혀를 차는 아르닐과 그런 그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사프란.

그리고 뒤쪽에서 조용히 서로를 챙겨주고 있는 카론과 캐시까지.

언제 이렇게 수많은 커플이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 황태후의 눈에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엘레인과 카르넬 커플이었다.

예상은 하곤 있었지만, 아들의 고집이 이렇게나 세서야….

참으로 곤란한 지경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들의 편을 들어줄 생각은 절대 없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아가야. 결혼식장은 어찌할 생각이니?”

“네? 결혼식장이요?”

“그래. 더글라스 그 녀석만 설득하면 바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잖느냐. 그러니 미리미리 생각해 둬야지.”

“어, 글쎄요. 아직 정확히 이렇다 할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최소한 식장의 위치 정도는 미리 알아둬야 하지 않겠니? 카르넬.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아. 저는 베네딕트 제국에서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침 태양신교 본단이 여기에 있으니 그쪽에서 하는 건 어떨까요?”

“호오. 그거 좋은 생각이로구나. 신성제국에서는 신전에서 진실된 축복을 받으면서 결혼식을 치르면 백년해로한다는 이야기가 있다지?”

“그렇습니다. 엘레인과 함께 백년해로한다면. 그만한 행복이 없을 것 같습니다.”

“호호호. 우리 아가가 신랑감은 참 잘 잡아 왔구나.”

“할머니도 참….”

엘레인은 수줍게 웃으며 카르넬을 힐끗 보았다.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친 카르넬이 빙그레 웃자 황태후가 옆에서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생각이냐?”

“네?”

“증손주는 몇 명이나 낳을 것인지 이 할미에게 미리 귀띔 좀 해주려무나.”

“으악! 할머니 너무 가셨어요…!”

“호호홋!”

부끄러운 질문에 엘레인이 기겁을 하며 소리치자, 카르넬은 헛기침을 하고 황태후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다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벌컥—.

발코니 쪽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드디어 기다리던 사람이 튀어나왔다.

무언가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다른 건 어떻게든 다 참아냈지만, 증손주 이야기까지 나오자 저도 모르게 울컥한 황제는 왁자지껄한 발코니 아래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

하지만 황제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벌컥 문을 열고 나왔는데도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러 면면들.

저 없이도 오순도순 둘러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왜인지 모르게 솟구쳤던 화가 수그러들고 입안이 씁쓸해졌다.

게다가.

“어휴. 머리도 좋아. 능력도 좋아. 우리 아가를 데려가기엔 이보다 적합한 아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녀석은 왜 그렇게 반대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죠? 저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 할미만큼은 네 사랑을 응원해줄 테니까.”

“그래, 엘레인! 나도 너를 응원할게.”

“크흠…. 나도 네 행복이 더 중요하니까.”

“저희도 황녀님을 응원해요!”

황태후에 이어서 라네즈와 아르닐. 그리고 다른 이들마저 엘레인을 응원했다.

“할머니, 오빠, 언니들까지….”

진심 어린 응원에 엘레인이 입을 틀어막고 감동을 표출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는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 이곳에 제 편은 아무도 없다고 말이다.

“후….”

한숨을 푹 내쉰 황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고독한 한 마리의 늑대처럼.

쓸쓸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발견한 카르넬이 엘레인을 불렀다.

“엘레인.”

“어?”

“저쪽에….”

“아…. 아빠, 나왔었구나.”

카르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본 엘레인은 탄식했다.

황제의 너른 등이 사라지고 창문이 다시 굳게 닫히는 것까지.

일련의 장면을 모두 확인한 엘레인은 허탈한 듯 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아빠는 나랑 대화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고집스럽게 입을 닫고 다시 돌아서는 그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다.

결국, 황제는 절대 제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란 걸.

엘레인과 황제 사이에는 절대로 무너트릴 수 없는 그런 벽이 세워졌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후우. 내 아들이지만 고집이 너무 세구나. 저렇게까지 단호하면 더 이상 설득은 불가능해 보여.”

“…아빠를 설득하는 건 포기해야 할까요?”

“그래. 차라리 우리끼리 결혼식 준비하고 올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황태후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엘레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허리를 꽉 껴안았다가 떨어진 엘레인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그래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르넬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아빠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아.”

“…….”

“그래도 다른 가족들은 전부 찬성해줬으니까…. 우리끼리라도 결혼식을 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카르넬 너도 그편이 좋다고 생각하지?”

이 정도면 우린 최선을 다한 거다.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질문하자, 황태후와 커플들의 시선이 카르넬에게로 집중되었다.

하긴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화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

침울하긴 하지만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 속.

모두들 카르넬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그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미안한데, 엘레인. 그건 아닌 것 같아.”

“!?”

당연히 동의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카르넬은 굳은 얼굴로 엘레인의 의견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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