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8화 (408/417)

408화

방으로 돌아온 카르넬은 스툴에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온 길에 엘레인과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잠시 방에 들렀지만, 아직 황태후와 함께 있는 것인지 방안은 주인 없이 휑했다.

“차근차근 해결하면 돼. 조급해져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카르넬은 새파란 하늘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사다난한 하루였지만, 그래도 아주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엘레인과 카르넬 둘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었던 황제에게 적어도 해명할 기회는 얻었으니까.

잘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상황이라고 볼 순 없었다.

만약 카르넬의 해명이 정말 듣기 싫었다면 황제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그를 쫓아내 버렸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최소한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은 있다는 뜻이 된다.

‘부디 내일도 내쫓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계속해서 설득하면 그 얼음 같던 황제도 조금쯤 귀를 기울여줄지도 모른다.

그런 실낱같은 희망을 끌어안은 카르넬은 이제 엘레인과의 문제로 넘어갔다.

‘일단 엘레인이 돌아오는 대로 오해를 풀고 장인어른의 설득은 내게 맡겨 달라고 해야겠군.’

상황을 잘 설명하면 엘레인도 오해를 풀고 화도 풀어줄 것이다.

믿고 기다려주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그녀를 설득하는 것 또한 제 몫이었다.

“황태자 전하. 안에 계십니까?”

“제랄? 들어와라.”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제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넬이 방문을 허락하자 제랄이 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전하. 신성제국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신성제국에서…?”

카르넬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사실 최근 신성제국에 들렀을 때 그는 성황을 만나지 않았다.

성황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지만, 어쨌든 그는 성황을 기다리지 않고 필요한 일들을 모두 끝마치고 바로 베네딕트 제국으로 복귀했다.

‘설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다시 환궁하라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 최악이었다.

두 부녀의 오해를 풀기도 바쁜데 베네딕트 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신성제국으로 돌아오라니.

만약 그런 내용이라면 그는 꽤나 화가 날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인지 일단 보기는 해야겠지.”

카르넬은 제랄에게서 편지 봉투를 건네받고 바로 개봉했다.

그리고 편지지를 펼쳐 내용을 읽은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전하?”

카르넬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결과적으로 편지에는 돌아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게 그냥 아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돌아오라는 투정 정도로 끝이 아니라는 거였지만.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성황이…. 엘레인과의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예!? 아, 아니. 갑자기 왜 반대하시는 겁니까? 황녀님과 이어지는 걸 그 누구보다 바라셨던 분이.”

카르넬은 편지지를 콱 움켜쥐었다.

솔직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라며 답장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여기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신성제국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기억하겠지.”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고대의 정령들이 튀어나와서 신성제국의 수도를 반파시켰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일 때문에 아무래도 귀족들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하군.”

“불만을 말입니까…?”

제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황상 그 불만들 때문에 성황이 황태자 전하와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 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듯한데….

애초에 고대의 정령이 튀어나온 건 주신교의 대주교. 돌루스가 벌인 일이다.

즉, 거기에 불만을 가진다면 만신전에 가지는 것이 정상인데.

어째서 그 피해가 황태자 전하에게까지 미친단 말인가?

“내가 엘레인과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성제국의 귀족들도 알고 있다.”

“설마 성황 폐하께서 이야기하고 다니신 겁니까?”

“글쎄. 아버지에게 직접 들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베네딕트 제국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보고 어림짐작한 것인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일의 발단이 아닌, 내가 아직 성황이 된 것도 아닌데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는 거다.”

“그게 왜…. 아!”

제랄은 뒤늦게 카르넬의 말을 이해하고 탄식했다.

“설마 전하께서 부마가 되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겁니까?”

카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인은 제국의 황녀이기도 하지만, 한 왕국의 국왕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족들은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것이겠지.

특히 지금처럼 신성제국 황가의 위신이 떨어진 상황에선 더더욱 경계할 만한 일이었다.

돌루스가 일으킨 상황을 종식시킨 영웅이 다른 나라 사람인 지금.

하물며 그 영웅이 베네딕트 제국의 황가 사람들이라면.

귀족들은 스스로 부마로 들어가는 카르넬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 이러면 신성제국은 베네딕트 제국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

한마디로 신성 대제국을 노리고 있는 귀족들 입장에선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전하께서 성황이 되면 모두 종식될 문제 아닙니까?”

“그렇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는 법이다. 방계의 이종사촌이 성황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허. 설마 그 방계 사람이 이번 선거에 나선 겁니까? 제가 알고 있는 전하의 이종사촌이라면 망나니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그를 밀어줌으로써 이권을 챙기고자 하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지. 참고로 이종사촌…. 가란풋은 베네딕트 제국 아래에 들어가는 일은 없도록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완전히 저격하고 있군요.”

제랄이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에 카르넬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성황은 이번 투표에서 그 녀석이 뽑힐 수도 있으니 엘레인을 포기하고 신성제국 내에서 신붓감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지 않으면 성황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황태자 자리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며 얼른 돌아오라고 적혀 있군.”

“그런…. 어찌 이런 일이.”

제랄은 침통한 얼굴로 주군의 얼굴을 살폈다.

다음 대의 성황은 선대주교 즉, 다음 대 성황을 뽑을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대주교의 투표로 결정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가란풋은 선대주교들을 제 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게 아니라면 저 자신감이 말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선대주교들을 모두 제 편으로 끌어들였을까요?”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카르넬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참고로 원래 선대주교는 다섯 명이다.

만신전에서 가장 뛰어난 영향력을 지닌 대주교 다섯 명이서 투표로 결정하는데.

지금까지는 이들이 한 가문.

그러니까 드루게프 황가에 표를 몰아줬었다.

그 대신 드루게프 황가 쪽에서는 이 선대주교들에게 필요한 이권을 챙겨줬었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가란풋의 간계로 인해 선대주교들의 마음이 돌아섰다면.

이번 대에 카르넬은 진짜 황위를 받지 못할 수가 있다.

“이건…. 쉬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로군요.”

제랄은 걱정스런 얼굴로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가 봤을 때 주군에게 베네딕트 제국의 황녀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성황의 자리는 어렸을 때부터 저의 주군이 진심을 다해 노려온 목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 저의 주군은 지금껏 다져왔던 기반을 버리느냐.

아니면 그의 세상을 변하게 한 사랑을 포기하느냐.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양자택일.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 선 카르넬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구겨진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

시간은 흘러 칠흑 같은 밤이 찾아왔다.

환한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사위 분간이 어려운 정원.

그러나 분수대로부터 시원한 물줄기 흐르는 소리가 연신 들려오는 이곳은 복잡한 마음을 잠시나마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후우.”

카르넬은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밤바람을 쐬었다.

가만히 서서 백색소음을 듣고 있자니 소란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조금씩. 그러나 차근차근 마음을 정리하고 있던 그때였다.

부스럭—.

“누구지?”

뒤쪽에서 들려오는 풀 밟는 소리에 카르넬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구름이 걷히는 하늘.

은은한 달빛이 점차 어두운 부분을 밝혀내더니. 기어코 방문객의 모습을 밝혀내었다.

“장인어른…?”

그리고 그의 모습을 확인한 카르넬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밤에. 가운 차림으로 나온 황제는 선뜩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가벼운 그의 옷차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카르넬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장인어른. 벌써 일어나도 괜찮으신 겁니까?”

벌써 두 번이나 들리는 장인어른이라는 단어에 황제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엘레인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카르넬의 의지가 듬뿍 담긴 단어였으나…. 지금 상황에서 사용하는 건 악수였던 것일까?

카르넬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황제를 바라보며 진땀을 흘렸다.

“내 몸 내가 알아서 챙긴다. 그러는 네놈은 왜 여기에 있지?”

“…잠시 바람을 좀 쐬러 나왔습니다.”

다짜고짜 멱살을 틀어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정상적인 물음이 나왔다.

그에 당황한 카르넬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하자, 황제의 두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카르넬은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이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성황이 너에게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겠군. 그것 때문에 머리를 식히러 나온 건가?”

“어떻게 그걸…. 알고 계셨습니까?”

“흥. 이 세상에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실로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했다.

“하하….”

당당하게 신성제국에 첩자를 심어놨다는 말을 들은 카르넬은 그저 웃었다.

황제는 그런 그를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황위와 엘레인. 그래서 네놈이 택한 결론은 뭐지?”

“저는….”

카르넬은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쳤다.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진중함이 느껴지는 얼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뜬 카르넬은 그를 향해 말했다.

“설령 다음 대 성황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편지를 보냈고요.”

황제는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카르넬을 노려보았다.

거짓인지 가늠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카르넬이라면 굳이 들통 날 게 뻔한 거짓말을 하지도 않겠지.

한 차례 눈썹을 꿈틀거린 황제는 재차 질문했다.

“순순히 부마가 되겠다는 건가?”

“엘레인의 곁이라면. 설령 그 선택으로 인해 노예가 된다고 해도 기꺼이 따라갔을 겁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군.”

황제의 날이 선 말에 카르넬은 가만히 웃었다.

그러고 난 뒤에는 한동안 침묵이었다.

솨아아—.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가득한 공간 속.

처음 카르넬을 봤을 때부터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황제는 꾹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난 내 딸과 걸맞은 능력을 지닌 남자가 아니면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다.”

“아….”

카르넬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저 말의 뜻은 ‘너는 아웃’이라는 걸까.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애초에 황제는 절대 카르넬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엘레인을 선택한 지금에도 반대의 뜻을 내비치고 있으니….

그렇게 카르넬이 꺾이려는 의지를 다잡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때.

황제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 내일. 내가 직접 성황을 만나고 오겠다.”

“예?”

황제의 말에 카르넬은 벙찌고 말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말의 뜻은….

“제 아버지를 직접 설득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엘레인과의 결혼을 허락해주시겠다는?”

얼마나 놀랐는지 카르넬은 경악한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

희망에 가득 찬 눈동자와 마주친 황제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는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돌아섰다.

“아…!”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차며 몸을 돌렸을 뿐.

냉소적인 황제다운 무언의 허락에.

카르넬은 빠르게 멀어지는 황제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서 외쳤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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