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4화 (414/417)

414화

다음 날 아침.

황가 가족들은 여느 때와 같이 황가 전용 식당에 모여서 식사를 했다.

여기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항상 엘레인의 옆자리를 차지하던 ‘타국에서 온 손님’이 이제는 ‘미래의 사위’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

그리고 항상 요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숨이 막히던 식사 시간이 요 며칠 간은 나름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 정도가 되시겠다.

하지만 오늘 또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으니….

황태후는 어제보다 더욱 달달하게 꽁냥거리고 있는 두 커플을 바라보며 천천히 운을 떼었다.

“소문 들었다. 어제 손주사위가 청혼을 했다지?”

“…네에?”

느닷없는 질문에, 잘게 썬 스테이크를 카르넬의 입에 물려주던 엘레인은 포크를 툭 떨어트렸다.

“헉. 미안. 아니, 근데 그게 소문이 났다고요?”

접시 위에 떨어진 포크를 신속하게 치워낸 엘레인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엔 나와 카르넬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소문이 날 수가 있지?

설마…. 다른 누가 우리 둘을 염탐하기라도 한 건가!?

“후후. 청혼 준비하는 걸 저 아이들이 도와줬는데. 어찌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아.”

엘레인은 황태후가 가리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짜게 식은 눈을 했다.

하긴 쌍둥이 황자들이 엮여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지.

엘레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라네즈와 아르닐을 찌릿 노려보고 있자, 냅킨으로 입을 닦고 있던 카르넬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응? 뭐가?”

“저 둘에겐 프러포즈에 관한 조언만 받았지, 그날 청혼한다고 말한 적은 없거든.”

“뭐? 그럼 오빠들은 왜 다 알고 있는 거래?”

의아함에 쌍둥이 황자들을 바라보자, 이제 그들은 식은땀까지 삐질 흘렸다.

엘레인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우릴 염탐한 거야?”

“그,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멀리서 본 거야! 딱 가게 불 들어오는 것까지만 보고 바로 나왔어.”

“잠깐, 형! 그걸 말해버리면 어떡해?”

“헙.”

곧바로 이실직고해버리는 모습에 아르닐이 버럭 성질을 냈다.

뒤늦게 제 잘못을 알아차린 라네즈가 서둘러 입을 가로막았지만, 이미 엘레인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내가 미쳐. 도대체 왜 미행한 거야?”

“미안. 저 녀석이 잘하고 있나 너무 걱정돼서 나도 모르게.”

“엘레인. 정말 미안해….”

라네즈와 아르닐은 우물쭈물거리며 사과했다.

뭐,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같기도 하고.

제 딴에는 걱정이 되어서 따라온 거라고 하니 엘레인도 크게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에휴.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마. 알겠지?”

“그럼! 당연하지!”

“이제부터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쌍둥이 황자들은 그렇게 외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들켰을 때에는 어떻게 되나 했는데. 그래도 엘레인이 넓은 마음으로 봐줘서 다행이었다.

“이야기 다 끝났느냐?”

“아, 할머니.”

그러고 보니 아까 황태후와 이야기하고 있었지.

엘레인이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자, 황태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할 예정인 게냐?”

“네? 결혼식이요?”

바로 어제 청혼을 받았는데 벌써 결혼식 이야기를 한다고요…?

살짝 당황한 엘레인은 카르넬과 잠깐 시선을 교환한 후 말했다.

“딱히 서두를 생각은 없어요. 이왕이면 카르넬이 성황이 되고 난 후에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니 된다. 그건 너무 늦어. 내 나이가 몇인데, 증손주까지 보고 가려면 최대한 빨리하는 편이 좋지 않겠니?”

“!?”

나왔다! 가불기!

엘레인은 간절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황태후의 모습에 입술을 뻐끔거렸다.

솔직히 황태후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무척이나 정정한 데다가 실제로 젊어 보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함께할 것 같았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황태후의 기대 어린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 것이 뻔했기에 엘레인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뒤. 옆에서 들려오는 구원의 목소리.

“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번쩍 고개를 드니, 카르넬이 싱긋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니? 성황이 되기 전에 나랑 결혼하면 이상한 소문에 휩싸일지도 모르잖아.”

부마가 된다느니 신성제국이 베네딕트 제국 산하에 들어간다느니. 헛소문이 퍼지는 것은 엘레인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카르넬은 생각이 다른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딱히 상관없어. 오해야 내가 성황이 되고 난 후에 바로잡으면 되는 일이고. 너만 괜찮다면 나 또한 바로 결혼식을 올렸으면 좋겠어.”

“카르넬….”

엘레인은 가만히 카르넬과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넬만 괜찮다면야.

엘레인도 굳이 결혼식을 나중으로 미룰 필요는 없었다.

“후후. 결정된 것 같구나.”

“네. 날짜는 상관없어요. 내일 바로 결혼식을 올려도 돼요.”

“아니. 그건 아니 될 말이지! 결혼식을 치르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번갯불에 콩 볶듯이 바로 결혼식을 할 수 있겠느냐?”

“어…. 하지만 결혼식장은 이미 정해놨고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저에게 어울리는 웨딩드레스를 준비해 놨으니 바로 전해주겠다고 트렌디아 양이 약속했었는데요?”

“아가야. 결혼식은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란다. 게다가 고작 그것만으로는 준비가 한참 부족해!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최대한 완벽하게 치러야 하지 않겠니? 그렇지, 아들아?”

황태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상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사 내내 불편한 티를 내지 않으려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던 황제는 뚱한 얼굴로 엘레인과 카르넬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한 번뿐인 결혼식이니 만전의 준비를 기해야 한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그리 말했다.

뭐, 식사하는 내내 딸아이와 함께 꽁냥거리던 카르넬이 무척이나 거슬렸지만, 그것과 딸아이의 결혼식이 완벽해야 하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니까.

“들었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자꾸나!”

“윽.”

엘레인은 울상을 지으며 황태후와 황제를 번갈아 보았다.

뭔가 일이 잘못된 것 같은데.

나만의 착각이겠지…?

응? 제발 그랬으면!

***

나만의 착각은 개뿔.

“으어어…. 나 죽네.”

엘레인은 소파 위로 엎어지면서 죽는 소리를 냈다.

백화점 최상층.

그곳에서 웨딩드레스만 100여 벌을 넘게 갈아입은 엘레인은 내가 옷걸이인지 걸어 다니는 마네킹인지 모를 심정으로 소파 위에서 꿈틀거렸다.

“어머머. 사람은 고작 이런 걸로 안 죽는답니다. 자, 얼른 일어나서 다음 옷 입어 봐야죠?”

“…그런 일반화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당장 제가 최초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곧 새 신부가 될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랍니다!”

“트렌디아 양이 이쯤에서 끝내주시면 더는 그런 말 하지 않을지도….”

“어림도 없죠! 스페셜한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일이랍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황녀님도 힘내시는 거예요. 알겠죠?”

“그러니까 그 말만 열 번은 더 들었다고요오….”

엘레인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느릿하게 상체를 바로 세웠다.

솔직히 트렌디아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웨딩드레스를 미리 준비해놨다고 했을 때에는 그게 100벌이 넘어가는 줄은 몰랐지.

미리 알았더라면 직접 가는 게 아니라 황궁에서 받았을 거다.

그러면 ‘적당히’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을 테니까.

‘아닌가. 그러면 앨리스랑 베일리가 트렌디아 역할을 대신했으려나.’

거기에 황태후까지 끼면….

오소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 엘레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멋.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

“…아뇨. 차라리 여기가 천국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에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뜻이라는 거죠? 후훗. 다음은 이 드레스를 입어 볼까요?”

비척거리면서 일어난 엘레인에게 새로운 웨딩드레스를 건네준 트렌디아는 방싯거리며 웃었다.

말로는 죽는다~ 죽는다 하면서도 드레스를 건네면 군말 없이 입는 엘레인이 참으로 귀엽게 보였다.

제 눈에도 이렇게 예쁜데 카르넬 입장에서는 오죽하겠느냐는 생각도 간간이 들고 말이다.

“자자. 얼른 들어갑시다.”

트렌디아는 널찍한 피팅룸에 엘레인을 집어넣으면서 함께 뒤따라 들어갔다.

웨딩드레스는 다른 드레스들에 비해 밑단이 길고 치렁치렁한 경우가 많아 트렌디아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렇게 엘레인을 뒤따라 들어간 트렌디아가 막 피팅룸 문을 닫으려던 순간.

갑자기 복도와 연결된 문이 벌컥 열리며 그란디스 국왕이 등장했다.

“나의 달링!”

“깜짝이야. 자기 지금 노크도 없이 들어온 거야?”

“아앗, 미안. 근데 이것 좀 봐! 황녀님이 결혼한대!”

“…저요?”

“…어? 같이 있었어?”

피팅룸 안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엘레인의 모습에 그란디스 국왕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트렌디아가 직접 웨딩드레스를 맞춰주고 있던 모양인데.

뒷북을 쳤다는 생각에 괜히 멋쩍어졌다.

“제가 보낸 청첩장이 이제야 도착했나 보네요.”

“그래, 맞아. 끄응…. 달링, 미리 알고 있었으면 공유 좀 해주지 그랬어.”

“미안해, 자기. 황녀님의 웨딩드레스를 골라줄 생각에 너무 가슴이 뛰어서 깜빡했지 뭐야.”

트렌디아는 시무룩해 하는 그란디스 국왕을 달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 이야길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뭐, 그렇지. 그런데 밖에 자길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럿 있는 것 같던데 아는 사람들이야?”

“나를? 오늘 따로 약속 잡은 거 없는데?”

“그럼 저 사람들은 뭐지?”

그란디스 국왕은 뒤쪽을 가리키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뒤늦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트렌디아는 경악했다.

“이이가 참! 설마 모르는 사람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아, 아니. 다들 꼭대기 층에 볼일이 있다고 해서. 달링이랑 아는 사람인 줄 알았지.”

“내가 못 살아. 잠깐 저리 좀 비켜 봐.”

트렌디아는 거대한 덩치를 지닌 그란디스 국왕을 옆으로 슬쩍 밀어내더니 뒤쪽에 포진해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한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화, 황녀님. 이리 좀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엘레인은 다음 갈아입을 웨딩드레스를 잠시 옷걸이에 걸어놓고는 트렌디아를 따라 복도로 나와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곤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다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아, 황녀님!”

“황녀님이시다! 역시 여기에 계셨어!”

엘레인은 우르르 몰려드는 사람들을 당혹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재 아스터 왕국의 재상을 맡고 있는 로돌프 그란테와 전대 재상이었던 모비 그란테.

거기에 노마스족 필립과 레눔 부자에 의원 협회장 라넬 의원.

뿐만 아니라 풍요 신전의 주교 아르헤와 태양신교 주교 엘녹까지….

아스터 왕국민과 플로스 영지민들의 낯선 조합에 엘레인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다들 여긴 무슨 일이세요?”

“하핫. 청첩장을 받고 바로 황궁을 찾아갔는데, 황태후 전하께서 황녀님이 여기에 계신다고 말씀하셔서 말입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황녀님! 그래서 신랑이 되실 분은 어디에 계신지요?”

“끄읍! 황녀님께서 결혼을 하시다니! 제기랄! 상대방은 아주 복이 터졌군요!”

차례대로 로돌프와 라넬 의원. 그리고 아르헤가 말을 이었다.

다들 청첩장을 받자마자 찾아온 듯한데….

다들 미리 축하하러 올 줄은 몰랐던지라 엘레인은 조금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휘이잉—.

벌컥—!

“황녀니이임!”

별안간 꼭대기 층의 문이 활짝 열리며 거대한 나뭇잎 배를 타고 있던 엘프들이 우르르 창문을 넘어서 들어왔다.

가장 앞에서 흐트러진 옷을 가다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최근 정령신교 대주교가 된 엘프 왕과 주교 이엘로. 그리고 이단심문관 레무스였다.

아니, 왜 멀쩡한 문을 두고 거기서 들어오는 거래?

어처구니없어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들은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앗… 고마워요.”

엘레인은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엘프들과 먼저 온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격렬한 축하 인사였지만, 어쨌든 청첩장을 받자마자 이리 달려온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밝게 웃어준 엘레인은 방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들 차 한잔하고 가실래요?”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고마운 손님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일!

기왕 이렇게 된 거.

겨우 찾아온 휴식 시간을 알뜰하게 챙기자고 생각하는 엘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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