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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화 (415/417)

415화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빙 둘러앉은 사람들은 서로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주 안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크게 접점이 없었던 터라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특히 엘프들을 이번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가끔 호기심 어린 시선이 엘프들에게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어색한 침묵은 엘레인과 트렌디아가 차를 가져오면서 끝이 났다.

“많이 기다렸죠? 간단하게 홍차와 쿠키를 준비해왔어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트렌디아의 도움을 받아, 백화점에서 인기인 쿠키 세트와 홍차를 내어온 엘레인은 흐뭇하게 웃었다.

어휴, 피곤하다.

이제 좀 쉴 수 있겠지.

엘레인이 빈자리에 털썩 앉자, 홍차를 마시던 아르헤가 힐끔. 엘레인을 바라보며 양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나저나 황녀님.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고 계세요?”

“어…. 뭐, 잘 되어가고 있다고 봐요. 이제 겨우 웨딩드레스를 정하긴 했지만.”

하핫. 엘레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아르헤의 눈이 더욱 빛났다.

“어맛! 설마 지금 입고 계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시는 건가요?”

“네. 여러 드레스를 입어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게 제일 마음에 들어서요. 그렇죠, 트렌디아 양?”

“황녀님 말씀이 맞아요. 정확히 102종류의 드레스를 입어보셨는데 그중에 지금 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답니다!”

트렌디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하자 아르헤의 눈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웨딩드레스라는 걸 처음 본 아르헤의 눈에도 지금 엘레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참 잘 어울렸다.

결혼식에 어느 정도 로망을 가지고 있는 아르헤는 꿈을 꾸듯. 몽롱한 눈으로 황녀님께서 결혼을 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황녀님께서 결혼식을 올리신다니. 정말이지 믿기지가 않아요.”

“저도 청첩장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경하드립니다.”

“감사해요, 라넬 할아버지.”

엘레인이 뺨을 발그레 붉히며 웃자 라넬 의원도 허허 웃음을 흘렸다.

인자한 웃음소리 덕분에 자기만의 세상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아르헤는 고개를 휙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웨딩드레스만 겨우 정했다고 하셨죠? 결혼식 준비 진척도가 많이 느린가요?”

“맞아. 저 역시 그걸 물어보려고 했었는데. 공개 결혼식입니까? 아니면 비공개 결혼식을 올리는 겁니까?”

아르헤와 라넬 의원의 물음에 엘레인은 웃는 얼굴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엇…. 그게 실은. 아직 안 정했는데….”

“네? 그걸 먼저 정해야죠!”

“그러니까 말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을 아직까지 정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옳소!”

아르헤의 외침에 다른 이들도 깜짝 놀라서 외쳤다.

아니, 사람이 바쁘다 보면 잠시 까먹을 수도 있는 거지….

느닷없이 혼쭐이 난 엘레인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재빨리 말했다.

“고, 공개가 나을 것 같아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가장 나을 것 같아요.”

“공개적이라…. 생각보다 많은 하객들이 몰려들겠네요.”

“그럼 식장이 꽤 커야 할 텐데. 어디로 할지 제대로 정하셨습니까?”

“그건 태양신교 본단에서 하기로 했어요.”

“흠. 저희 교 본단이 식을 올리기에 가장 적합하긴 하죠. 황녀님께서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는 제가 태양신교 본단에 가서 전할게요.”

“정말요?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엘녹의 친절에 엘레인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르헤는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 이건 아까도 물었던 건데요. 그래서 황녀님의 천생연분! 유일무이한 신랑께서는 어디에 계신가요?”

“아하하…. 카르넬은 아래층에서 웨딩 촬영 준비 중이에요.”

“오잉? 그럼 황녀님께서 지금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던 것도 웨딩 촬영 준비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뭐, 그런 거죠.”

“잠깐만요. 그럼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는 거 아닌가요?”

“어…?”

“아?”

엘레인과 트렌디아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약 한 시간 뒤에 웨딩 촬영 시작인데.

이제 겨우 웨딩드레스 하나만을 맞춘 상황이다.

엘레인은 희게 질린 낯으로 트렌디아를 보며 말했다.

“우리 이거…. 큰일 난 거 맞죠?”

“세상에. 죄송해요. 제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아니, 그렇다 해도 시간이 이렇게나 촉박해질 때까지 아무런 위기감도 느끼고 있지 못했다니!

트렌디아가 자신은 실격이라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짓자 뒤에서 뻘쭘히 서 있던 그란디스 국왕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버럭 소리쳤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빨리 준비하면 되는 거잖아?”

“그, 그렇긴 한데 액세서리와 구두도 맞춰야 하고 헤어스타일링과 메이크업까지 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그런 거라면 제가 도와줄게요!”

“네? 아르헤가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는 말에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메이크업 쪽으로는 꽤 자신이 있거든요! 그쪽은 제가 맡을게요!”

“어….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고맙긴 한데.”

“색 조합 훈수는 저희가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물을 짓고 인테리어를 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색의 조화로움이거든요.”

그때 레눔과 필립이 앞으로 나섰다.

아르헤에 이어서 수인족 부자까지.

엘레인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여태 가만히 있던 엘프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저희들은 헤어스타일링에 도움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엘프들이 사용하는 헤어스타일링 비법 중에 정령들의 힘을 빌리는 방법이 있는데 그걸 사용하면 빠르게 원하는 머리 모양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럼요! 시간을 배로 아낄 수 있을 겁니다!”

엘프 왕 리벨루스의 말에 휘하의 엘프들이 자신만만하게 나서자 재상 부자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여겼는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럼 우리는 현재 웨딩드레스와 어울리는 액세서리와 구두를 찾아오도록 하죠.”

“괜찮으시겠어요?”

“당연하지요. 요즘 패션 잡지를 즐겨보는 터라 이런 쪽으로는 눈이 높아졌으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또 의외의 정보다.

엘레인이 신기한 눈으로 재상 부자를 쳐다보고 있자, 의원 협회장 라넬 의원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저는 지금 당장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나중을 기약하도록 하죠. 결혼 전 건강검진은 필수이니 조만간 신랑과 함께 찾아오시면 신속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도 정말 고마워요.”

엘레인은 감동한 듯 두 눈을 글썽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엘레인은 몰랐다.

웨딩드레스 하나 고르는 데에 몇 시간이나 소요했다는 건 다른 것을 고르는 것 또한 그만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그것을 고작 한 시간 안에 처리한다는 것은 스스로 지옥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

“트렌디아 양.”

“네, 황녀님.”

“저 살아있는 거 맞죠?”

“후후. 거울 가져다드릴까요?”

“…그냥 안 보고 말래요.”

엘레인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청첩장을 보고 축하하러 왔다가 엘레인에게 도움을 준 손님들은 웨딩 촬영 시간을 맞추기 위해 큰 도움을 주고 떠났다.

물론 그만큼 갈려 나갔던 엘레인은 지금 혼이 쏙 빠져나간 얼굴이 되어버렸다.

“사진 앨범에 웨딩드레스 입은 좀비 한 마리가 나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요.”

“그건 걱정 마세요. 정말 잘 나왔으니까요!”

트렌디아는 방긋 웃으면서 엘레인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딱히 큰 힘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이미 체력이 바닥난 엘레인은 종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으악 골이야.

엘레인이 머리를 붙잡고 소파 위에 엎어지자, 트렌디아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저기 끌려다니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촬영은 잘 끝났으니까. 지금이라도 마음 푹 놓으세요.”

“고마워요. 트렌디아 양도 고생 많았어요.”

“후후. 그럼, 여기서 좀 쉬고 계세요. 저는 잠시 다른 일 좀 처리하고 올게요.”

“네에.”

엘레인은 바삐 걸음을 옮기는 트렌디아를 향해 흐느적흐느적. 손인사를 건네고는 소파 아래로 팔을 축 늘어트렸다.

“으으. 삭신이야.”

반짝거리는 겉모습과 달리 엘레인의 속은 아주 너덜너덜해졌다.

하얗게 불태웠다는 게 무슨 말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 엘레인은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다는 듯 폭신한 소파에 뺨을 묻었다.

“아직도 아르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엘레인은 웅웅거리는 귀를 문질렀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도움 덕분에 엘레인은 무사히 웨딩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것을 해내려다 보니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방안은 전쟁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아주 난리가 났었다.

북새통 속에서 풍랑 안의 낙엽처럼 이리저리 쓸려간 엘레인은 세상 피곤한 얼굴을 들어 고개를 돌렸다.

“어?”

그리고 엘레인은 볼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는 작은 거울.

그곳에 비친 제 모습을 말이다.

“트렌디아 말대로 앨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

지친 속내와 다르게 겉은 아주 완벽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거울 속의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요모조모 뜯어보던 엘레인은 문득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스럽지만, 나. 진짜 결혼하는구나….”

솔직히 지금까지는 실감이 별로 없었다.

그냥 식장을 알아보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가 웨딩 촬영을 해야 한다는 말을 따라서 이곳으로 온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춰진. 한껏 꾸며진 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내가 진짜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 가슴 속에 확 와닿았다.

왜인지 묘하게 속이 울렁거린다고 해야 하나?

기쁘기는 분명 기쁜데 이상하게 무언가 불편한 감각이 맴도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시 보니까 나. 꽤 피곤해 보이네.”

그리고 그 불편한 감각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차린 엘레인은 고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오늘 일정은 완벽한 강행군이었다.

결혼식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건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그냥 식장에서 손잡고 반지 교환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았다.

물론 황녀와 황태자의 결혼식이니만큼 일반적인 사람들의 결혼식과 많은 것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직 준비할 게 산더미인데….”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작 이 정도 했다고 이렇게 지치는데.

결혼식장에 가서는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실수나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엘레인은 이제 잘 알았다.

결혼식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또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쌓아 올려서 만들어내는 것인지를.

그런데 그걸 단 한 순간의 실수로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울렁거리던 속이 더욱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나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점차 커져가던 불안은 어느새 그 크기를 불려서 엘레인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태후와 황제가 이전에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최대한 완벽하게 치러야 하지 않겠니? 그렇지, 아들아?

-당연히. 한 번뿐인 결혼식이니 만전의 준비를 기해야 한다.

“…미치겠네.”

엘레인은 쿠션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황태후와 황제는 저를 걱정해서 한 말이지만, 오히려 그 말이 지금 엘레인에게 족쇄가 되어 마음을 옥죄었다.

“나도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하고 싶은데….”

오늘만 해도 웨딩 촬영 시간을 지키지 못할 뻔했던 내가.

벌써부터 불안해하고 있는 내가.

과연 결혼식을 완벽하게 치를 수 있을까?

카르넬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무사히 결혼식을 끝마칠 수 있는 걸까?

엘레인은 답답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정말이지….

“나도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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